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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인영 Feb 05. 2024

드디어 출발이다

여행 버킷 리스트 중 마지막 행선지가 바로 남아메리카다. 이후 여행은 모두 보너스라 해도 좋을 것이다. 멀기도 하지만, 주변에서 고생이 심하다고 하여 계속 미루던 여행이었다. 하지만 점점 떨어지는 체력으로 인해 올해가 아니면 영영 못 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래서 연말이 지나기 전 일정을 잡았다. 5개국, 약 한 달간 여행이다. 그중 볼리비아 입국이 가장 까다로웠다. 비자를 내기 위해 새로 여권 사진을 찍고, ‘예금잔고증명서(영문)’를 뗐다. ‘코로나 예방접종증명서(영문)’도 넉넉하게 네 장이나 출력했다. 

때맞춰 여권을 새로 발급받았다. 구여권 내 사진이 붙은 자리에 어느 나라인지 모를 출입국 도장이 조그맣게 찍혀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한 국가에서라도 입국에 차질을 빚으면, 전체 일정이 엉크러질 것을 염려하여 미리 취한 조치다. 그 부작용으로 지난 6월 발급받았던 미국 ESTA(전자 여행허가증)가 무효가 되어 이 역시 새로 절차를 밟았다. 비행기가 LA 공항을 경유할 뿐인데도 ESTA가 필요하다니 서슬 퍼런 미국의 위세를 새삼 실감한다. (대문사진: 브라질 밀림)



페루 피삭에서 

남미는 지금 여름이다. 그러나 남극 못 미쳐 대륙의 끝단까지 찾아가기에 사철 옷을 모두 챙겼다. 상비약과 함께 내과에서 고산증 약을 처방받았다. 그런데 그 약이 비아그라네! 약효도 불확실한 차제, 한 알에 1만 5,000원이나 한다. 그래서 복제품을 샀다. 그 외 세면도구, 선글라스, 자외선 차단제, 모자, 양산 겸 우산, 토시, 그리고 손목시계를 챙겼다. 이제 출발만 남았다.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는 파나마 운하를 기준으로 가름한다. 그중 대륙 대부분 남반구에 위치한 남아메리카는 왼편에 태평양, 오른편에 대서양, 그리고 남쪽으로 남극해와 접했다. 14개국, 인구 약 4억 3천만 명이 모여 산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곳에 관한 나의 관심은 1453년 오스만 튀르크 제국이 콘스탄티노플 점령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동로마, 즉 비잔틴 제국이 멸망하고 지중해 제해권이 오스만으로 넘어갔다. 무역에서 비용 부담이 늘어난 서유럽에서는 금보다 비싼 향신료 가격이 천정부지로 상승했다. 특히 서유럽을 지나 육로로 동방까지 관통해야 했던 이베리아반도에서는 죽기로써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만 했다. 

 

1498년 5월 바르톨로메우 디아스가 도착했던 남인도 케랄라주에서 바라본 아라비아해

궁하면 통하는 법이다(窮則通). 생각을 바꾸자 길이 보였다. 뱃길이다. 포르투갈이 먼저 '바다가 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행동으로 옮겼다. 토양마저 척박하여 상업에 전적으로 의존했던 그들이기에 마른 목을 축이기 위해 먼저 샘을 판 셈이다. 조선보다 적어도 300년 앞선 발상이다. 우리 조상은 부산 앞바다에서 발발 동동 구르며 중국만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막상 결심이 서자 포르투갈은 오히려 대서양을 거쳐 중국과 인도로 가는 항로에서 가장 유리한 국가로 떠올랐다. 1488년, 바르톨로메우 디아스가 16개월 17일의 항해 끝에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의 조언을 받은 바스쿠 다가마가 인도 항로를 개척했다. 무역에 소요되는 비용이 육로에 비해 1/3로 줄었다. 

콜럼버스의 네 차례 항해 경로(출처; 위키백과)

뒤이어 에스파냐(스페인)가 경쟁적으로 뛰어들었다. 1492년 이탈리아 제노바 출신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항해를 지원했다. 콜럼버스는 카리브해를 중심으로 모두 네 차례 항해를 시도했다. 그중 3차 항해 때 남미 대륙 북단 트리니다드 토바고와 ‘에덴동산의 관문’이라고 착각했던 오리노코강 하구를 발견했다. 이로써 ‘대항해 시대’가 열렸다. 대항해 시대라? 웅비하는 라틴인의 진취적인 기상을 나타내는 멋진 표현이다. 그런데 그 실체도 그랬을까?


"이 세계의 창조자이시고 통치자이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하나니… 그의 대리자이신 성 베드로와 그의 영적인 후계자이신 교황, … 그리고 그 교황으로부터 전 세계의 통치권을 위임받으신 스페인의 가톨릭 왕에게 이 새로운 당과 바다가 주어졌도다. 너희들은 겸허히 주 하나님과 교황, 그리고 가톨릭 왕의 통치를 받아들일 것이며 복종할 지어다. … 만약 그리하지 않고 저항할 때 너희들에게 일어나는 죽음 혹은 상처들은 전적으로 너희들의 잘못이지 우리 주군과 나, 그리고 나와 함께한 신사들 때문이 아니다." (NAVER 지식백과, <뜻밖의 세계사>의 '신대륙에 상륙한 각국의 행보는?' 편에서 참조)


스페인 세비야 대성당 내 콜럼버스 관

콜럼버스가 1492년 10월 12일 현재 바하마 군도에 도착하여 비장하게 선포한 말이다. 자신을 후원한 스페인 공동 통치자 이사벨 여왕과 남편 페르디난트의 깃발을 꽂고 원주민들 앞에서 미리 준비해 간 공식 문서를 펼쳐 읽었다. 하지만 외국어였기에 그들은 무슨 뜻인지 몰라 어리둥절했을 이 상황을 희극이라고 해야 하나, 비극이라고 해야 하나? 분명한 점은 항해의 목적이 오직 두 가지, 가톨릭 전파와 국부 창출이라는 사실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말이다.

그러나 스페인 정부는 재정이 빈약했기에 소위 민간 용역을 맡겼다. 그래서 콜럼버스에게 ‘제독 작위, 발견한 땅을 다스리는 총독 지위, 얻은 총수익의 1/10’ 등의 조건을 약속해야만 했다. 이후 정복자이기도 한 다른 탐험대 선장들도 조건은 비슷했다. 따라서 일확천금과 출세에 눈이 뒤집힌 그들은 남미의 금과 은을 찾기 위해 대규모 살육과 고문 등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1521년에 아즈텍을 정복한 코르테스와 1533년에 잉카를 멸망시킨 피사로가 대표적이다. 

그곳엔 '신사'도, 종교적 구원도 그 흔적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한마디로 대항해의 민낯은 ‘약탈’과 '학살'이었다. 16세기 초 약 7천만 명이었던 원주민은 50년 만에 1/10로 줄었다. 제라드 다이아몬드는 그 원인을 <총, 균, 쇠>에서 찾았다. 그리고 중노동으로 죽어간 많은 원주민의 빈자리는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흑인 노예가 메꾸었다.


당시 유럽인이 상상하는 세계는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3개 대륙이 전부였다. 콜럼버스가 죽을 때까지 자기가 발견한 이곳을 인도인 줄 알았던 이유다. 따라서 유럽인은 오래전부터 고유문화를 지닌 원주민이 잘 살고 있었음에도 이곳을 ‘신대륙’이라 불렀다. 또 뜬금없이 ‘서인도제도’라 명명하며 진짜 (동) 인도와 구별 지었다. 여하튼 야만의 시대를 선도한 콜럼버스의 발견은 오늘날 미국을 비롯한 북, 남미 각국이 탄생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앞으로 소개할 칠레의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 내 '파이네 그란데' 원경

불행한 역사다. 스페인의 식민 지배는 300여 년간 이어지다가 19세기 초에 종료되었다. 지구상 육지 면적의 11.9%를 차지하는 남미 지역은 국토 면적이 상대적으로 작은 수리남조차 한반도의 3/4 정도 크기다. 오늘날 남미는 동일한 시간대에 네 계절이 존재하며, 풍요롭게 살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고루 갖췄다. 자원이 척박한 대한민국 입장에서 보면 부러울 정도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현실은 기대 이하다. 대다수의 국가가 심각한 빈부 격차, 정책 실패, 정치적 불안정 등으로 여전히 가난하다. 외세의 끊임없는 침입과 일제 식민지를 경험했던 한국인 입장에서는 연민의 정을 느낀다. 그러나 역사를 돌이킬 방법이 없다. 뿐만 아니라 백인과 원주민이,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이 섞여 누구를 향해 측은지심을 느껴야 할지 혼란스럽다. 칠레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민원정 교수가 "남미라고 하지 마세요! 이곳은 유럽입니다"라는 말이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볼리비아 라파스 시내

내게도 비행기를 열여섯 번 갈아타며 유명 관광지 중심으로 여행하면서 감히 남미인의 고통과 삶을 헤아려 보겠다는 허세는 없다. 그리고 잔혹했던 역사와 가난이 오늘날 그들의 행복과 반드시 연결되지 않는다. 그곳의 엘리트층은 여전히 유럽에서 건너 간 백인이 지배적이다. 따라서 감상적인 선입견은 금물이다. 

결정적으로 여행은 즐거워야 한다. 그래서 같은 공간에서 그들과 짧은 시간 함께 호흡하면서 사이사이 최소한의 역사적 배경을 언급하는 정도로 그치려 한다. 소박한 바람이 있다면, 기왕에 글을 읽는 사람이 남미를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약간의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들의 밝은 미래를 함께 기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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