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고양이에게 위로를 받다.

by 열정아줌마

서울을 다녀온 지 한 달이 지났다. 시간은 정말 정확하게 자기가 가야 할 길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간다. 시계 같은 인생을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어떤 주변 상황에 휘둘리지 않고 묵묵히 자기 일만 해내면 되는 시계 같은 삶.. 나도 은우도 나 자신보다 주변에 영향을 많이 받다 보니 그렇게 사는 삶을 동경할 때가 있다. 물론 인간인지라 주변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시계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을 우린 더러 보지 않나. 재미없고 팍팍한 삶일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마음은 평화롭겠지.. 그들이 막연하게 부러웠다. 하지만 우리에게 그런 삶은 허락되지 않을게 뻔하다. 우직한 삶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주변의 움직임에 따라 휘청거리지만 않아도 좋겠다.. 막연하게 그런 바람으로 하루하루 보냈다.


"언니야. 바쁘나?"

오래간만에 은우가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했다.


"아니 아무리 바빠도 사랑하는 동생 전화받을 시간은 있다. 와?"

너스레를 떨어본다. 그 말 한마디에 또 실실 웃음이 터진다.


"으이그.. 하여튼.. 있잖아 저번에 내 고양이 키우고 싶다했다이가"

"어. 그랬지.."

"너무 데리고 오고 싶은 애기가 생겼는데 언니 생각은 어떻노?"


"키우는 거야 쉽지만 책임질 수 있겠나? 생명을 키우는 게 쉬운 일은 아닌데"
"너무 데리고 오고 싶다. 임보 선생님이 데리고 있는데 아무도 안 데려가는 갑드라"

"장애가 있거나 그런 거 아니가?"

"그런 건 아니고 카오스라고 고양이 색깔이 섞여서 안 이뻐서 그런거 같은데"

"아..... 그럼 뭐 니가 알아서 하면 되지"

"어 언니야 알았다!!"


이건 뭐 이미 답은 정해놓고 물어보는 식이다. 너무너무 신이 났다. 목소리에 이렇게 생기가 도는 게 얼마만인지. 그런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해 준 것만으로 그 카오스 털 색깔을 가진 고양이 녀석은 이미 백점 만점에 백점이다.


마음을 먹으니 그 뒤는 일사천리로 진행이 된다. 임시보호를 하고 있던 선생님이 이 아이는 아무도 데려가질 않아서 곧 동물보호센터로 되돌려 보낼 생각이었다고 한다. 아직 태어난 지 3개월밖에 안된 버려진 아기 고양이... 어쩌면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못생긴 아기 고양이가 은우 자신 같아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분명 연민이고 동정심이다. 버려진 아기 고양이를 자기가 책임지고 싶다는 그 마음이 은우 자신을 향해서도 생기길 바랬다. 누군가는 은우를 버렸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자기 자신만은 사랑해주길.. 하지만 은우는 자기 자신을 늘 학대하고 미워했다. 제발 이 버려진 아기 고양이가 은우에게 그 사실을 일깨워 줄 수만 있다면.. 자기 자신을 아기 고양이 돌보듯이만 할 수 있다면... 적어도 우울증은 은우에게서 떠나갈 수 있을 텐데... 나도 못한 일을 아기 고양이에게 기대하는 꼴이라니 한심하다.


아기 고양이 이름은 쿠르로 정했다. 일본어로 くる [kuru]는 오다. 다가오다 라는 뜻이다. 아기 고양이 한 마리가 은우에게 좋은 일들을 많이 가져다주길 바라는 마음에 내가 권해준 이름이다. 온갖 의미를 다 갖다 붙이고 그럴싸하다며 일사천리로 정해버렸다. 이럴 때는 손발이 척척이다. 그렇게 쿠르는 은우의 첫 식구가 되었다.


사진 속에 쿠르는 너무나 작다.. 만지면 부서질 거 같은 조그만 생명체가 그래도 자기를 선택해준 은우가 좋은지 연신 옆에 와서 앉는다. 사진만 봐도 사랑스러운데 은우는 어땠을까. 처음으로 은우가 사는 곳에 다른 생명이 함께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은우는 안심이 되는 모양이었다.


아기 고양이 한 마리가 주는 힘은 생각보다 컸다. 집에 돌아와도 돌봐야 할 식구가 있다는 게 은우에게는 많은 활력을 불러일으켰다. 고양이 용품들을 사고 아기 고양이에게 맞는 사료들을 고르고 장난감 하나를 선택하면서도 행복해했다. 야간 근무 때 혼자 두고 오는 게 마음에 걸려서 휴게시간에 잠시 다녀갈 정도로 진심으로 쿠르를 돌봤다. 그런 정성에 쿠르도 은우 껌딱지가 되어 갔고, 그렇게 둘은 베프가 되었다. 사람보다 동물이 나을 때도 있구나. 아기 고양이 쿠르에게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그렇게 고양이 한 마리로 시작한 은우의 집사 생활은 곧 새 식구 맞이로 이어졌다. 이번엔 너무 작고 이쁜 고양이다. 배는 눈처럼 하얗고 등은 고등어 색깔을 가진 진짜 한 뼘도 안될 것 같은 아이. 은우는 그렇게 아기 고양이 두 마리의 집사가 되었다.


12월이 되면 언제나 아쉽고 두려웠다. 여느 사람들이 하는 일반적인 아쉬움과 후회가 아니라 막막함이었다. 눈앞에 먹구름이 가득한데 내일은 맑을 거라고 애써 위로하는 시간들이 10년간 이어졌다. 늘 똑같은 해였고 더 나아지지 않았다. 은우가 바뀌지 않는 한 새로운 세상은 열리지 않는다. 은우 스스로 그 틀을 깨고 나오지 않으면 새로운 세상은 은우에게 다가오지 않는다는 것을 은우도 나도 알고 있다. 우울증을 잘 알지 못하는 이들은 마음먹기 다른 거 아니냐고 쉽게들 얘기한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라고.. 나 역시 처음엔 그렇게 말을 했었다. 하지만 그런 말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똑같은 해가 반복되면서 스스로 깨닫게 되었다. 몰라서 안 하는 게 아니다. 은우도 긍정적으로 살고 싶고 희망을 얘기하고 싶다. 하지만 그래서 병인 거다. 그렇게 되지 않기 때문에.. 악을 쓰고 기를 써도 그 덫에서 빠져나오기가 쉽지가 않다. 내면이 강하고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있는 사람들은 금방 좋아지기도 한다고 한다. 하지만 자존감이 바닥인 데다 자기 스스로 '못난이 바보 '라고 생각하는 은우에겐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은우야.. 사람 일은 또 모르잖아? 그러니 힘을 내자..'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새해 최고의 덕담이었다. 하지만 그 해는 조금 달랐다. 여기로 가면 길은 있겠구나 막연한 믿음 같은 게 생기기 시작했다. 은우도 나도.. 그 계기가 서울에서의 3박 4일의 시간이었는지.. 아기 고양이 덕분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 우리에게도 희망이란 게 생길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생기기 시작했고 그 기대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현실이 되었다.


"언니야! 내 부산 간다이!!"

"뭐라고? 진짜가?? 언제?"

"놀라지 마라.. 다음 달!!"

"야.. 잠깐만.. 다음 달??? 그렇게 갑자기?"

"어.. 언니야 내 집을 좀 구해야 되는데.."

"엄마 집에서 다니라. 엄마도 그랬으면 하던데"

"아니다.. 언니야 내 엄마랑 살면 맨날 싸울 거다. 10년을 따로 살았는데.. 우리 똑같다이가 알잖아.. 헤헤"

"하긴.. 그건 그런데.. 그래도 갑자기 집이 구해지겠나?"

"정 안되면 엄마 집으로 가야 되겠지만 따로 사는 게 맞는 거 같아서.. 그래도 부산이니까 언제든지 볼 수 있고 너무 좋다"

"알았다. 내가 한 번 알아보께."


그렇게 은우는 갑자기 부산으로 오게 되었다. 모은 돈도 없는데 부모님 집으로 들어가는 게 좋은 방법이겠다 싶지만 엄마랑 성격이 똑같아서 평소에도 자주 부딪히는지라 어쩌면 따로 사는 게 현명할 거란 생각도 들었다. 둘이서 싸우면 중간에 나만 힘들어질게 뻔하다. 나이 마흔에 독립.. 이상할 것도 없다.

그나저나 이 엄동설한에 집이 있으려나.. 큰일이네.. 내 마음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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