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년의 서울생활은 은우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기피, 은둔, 무력, 자책.... 어두운 단어 밖엔 떠오르지 않는다. 이혼이 한 여자의 인생을 이렇게까지나 망가뜨릴 수 있는 것인가..라는 물음에서 시작된 고민은 결국 사람에 따라 다르다는 생각으로 마무리되었다.
단순한 성격 차이의 문제였더라면 헤어지고 다시 친구처럼 지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현실에서 쿨한 관계로 전남편 전와이프로 잘 지내는 케이스들이 생각보다 많으니까. 하지만 은우처럼 가정폭력과 가스라이팅으로 얼룩진 결혼생활은 지워버리고 싶은 단편으로 남았을 뿐이다.
악몽에 시달리고 또 똑같은 운명에 놓이진 않을까 남자를 피하게 되고, 그렇게 조용히 살려고 노력하는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아무 이유 없이 악의적인 험담을 해댄다. 그녀의 사정 따윈 궁금하지 않다. 내 얘기가 아닌 남의 이야기다. 남의 얘기는 뉴스에 나올 만한 내용이라도 단순히 재밌는 이야깃거리에 불과하다. 내가 겪을 수 있는 일이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늘 잔인하고 배려 없는 칼날 같은 단어들을 쏟아내곤 한다. 그 날카로운 단어는 오롯이 '피해자'의 몫이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은우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어린 남자 직원이 은우네 팀으로 발령을 받았다. 이미 연차가 좀 되고 그 친구보단 아는 게 많으니 친절하게 알려주고 도와주는 건 선임이 후임에게 베풀어야 할 당연한 업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그 친구도 친절하게 알려주는 은우에게 많은걸 물어보고 친해지는 건 당연지사.
그랬더니 소문이 난다. 은우가 어린애 꼬신다고. 황당하고 억울하지만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해명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결국 그 직원과는 어쩔 수 없는 거리를 스스로 두게 되고, 이 눈치 없는 직원은 오히려 서운하다며 은우를 탓한다.
이런 일도 있었다. 동갑에 직급도 같은 다른 팀 여직원이 친절하게 다가왔다. 동갑인 걸로 아는데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다며 하루에 몇 번이고 카톡을 보내고 밥도 같이 먹자하니 달갑지는 않지만 그렇게 자주 보게 됐다. 뭔가 필요하거나 부탁할 때만 친절한 사람들과는 달리 늘 걱정해주고 은우 편을 들어주니 은우도 마음을 쉽게 열었나 보다. 스스럼없이 지난 얘기들을 하고 힘들었던 얘기들을 술술 털어놓았다. 현재 우울증 약도 먹고 있는데 나름 좋아지려고 노력하고 있다.. 네가 이렇게 걱정해주니 더 좋아질 거 같다고 하면서 친한 친구가 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렇게 믿었던 사람이 사무실에 갑자기 찾아와 이상한 소리를 한다.
"은우야..... 너 눈 풀렸어.. 약 먹을 시간 지났다보다"
"왜? 은우 어디 아파?"
상관들은 걱정이 되니 물어볼 수밖에..
"아.. 은우 정신과 약 먹잖아요. 모르셨어요? 은우 약 제시간에 안 먹으면 정신 이상해져요. 약은 있니? 병원같이 가줄까? 아 그리고, 너네 집 비번 알려줘 혹시 필요할지도 모르니까"
나는 이 얘기를 듣자마자 미친 X이라고 욕했다.
알고 보니 다른 부서 사람들에게도 은우를 정신이 이상한 사람이라고 얘기하고 다녔다고 한다. 은우 앞에서는 간 쓸개 다 빼줄 사람처럼 했던 게 이런 은우 사정을 알고 싶어서였다고 생각하니 피가 거꾸로 솟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 친구는 누구에게나 이런 식으로 다가와서 약점을 잡고 험담을 하는 사람이었다. 다 아는데 은우만 몰랐던 거다. 무서워서 피하는 게 아니라 더러워서 피하는 사람.. 그 입에 내 얘기가 오르는 게 싫어서 다들 거리 두는 사람.. 그걸 모르고 그 입에 지 얘기를 올리게 한건 은우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사람을 제대로 보지 못한 잘못..그러나 그건 우리도 예외는 아니다.
서울로 출발하려고 하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중부고속도로에 진입할 때쯤 추적추적 오던 가을비는 어느새 장대비가 되어 있었고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폭우 속에 은우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안심이 되었다. 이런저런 얘기가 빗소리에 섞여서 몽환적으로 들렸다. 현실인지 아닌지 그 고속도로에서의 4시간은 지금도 현실감이 별로 없다. 상당히 많은 얘기를 했는데 모든 단어가 공중에 흝어져 버리는 느낌.. 와이퍼가 가장 세게 움직이고 있는데도 눈앞이 안 보이는 상황....어찌 보면 은우의 현실 같아서 더 답답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 아이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나와 조카들이 함께 자기 집으로 간다고 들떠 있는 이 아이를 어쩌면 좋나.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어쩌다 이렇게 깊어져 버린 걸까. 너무 나만 생각하고 살았나. 나 산다고 동생 힘든 건 너무 모른 척하고 살았던 건 아닌가.. 차 안에서 그런 생각을 대부분 했던 거 같다. 은우는 시시껄렁한 어젯밤 사건 사고들.. 그런 일이 있었고 이랬고 저랬고 수다에 한이 맺힌 사람처럼 입을 쉬지 않고 움직였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꾹꾹 닫아놨을 그 입을 말이다.
그렇게 나는 은우가 결혼하고 혼자가 되고.. 그렇게 10년이 훌쩍 지나고 나서야 은우가 사는 곳을 갈 수 있었다. 나 너무 힘들어 도와줘라고 손을 내밀 때까지 나는 한 번도 은우를 찾지 않았다. 이사를 4번 넘게 하고 전셋집 월세집들을 전전할 동안 나는 단 한 번도 은우의 집을 가보지 않았다.
오지 말라고 한 것도 있다. 보여주기 싫었을 거다. 자기 딴에는 자기가 사는 모습이 구질구질하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그 핑계로 나 또한 오지마라니까 안 가는 거라고 그에 대한 명분을 스스로 만들었던 거 같다. 어쩌면 내가 불쑥이라도 찾아와 주길 바랬을 텐데.. 애 키운다고 남편 내조한답시고 한 번을 안 간 게 마음이 너무 아팠다. 창문마다 쳐져 있는 암막커튼이 은우가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대변하고 있는 거 같아서 울컥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집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워낙에 깔끔한 성격인 데다 흐트러져 있는 꼴을 못 보는 성격이다. 강박에 가까울 정도로 먼지 하나 없다. 사람 사는 집 맞나 싶을 정도다. 오자마자 냉장고며 싱크대를 검사했다. 냉장고는 텅텅... 500미리짜리 맥주 몇 개가 이거 냉장고 맞아하는 느낌으로 들어 있다. 싱크대 상부장엔 박스째 주문한 게 뻔한 햇반과 김.. 그리고 몇몇 통조림들..
오면서 큰 조카 소원 들어준다고 SM타운도 들리고 롯데월드 야간개장 퍼레이드까지 보고 왔더니 이미 시간이 10시가 다됐다. 피곤하지만 밀린 얘기며 하고 싶은 말들이 너무 많았다.
"언니야 고양이 한 마리 키우까?"
"갑자기 웬 고양이?"
"사실은 얼마 전에 수면제를 너무 많이 먹은 거라.. 기억이 하나도 안 나는데 일어나 보니까 온 몸에 멍이 들어 있더라고.. 내가 뭘 했는지 전혀 기억이 안 나는데 너무 무섭더라"
"왜 그렇게 많이 먹었노? 정량이 있잖아?"
"응, 있는데 먹어도 잠이 안 오니까.. 하나 더 먹음 잠이 오겠지 싶었지머.."
"아이고... 내가 못 산다.."
"그날 아침에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우리 집에도 생명이 있으면 내가 좀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나쁘지 않을 거 같다."
그런 얘기들을 주고받으며 부산으로 병증에 의한 전근 희망신청을 하기로 했다. 이게 티오라고 하지.. 공석이 있어야 가능한 거라 언제가 될지도 모르고 이렇게 마음을 먹고 나니 은우도 나도 하루빨리 서울을 벗어나고 싶어 진다. 그 날밤 우리는 내일 당장 서울을 떠날 사람들처럼 그동안 힘들었던 얘기들을 이야기했다. 어쩜 그때가 10년이란 시간 동안 가장 서로 솔직했던 시간이 아니었을까..
수면제 없이는 잠을 못 자는 은우는 우리에게 안방을 내어주고 굳이 작은 방에서 잠을 청했다. 내일은 연차 신청이 안되어 있어서 은우는 출근을 해야 하는데 지금 자서 내일 어쩌지... 나는 여기까지 와서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언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