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아끼던 모자가 사라졌다. 모자가 행방불명이라니, 그래서 그 자리에서 얼어붙다니 별 일이 다 생겼다. 겨울엔 붕어빵을 손에 쥐고 있어야 안심이 되듯이, 찬 바람 불 땐 핫초코 미떼가 아니라 즐겨 찾는 모자였는데 이게 발이라도 달렸는지 도망가고 여기
없다. 차가운 공기를 차단해 주던 고마운 모자가 떠나간 지 벌써 일주일이 넘었다. 웬만해선 물건을 잘 잃어버리질 않는데, 모자는 벌써 과거형이 되어 형상으로만 남아있다.
해마다 살갗을 에는 강추위가 찾아오면 어김없이 서랍장을 열어 윤기나는 검은색 패딩 모자를 찾아 손을 바삐 움직인다. 귀와 머리와 턱까지 감쌀 수 있는 모자를 쓰고 전신거울 앞에 서면 영락없는 장수처럼 보인다. 모자와 연결된 가장 최근의 기억은 내가 이 모자를 쓸 때마다 귀여워 죽겠다는 반짝이는 눈빛이다. 모자를 쓴 날은 누가 됐든 모자에 대해 한 마디씩 얹고, 나 또한 모자를 쓴 날에는 누군가 한 마디 해주지 않을까 내심 기대하며 어깨를 으쓱인다. 그를 만나기 한 시간 하고도 삼십 분 전이다. 헤어진 사이지만 그래도 기왕이면 예뻐 보이고 싶은 마음에 옷장 속을 파고든다. 고개를 내밀고 옷 사이를 뒤적거리며 적당히 추위를 막으면서 적당히 꾸민 티가 안나는 옷을 고른다. ‘이것도 아니야, 저것도 아니야.’ 하다가 포기할 무렵, 민트색 바탕에 꽃무늬 자수가 새겨진 스웨터가 눈에 띈다. 아크릴 소재로 되어있어서 보기보다 보온이 덜 되기에 기모 티셔츠를 갖춰 입고, 쫀쫀한 레깅스에 간신히 다리를 구겨 넣는다. 화장대 앞에 가만히 서서 최대한 낯빛이 밝아 보이게 선크림을 덧바르고, 양쪽 볼엔 생기를 추가하려 블러셔를 덧댄다. 오늘만을 기다려온 것처럼 들뜬 사람마냥 비칠 수 있으니 상기된 티가 나지 않도록 볼에 묻은 코랄빛을 손가락으로 쓱 밀어 덜어낸다. 국제도서전에서 책을 얼마 이상 구매하니 선물로 준 흰 양말 위에 파랑과 초록이 섞인 니트 양말을 신고, 모자 끈은 단단히 여민다. 몇 년 전 삿포로 여행 때 이거다 싶었던 방한부츠에 발을 쑥 집어넣는다. 생활방수가 되고 미끄럼 방지 기능도 탁월해서 어그보다 활용도가 높다. 어랏, 속절없이 흘러가는 분침을 보니 나가야 할 시간이다.
시작점부터 도착점까지 가는 짧은 거리를 최대한 효율적으로 건너갈 수 있는 방법을 터득했기에, 사람들의 움직임으로 신호의 흐름을 간파하여 내리막을 냅다 뛰어간다. 초록불이다. 좋았어! 또 우다다 뛴다. 횡단보도를 건너면 바로 옆 횡단보도에 초록불이 켜진다. 마침 운 좋게 버스정류장에 내가 타려는 버스가 도착해서 사뿐히 올라탄다. 행운의 여신이 나를 도왔는지 앉을 수 있는 좌석이 보여 냉큼 엉덩이를 붙인다. 버스 기사는 승객들을 위해 난방을 빵빵하게 틀어놓았나 보다. 아궁이에 불을 땐 듯이 철제 좌석로부터 뜨거운 열기가 올라온다. 불타는 고구마가 아니라 불타는 엉덩이가 구워지고 있다. 더군다나 히터로부터 뿜어 나오는 기운도 심상치 않아서 종아리를 타고 올라온 열감이 모자 안까지 뻗쳐서 머리에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한다. ‘아, 이거 위험한데. 땀에 절어 눌린 머리모양을 하고 ㅇㅇ을 만날 순 없어!’ 당장 모자를 벗는다. 두피 위로 땀방울이 증발했는지 그제야 시원함을 느낀다. 두피도 숨을 쉬는구나. 아끼는 모자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손에 꽉 쥐고 있다가 손을 움직이기 불편하여 찍찍이로 끈을 붙인 뒤 왼쪽 손목에 건다.
버스에서 내려 지하철로 환승하면 그에게로 닿는 지름길이다. 같이 살을 부비며 살던 이를 만나러 가는 날이라 그런지 새로운 버전의 두근거림이 요동친다. 지하철을 타러 가는 길에 계단이 어찌나 많던지, 평소라면 대수롭지 않게 터벅터벅 내려갔을 텐데 금방이라도 리본이 풀리듯 다리가 스르르 풀려버릴 것만 같다. 다행히 다리는 정신을 차리고 지하철 안으로 들어간다. 이게 무슨 일이야! 주말 오후에 타는 지하철인데 비어있는 자리가 많다. 오예, 땡잡았네 하며 털썩 앉는다. 지하철 역 열한 개만 가면 그에게 닿는다. 시선은 저 멀리 창 너머에 두다가 이내 바쁘다바빠 현대사회 교양인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휴대폰에 꽂힌다.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고 싶지도 않으면서, 손바닥 만한 화면 속에 빠져 연신 새로고침을 눌러댄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야? 어랏? 뭔가 허전하다. 왼쪽 손목을 내려다보니 모자가 온데간데없다. 순간 당황해서 얼굴이 빨개진다. 열이 발가락 끝부터 초스피드로 오르더니 손까지 떨린다. 주머니를 샅샅이 뒤지고 자리에서 일어나 요리조리 살핀다. 바닥에도 없고 옆자리로 밀리지도 않았다. 없다. 진짜 없다. 모자가 순간이동을 했나, 무슨 일이지? 황당하고 황망하고 어이없다. 어디서 떨어트렸을까? 아니, 도대체 언제 끈이 탁 풀린 걸까? 아니, 모자가 더 이상 나와 같이 생을 나누기가 버거워 탈출을 감행한 걸까? 그 사람처럼 모자도 탈피하는 건가? 별의별 상상을 하다 눈물이 툭 터진다. 곁을 내줬던 이도 잃어버린 마당에 내 머리에 온기를 지켜주던 모자까지 잃어서 상실이 겹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안전거리를 둬야 한다더니 모자를 향한 소유욕에 지쳐 저도 제 풀에 나가떨어진 걸까? 오늘따라 기분이 묘하더라니, 괜히 멍하더라니, 오늘은 모자와 헤어질 운명이었나? 허전한 손목만 바라본다. 한 사람을 잃어 상실의 세계에 발을 들인 후로 이곳을 서성인 지 꽤 됐는데, 열 번의 겨울을 같이 한 모자까지 사라지니 신이 내린 상징물이라는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 바람이 파고들지 못하도록 옷이며 신발이며 단단히 동여매다 정작 놓친 모자의 운명. 떠날 모자는 떠날 수밖에 없구나. 어차피 일어나야 할 일이었구나. 이 깨달음을 얻은 순간 귀에서 시골 어드메에 있는 유서 깊은 성당에서 들을 법한 성가가 울려 퍼진다. 이거구나, 상실의 기쁨. 상실을 겪어도 기쁠 수 있구나.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지는 내가 낯설어 흠칫 놀란다. 어쩔 수 없는 일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 받아들이고 나니 긴장이 탁 풀린다. 스르르 스르르르 스르르르르. 내 손을 떠난 일을 받아들인다. 내 손 안에 있던 모자는 최선을 다했기에 모자의 행복을 바랄 뿐이다. 그거면 충분하다.
들리는 에세이: 모자
가수: 아마도이자람밴드
노래: 행방불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