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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민영 Sep 21. 2024

영광과 상처가 공존하는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국회의사당, 체크포인트찰리 독일자유여행4일차

브란덴부르크 문, 국회의사당,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광장, 체크포인트찰리 등 영광과 상처가 공존하는 베를린 여행


전날 일찍 충분히 쉬었더니 엄마아빠는 6시도 되지 않아 일어났다. 차도 마시고 책도 읽고 숙소 주변 풍경도 즐겼다. 원래 계획은 브런치 식당에서 식사를 하기로 했으나 느지막이 일어난 딸의 속도에 맞춰서 숙소에서 간단히 아침을 먹고 예쁜 숙소에게 안녕 작별 인사를 했다. 

버스를 타고 지하철로 갈아타서 고속열차를 타고 프랑크푸르트에서 베를린으로 가는 일정이 있는 날이다. 열차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해서 보니 12시 고속열차가 없어졌단다. 한국에서 예정된 기차가 없어지면 난리가 날 텐데 독일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라고 한다. 독일은 열차 지연과 결항이 많기로 유명하다고 한다. 독일열차가 낡고 오래되어 그렇다고 한다. 독일은 새것보다는 오래된 것을 고쳐 쓰는 경우가 많단다. 독일열차가 낡은 것도 있겠지만 출입문을 열고 닫는 일을 기관사가 하지 않고 승객이 하는 구조라서 지연되는 일이 잦은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 우리나라는 시간 되면 승객이 제대로 타지 않아도 기관사가 일방적으로 문을 닫고 출발하면서 발생하는 문제가 있지만 기차가 지연되는 시간이 짧은 편이다. 독일과 한국 열차 운행과 관련한 장단점이 있다. 


열차가 결항인 데다 토요일이라 유난히 사람이 많았다. 게다가 멀리 이동하는 사람이 많은지 우리 가족처럼 큰 케리어를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베를린까지 이동하는 고속열차는 좌석예매를 안 해서 취소하고 다시 예매해야 하는 번거로움 없이 먼저 온 기차를 탔다. 예약된 좌석이 아닌 빈자리는 앉은 사람에게 우선권이 주어진다고 하여 자리를 찾았으나 좀처럼 자리가 나지 않았다. 겨우 한자리를 잡고 앉아서 세 명이 번갈아가면서 앉았다. 1시간 40여분을 타고 베를린으로 달려갔다. 공공와이파이는 자주 끊어져서 데이터를 켜고 드라마를 보았다. 독일에서 공공와이파이는 잘 안된다. 기차는 에어컨이 작동이 안 되어 더웠고 역방향이라 멀미가 났다. 드라마 보다가 졸다 보니 베를린에 도착했다. 


베를린의 첫인상은 '역시 수도, 영광과 상처가 공존하는구나!' 했다. 2차 세계대전에 폭격 맞은 탑(카이저 빌헬름 기념 교회, 독일의 첫 번째 황제 카이저 빌헬름 1세를 기리기 위해 지은 교회)과 벤츠 건물도 보았고, 무엇을 주장하는지는 잘 보지 못했지만 시위대도 만났다. 함부르크와는 달리 수도에 왔다는 느낌을 확실히 받았다.

 

점심은 지하철역과 숙소에서도 가까운 이탈리안 레스토랑으로 갔다. 스파게티와 맥주를 시켰고, 식당에서 새로 만들었다며 추천해 준 후식(빵류)까지 먹었다. 음식은 맛있었다. 야외 식탁에서 식사 중에 햇살이 따가워서 파라솔을 내려야 했다. 독일 사람들은 따가운 햇살아래서도 음식을 잘 먹고 있었다. 독일은 겨울이 길고 추워서 그런지 햇살을 좋아하는 것 같다. 독일 8월 햇살은 따갑고 약간 덥지만 그늘은 서늘하다. 프랑크푸르트에서는 더워도 맑고 깨끗한 느낌이었는데 베를린은 습하고 탁하면서 더웠다. 항시 이런 날씨인지는 모르겠다.  


케리어 짐이 무거워서 조금 일찍 숙소에 입실하고 싶어서 문의 전화를 했더니 다시 연락 준다고 했다. 한 시간이 지나도록 연락이 없어서 천천히 숙소로 가보기로 했다. 베를린에서 머물 숙소는 기업에서 운영하는 아파트형이다. 회사에서 운영하기 때문에 더 체계적일 줄 알았는데 입실 가능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연락이 없는 것이 이상했다. 아파트형 숙소의 안내데스크가 2층에 있어서 딸이 데스크로 찾아갔다. 데스크에는 한 명이 근무하고 있었는데 바빠 보였고 아직 청소가 되지 않아서 입실이 늦어졌다고 했다고 한다. 기업형 아파트 숙소인데 청소 문제로 입실이 늦어지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딸은 나중에 후기에 서비스가 형편없다는 평가를 쓰겠다며 별렀다. 딸이 말하기를 몇 달 생활해 보니 거리에서 만나는 독일 사람들은 친절한데 업무처리는 느리다고 한다. 복지가 잘 되어 있어서 열심히 공부하거나 일해야 하는 이유가 부족한 것 같다고 했다. 복지국가의 음과 양인 듯하다.

청소가 되지 않아서 입실 시간이 늦어졌는데 숙소도 딸이 원래 생각했던 숙소가 아니었다. 기업형 숙소라서 여러 곳에 숙소가 있었는데 지하철역에서 자꾸 멀어지는 곳이었다. 엄마아빠는 한량처럼 베를린 시내를 언제 걸어보겠느냐는 마음으로 걸어갔다. 다행히 숙소 가까이에도 지하철이 있었다. 

숙소에 짐을 푼 시간은 본래 예상시간보다 늦어져 4시 40분이 되어서야 입실했다. 숙소는 크고 넓었고 깔끔했다. 베를린이라 숙박비는 다소 비쌌지만(1박 24만 원), 4박 5일을 머물 예정이라 숙소가 좋아야 했다. 빨래도 가능하고 식사도 해 먹을 수 있는 곳을 골랐다. 세탁기와 주방용 기구들도 모두 갖춰져 있어서 좋았다. 독일인이 생활하는 아파트에 몸만 들어가는 것 같았다. 독일여행 중 숙소에 에어컨이 없어서 낮에는 약간 더울 때도 있었지만 지낼만했다. 더위를 많이 타는 사람이라면 숙소를 예약할 때 에어컨 유무를 꼭 확인하는 것이 좋다. 우리나라 숙소 생각하고 그냥 가면 에어컨이 없어서 힘들 수도 있다. 

짐을 내려놓고 마트에 갔다. 다음날이 일요일이라 마트가 문을 닫기 때문에 충분히 장을 봤다. 물도 많이 사고, 과일과 요구르트, 맥주와 음료수도 넉넉하게 샀다. 


평화의 문 브란덴부르크 문


5시가 넘어서 베를린 첫 여행지 브란덴부르크 문을 찾아 나섰다. 

브란덴부르크 문(Brandenburg Gate)은 프로이센의 수도로서 베를린의 위상을 높이고 평화를 기원하기 위해 1791년에 세워진 평화의 문이다. 베를린 중심부 파리저 광장에 위치하고 있고 넓은 광장이 있으며 주변에는 많은 건물이 늘어서있다. 마치 우리나라의 광화문 광장 같다. 

이 문은 1961년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면서 출입제한구역으로 동서양 사람들이 방문하거나 통과할 수 없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후에는 독일 통합의 상징이 되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1788년~1791년 건축) 때 고전주의 양식으로 건축되었다. 그리스 아테네의 아크로 폴리스 입구를 지향한 양식으로 칼 고트하르트 랑스 한(Carl Gotthard Langhans the Elde)이 디자인했다고 한다. 

지붕에는 네 마리 말이 이끄는 마차 콰드리가(Quadriga)가 멋진 모습을 자랑한다. 말고삐는 평화의 여신 에이레네(Eirene)였다가 승리의 여신 빅토리아가 쥐고 있다. 월계수로 된 리스는 프로이센을 상징하는 독수리와 철십자 문양이 있다. 이 조각상은 브란덴부르크 문에서 세 번 철거되었다. 1806년 프로이센의 패배 후 나폴레옹이 파리로 가져갔고, 8년 후 얼라이언스의 승리로 다시 재자리로 되돌아왔다. 제2차 세계대전 전투 중 폭격이 심해서 손상되었고 1956년 재건축되었다. 1989년 새해 전야 통일 축하 행사 때 불꽃놀이로 심하게 손상되어 2년 후에 복원했다고 한다. 


브란덴부르크 문에 도착했을 때는 석양빛이 하늘을 물들이고 있었다. 브란덴부르크 문에서 과거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고 웅장하고 위풍당당해 보였다. 여러 나라에서 온 듯한 관광객들이 몰려 있었다. 반갑게도 우리나라 말이 여러 곳에서 들렸다. 어떤 분은 우리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아보고 아니 말로 알아들은 것 같다. 우리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여섯 개의 기둥이 문을 바치고 있고 청동 마차를 모는 여신이 우뚝 선 콰드리가가 멋지다. 콰드리가를 바라보고 사진을 찍고 뒷모습도 카메라에 담았다. 관광지에 온 느낌이 확실히 들었다. 


독일 의회의 상징 국회의사당


브란덴부르크 문 가까이에 국회의사당이 있었다. 

국회의사당은 1894년 지어졌으나 1933년 방화사건과 전쟁 폭격으로 크게 훼손되어 방치되었다. 1960년대 재건되었지만 사용하지 않았다. 1991년 연방 하원 원로 회의에서 건축가 파울 발로 (Paul Wallot)가 설립 한 제국 의회 건물을 복원하여 전 독일 의회의 자리에 건축하기로 하였다. 1994년 제국 의회 국제 건축 공모전에서 영국의 건축가 노먼 포스터 (Norman Foster)가 국회 의사당 건물을 개조하기로 계약했다. 국회의사당의 역사를 존중하고 현대적인 국회의사당 설계를 목적으로 했으며 미래를 지향하고 에너지 개념을 구현하는 것으로 구상되었다고 한다. 이전 제국 의회 건물은 최신 통신, 사무실 및 업무 공간, 기술 등 모는 요구 사항을 충족하는 현대적인 의회로 개조되었다. 건물은 전체적으로는 네오르네상스양식이며 외관은 고전주의적인데 모던한 투명돔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독일은 1949년 독일연방공화국으로 수립되었으며 의원내각제로 운영된다. 독일 연방공화국은 연방대통령이 국가원수이며 정부수반은 연방총리가 한다. 독일의 실제 권력은 총리가 가지고 있다. 현재 독일 대통령은 사회민주당의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이며 벨뷔 궁전에 관저가 있다. 연방총리는 올라프 숄츠(사회민주당)이다. 총리청은 국회의사당 바로 옆에 있다고 하는데 정확히 어디인지 확인하지 못했다. 독일은 유럽연합에서 가장 강한 경제력을 가지고 있어서 독일총리는 유럽연합에도 큰 영향력이 있다고 한다. 독일의 대통령이 누구이고 총리가 누구인지 관심이 없었는데 국회의사당을 다녀와서 찾아보았다. 

독일 의회는 하원(분데스탁 Bundestag)에 해당하는 독일 연방의회와 상원(분데스라트 Bundesrat)에 해당하는 독일 연방상원으로 나뉜다. 하원은 직접선거(소선거구제)와 정당비례대표제의 혼합 형태로 선출되고, 상원은 직접선거가 아닌 각 주정부의 대표로 구성된다. 한국은 대통령제이기 때문에 의원내각제를 이해하기는 다소 복잡하고 어려운 점이 있다. 


저녁 햇살을 받은 국회의사당은 노란빛을 띠고 있었다. 입구에는 "Dem Deutschen Volke"라고 쓰여있는데 'To the German people'라고 하여 "독일 인민에게"라는 의미다. 국민에게 봉사하는 의회를 지향한다고 해야겠다. 

독일사람들의 의식에는 그리스와 로마에 대한 경외심, 공경 혹은 환상이 많은 것 같다. 어디를 가나 중요한 곳은 그리스. 로마시대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국회의사당 입구에 우뚝 솟은 기둥은 그리스 신전을 연상케 했다. 광장은 공사 중으로 펜스가 있어서 앞쪽에서 제대로 된 사진을 촬영하지 못했다. 측면과 뒷면은 자리를 바꿔가면서 사진을 찍었다. 국회의사당 돔은 무료입장이 가능하다고 한다. 우리가 방문한 시간은 토요일인 데다가 7시가 넘어서 내부 구경은 하지 못했다. 베를린 시내 전경을 360도로 볼 수 있다고 하니 예약하거나 현장예매를 할 수 있다고 하니 구경하면 좋겠다. 무료 오디오가이드 서비스는 한국어는 없고 영어는 가능하다고 한다. 


국회의사당 옆으로는 슈프레강(Spree)이 흐른다. 슈프레강은 하펠강의 지류로 독일 북부를 흐르는 강이다. 체코와 폴란드의 국경 근처에서 발원해 베를린 중심부까지 흐른다. 슈프레강 길이는 398km로 슈판다우에서 하펠강과 합류하며, 하펠강은 그대로 흐르다가 엘베강(함부르크에서 보았던 강)에 합류하여 북해까지 흘러간다. 


강 주변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버스킹 기타 연주자가 있었고, 강에는 유람선 관광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노부부로 보이는 두 사람이 기타 연주를 하고 있었는데 무척 감미로웠다. 음악을 들으며 강을 바라보며 분위기에 취했다.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광장에서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며 


국회의사당을 나와 브란덴부르크 문을 지났다. 나치에 의해 홀로코스트에서 살해된 유대인 희생자 추모 공원으로 이동했다.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광장은 2005년에 조성했다. 공원에는 비석으로 보이는 돌이 넓은 공간에 놓여있었다. 기념비의 크기가 저마다 다르며 멀어질수록 바닥이 깊고 기념비가 높아서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비석으로 보이는 조형물은 무릎 높이부터 4.7m 높이까지 다양하며 2,711가 있다. 조형물 위에 올라가거나 앉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조형물 사이를 지나가다 보면 홀로코스트에 빠져드는 느낌이 든다. 아이들은 술래잡기 놀이를 할 수도 있을 것 같은 공간인데 홀로코스트에 잠길 것 같은 공포감이 일어서 오싹하여 놀이는 잊어버릴 것 같다. 

출구 쪽으로 나오면 정보관이 있는데 당시에 사건들과 홀로코스트 유대인들이 주고받던 편지도 소개되어 있다고 한다. 우리는 시간이 늦어서 보지 못했지만 이곳을 방문한 사람이라면 전시관도 가보길 바란다. 


독일 여행 중에 독일에 대해 갖는 마음은 이중적이었다. 독일의 발전된 모습을 보면서도 전범국가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독일 곳곳에 남아 있는 상흔은 여러 곳에서 목격되어 씁쓸했다. 전쟁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추념하는 독일과 독일인은 어떤 심정으로 살아가는지 묻지는 않았지만 복잡하고 죄스러운 마음이 공존하지 않을까 여겨진다. 일본은 아직도 자신의 침략을 감추기만 하고 많은 희생자들에게 자발적인 참여였다며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있는데 독일은 자신의 잘못을 사죄하며 희생자를 기리는 기념비를 세웠는데 달라도 너무 다른 두나라다. 


저녁은 일본식 라멘을 먹었다. 전쟁의 주범인 일본을 의식하고 먹지는 않았다. 나라는 나라고 음식은 음식이니 식사는 맛있게 했다. 독일에서 일본식당은 꽤 인기가 있는지 사람들이 많았다. 동양음식에 대한 호감도가 높으면서 일본음식과 한국 음식은 꽤 인기가 높다고 한다.  


저녁을 먹고 나니 9시 반이 넘었다. 늦은 시각이라 숙소로 돌아갈 거라고 예상했는데 딸은 엄마아빠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이 많았다. 베를린 밤거리를 한참 걸었고 오토 사진 촬영하는 곳에서 가족사진도 찍었다. 우리나라 사진 촬영 장소와는 너무나 다른 공간이다. 딱 한 명 들아가면 될 것 같은 공간에 작은 가건물 부스는 폐기 처분될 것 같은 모양새다. 딸이 레트로 감성으로 사진을 찍어야 한다고 하여 세 명이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제대로 구도가 잡히지 않아 얼굴이 온전히 담기지 않았다. 흑백사진으로 60년대 감성으로 울퉁불퉁 찍혔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사진은 줘도 안 가질 텐데 추억이라며 우리끼리 신났다. 


전쟁 중 초소 체크포인트 찰리, 찰리가 누구지?


베를린 거리를 걸어가는 시간은 밤 10시가 넘었다. 사람도 많지 않아서 긴장하며 걸었다. 한국이라면 번화가 상가 근처에는 사람들이 북적거릴 텐데 베를린은 한가로웠다. 

한참을 걸어서 도착한 곳은 체크포인트 찰리(Der Checkpoint Charlie), 일명 미국 군인 초소(US Army Checkpont)다. 옛 동베를린과 서베를린 경계에 있던 연합군과 소련군의 검문소다. 이곳은 연합군 3군 중 미 육군이 관할했다. 찰리는 음성 기호의 C를 뜻하는 것으로 사람이름으로 여겨지지만 별다른 의미는 없다. 초소 앞에는 동독을 바라보는 미국군이 있고 뒤에는 서독을 바라보는 소련군 사진이 있다. 이 사람이 찰리인가 생각될만한 사진이다. 검문소 초소를 임시로 만들어 놓아 사진을 찍을 수 있다. 


서베를린에서 동베를린 및 동독으로 넘어가는 검문소는 여러 곳이 있었는데 체크포인트 찰리는 외국인이  통과할 수 있는 유일한 검문소였다. 1961년 10월 베를린 장벽 건설 후 2개월이 지난 후에 미국군과 소련군이 이곳에서 17시간 대치하는 일이 벌어졌다. 또 다른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오페라를 보러 동베를린을 가려는 미국 외교관에게 동독 측에서 여권을 제시하라고 요구하자 미군이 동베를린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다. 미국은 외교관을 엄호한다는 목적하에 군경을 파견했고 전차 10대를 배치했다. 소련군도 전차 33대를 출동시켰다. 중동부 유럽에서 미군의 재래식 무기는 소련에 비해 역량이 떨어졌기 때문에 물러설 수 없었고, 소련은 서기장 흐루쇼프의 국내정치적으로 중대한 위기라고 여겨 순순히 물러설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막후 협상 끝에 서로 눈치를 보며 서서히 철수하게 되었다. 


이 초소는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함께 검문소로 기능을 상실했다. 1990년 독일이 통일되어 그대로 베를린 연합군 박물관에 보내졌다. 지금 있는 건물은 레플리카(모조품)이다. 바로 앞에 체크포인트 찰리 박물관도 있다. 늦은 밤이라 박물관은 찾아보지 못했다. 


숙소로 돌아온 시간은 11시가 넘은 시각으로 꽤 늦어졌다. 늦은 밤 베를린을 돌아다니는 것은 위험하지 않았다. 거리는 한산하고 조용했다. 지하철 사진도 찍고 지하철 승차권 구매 기계도 살펴보았다. 승차권을 직접 구매하지는 않았지만 어려워 보이지는 않았다. 

독일여행에서 지하철을 빼놓고는 할 수 없으니 자주 보게 된다. 시내 중심가에 위치한 지하철은 크고 웅장했다. 술에 취해 횡설수설한 사람도 보였다. 늦은 시각 귀가하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 어떤 지하철은 칸 간에 이동이 안되기도 하는데 이번 지하철은 이동이 가능해서 옆칸에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서울지하철과 달리 독일 지하철은 여섯명이 마주앉은 좌석이다. 사람이 많을 때는 비좁아보이고 칸 간에 이동이 어렵다. 우리나라처럼 노약자 임산부 좌석도 있다. 약자 우선 좌석이 있는 것이 신기하다. 경로우대석은 한국에만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착각이었다. 

독일에서는 기차와 지하철만 잘 타고 다니면 어디든 갈 수 있다. 버스나 트램과 연결도 매우 잘 되어 있다. 독일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얼마를 더 지낸다면 곧 동화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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