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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수장고

by 미아

내게는 30년 지기 친구들이 있다. 30년 지기라고 하니 나이가 자연스럽게 공개되는 거 같아 부끄럽지만 맞다 빈티지 가구만큼이나 오래된 친구들이다. 중학교 시절에 만나 서로의 흑역사는 물론이요 지금도 우리들의 무구한 역사는 계속 진행 중이다.


유년시절을 청주에서 보내고 타지로 대학을 갔다. 우리 넷은 각각 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저녁이면 홍대 신촌에서 자주 만나 오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친한 친구들의 공식처럼 만나서 딱히 하는 것은 없다. 얼굴 보고 저녁 먹고 커피 타임을 갖거나 네 명 중 누군가에게 슬픈 일이 생기면(남자친구와 싸웠다거나 시험을 망쳤다거나 기타 등등) 술을 마시면서 위로해 주는 것 그게 전부다. 그러다가 누군가가 진탕 술을 마셔서 토하면 오만상을 찌푸린 채 등을 말없이 두드려주기도 하고, 넷 다 시간이 제대로 맞을 때는 쇼핑도 하고 맛집 탐방이 추가된다. 친구들을 만나면 혼자 있어서 납작해졌던 마음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우리 모두가 졸업 후 회사를 다니기 시작하고 결혼할 남자친구가 생기면서 만남이 그전보다는 뜸해졌다. 그래도 이주일에 한 번은 꼭 만났다. 비슷비슷한 동네에 살고 있었고 오랫동안 만나지 않으면 혀에 가시가 돋는 거 같았다. 친구들의 안부가 궁금했다. 만나서 굶주린 사람들처럼 수다를 떨고 헤어져야 비로소 마음이 편안해졌다.


네 명 중 두 명은 여전히 서울에 살고, 한 명은 상해, 현재 나는 세종에 있다. 결혼 후 각자 다른 지역에 살면서 전보다 만나는 횟수는 현저하게 줄었지만 그만큼 통화를 자주 한다. 통화로 영양가 있는 말은 주고받지 않는다. 시시껄렁한 농담이나 남들이 들으면 하찮은 주제들을 갖고 심각하게 얘기하는 우리다. 하지만 얘기를 하다 보면 끝도 없다. 서로가 서로의 키링이다.


엄마랑 서울 병원에 가는 날, 친구들에게 말했다. 밥 먹을 시간이 정말 두 시간도 안된다고. 커피 마실 시간도 없다고. 그래도 병원으로 온다고 한다. 잠깐이라도 얼굴을 보자 말한다. 상해에 있는 친구 빼고(너무너무 아쉽다) 우리 셋은 정말 점심만 먹었다. 오랜만에 엄마의 모습을 본 친구들은 피부가 좋으시다며 에너지가 넘치신다며 엄마의 기분을 방방 뜨게 한다. 엄마는 모처럼 만난 우리들끼리 삼십 분이라도 편하게 있으라고 먼저 자리를 피하신다. 그때부터 오디오가 절대 비지 않는 막강 수다를 떨고 틈새 사진을 찍고 대환장 파티가 열린다. 커피 마실 시간도 없어 병원 로비에서 떠드는 주제에 뭐가 그리 재밌는지 모르겠다. 하도 웃어서 콧물이 나온다. 콧물을 닦으니 친구가 콧물을 꼭 그렇게밖에 못 닦겠냐며 옆에서 잔소리를 한다. 잔소리를 듣는데도 기분이 좋다. 생기도 없이 희미해져 있던 내가 친구들을 만나면 원래의 내가 되는 기분이다. 마흔 넘은 우리가 십대의 철없던 시절로 순간 이동한다.


친구들은 내 기억의 수장고나 다름없다. 만나면 과거 현재 미래의 나와 우리가 보인다. 귀중하고 소중한 것들을 모아놓은 창고 앞에서 우리가 만나는 순간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난다. 수장고가 개방되면서 그 안에 있던 작고 귀여운 것들이 와르르 쏟아져 나온다. 이제는 개방일이 자주 오는 게 아니어서 헤어질 때는 아쉽고 아쉬운 마음에 자꾸만 손짓을 하며 뒤를 돌아본다. 그래도 우리는 또 만날 거니까 아무렇지 않게 각자의 외투를 어깨에 툭 걸치고 발걸음을 옮긴다. 인생을 외투처럼 걸친 채 그렇게 서로의 일상으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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