2025년 10월, 마라톤 풀코스까지 2주도 채 안 남은 시점, 장모님을 모시고 1박 2일의 여정으로 충북 제천으로 여행을 떠났다. (뜬구름 같은 여행 이야기를 해서 미안하다.) 러닝에 최대치로 집중을 해줘야 하는 시기였다만, 슬럼프도 만났겠다, 한 템포 쉬어가면서 마인드도 다시금 잡아보자는 게 내 심산이었다.
풀코스를 앞두고 여행이라니 헛웃음이 나오는 이도 있겠다만, 사실 여행 일정은 이미 적어도 세 달 전에 이미 잡혀있었다. 아귀가 안 맞긴 하다만, 그게 나라는 사람이니 별말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대회를 얼마 안 남기고 여행을 간다는 이름 모를 누군가에 대한 미안함 때문인지, 아니면 나 스스로에 대한 찜찜함 덕분인지 여행을 계획하며 야무진 생각 하나를 했다.
바로 여행을 가서도 러닝을 하겠다는 결심이었다. 올해 유독 아내 그리고 아이와 여행을 참 많이 다녔다. 매번은 아니지만, 이따금 여행지에서 아침 러닝을 하곤 했다. 고요한 이른 아침, 적막감이 맴도는 바닷가 그리고 시골길을 뛰는 일은 무척이나 신선했다. 이제까지의 경험에 더해 이번 여행에서도 내 발자취를 그곳에 남기고 싶었다. 분명 의미 있는 추억거리가 될 것이었다.
충북 제천이란 도시. 여행해 본 적 있는가. 굽이굽이 이어져 있는 산등성이. 저 멀리 끝도 안 보이는 산세를 보고 있노라면, 가슴이 뻥 뚫리는 것과 같은 시원한 느낌을 받게 된다. 산으로 나있는 도로를 차를 타고 오르락내리락 길을 이동하다 보면 가끔 속이 미슥거리기도 한다. 이것이 러닝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때까지는 몰랐다.
우리가 잡은 숙소는 산 깊숙이에 위치한 리조트였다. 이차선 도로를 타고 한참을 타고 올라가야 만날 수 있는 곳. (도시보다 해가 더 빠르게 지는 것 같았던 느낌은 그저 느낌에 불과했던 걸까.) 하루 종일 제천 주변을 돌아다니며 쌓였던 노곤함을 사우나로 씻어내고, 밤하늘의 무수한 별을 즐기며 첫날의 여행 일정을 마무리했다. 취침 전, 다음 날 아침 러닝을 위해 옷가지를 펼쳐놓고 얼마 되지 않아, 그날 나는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둘째 날, 조용하기 그지없는 이른 아침, 옷을 주섬주섬 입고, 제천에서 나 혼자만의 또 다른 추억거리를 남기기 위해 러닝길에 나섰다. '비록 여행은 왔지만, 나는 이곳에서 대회 준비를 위해 러닝을 하는 사람이야.'라는 자기 위안과 함께 시작된 그날의 러닝. 과연 어땠을까? 정말이지 대환장 파티였다. 이 강도의 러닝은 생애 처음이었다.
이른 아침 숲이 뿜어내는 신선한 공기에 홀딱 반해버린 나였지만, 반대로 높은 경사도를 자랑하는 산등성이를 거슬러 러닝을 하는 일엔 혀를 내둘렀다. (지형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나의 불찰이었다.) 내가 여태껏 연습해 왔던 주로는 대부분 평지였다. 힘에 부대낄 만큼 언덕인 주로를 달려본 일이 손아 꼽았다. 바보 천치같이 그곳도 평지와 같은 컨디션이라 생각했던 나였다.
트레일 러닝. 들어본 적 있을까? 산과 숲길 같은 자연 속을 달리는 아웃도어 스포츠로 일반 도심 러닝과 다른 특유의 도전 정신을 불러일으키는 러닝이다. 사실 내가 이날 러닝을 한 지형은 높은 경사로를 자랑한 포장도로였다. 엄밀히 말하자면, 트레일 러닝은 아닌 셈. 그럼에도 헐떡대며 뛰고 있는 나 자신을 보고 있으니 기가 차더라. (그렇다면, 트레일 러닝은 대체 얼마나 힘들다는 소리인 걸까.)
언덕에서는 숨이 목 끝까지 차올라 호흡하기 바빴으며, 내리막 길에선 속도 제어가 힘들어 근육에 많은 힘이 필요했다. 그날 나는 단 3.47km의 거리를 주행하며, 백기를 들었다. 평균 페이스 7분 49초, 러닝 시간 27분. 마음에 차지 않았던 그날의 기록. 평지에서의 러닝과 판이하게 달랐던 그곳에서의 러닝은 나 자신을 새로이 담금질하게 만들었다.
'겸손하라.'라는 문장을 자연이 내게 선사한 느낌이었다. 러닝을 시작하고 두 달 만에 하프 마라톤을 완주하고 시건방을 떨었다. '이렇게 단기간에 해내다니, 나 소질 있는 거 같아.'라고 자만했다. 이는 마라톤 풀코스라는 신세계를 만나면서 산산이 부서졌다. 거리는 도통 늘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고, 한계에 부딪힐 때마다 좌절했다. 그러다 이 깊숙한 산속에서 맞이한 또 한 번의 부침은 나 자신을 어떻게 만들었을까?
나 자신의 현재 상황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기로 했다. 대회까지 9일 남은 시점, 더 이상의 큰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환경은 아니었다. 제천에서의 러닝은 부족함 그 자체였지만, 그 삶이 내가 이제껏 준비해 온 마라톤 준비의 여정과 같았다. 그저 이제껏 내가 꾸준히 연습해 왔던 그대로 그리고 '풀코스 마라톤 완주'라는 그 목표 하나를 잊지 않고 다시 겸손하게 그리고 흔들림 없이 한 걸음씩 나아가기로 했다.
다시 한번 제천에서 뛸 수 있는 날이 온다면, 그날의 기억이 자연스레 떠오르지 않을까. 그날은 고대하며, 연재 다음화에서 계속 이어가 보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