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글맘의 하루
딸을 키워서 그런가 아이를 볼 때마다 어린 나와 겹쳐 보일 때가 많다. 누군가 내 머릿속을 영화로 촬영한다면 딸의 모습과 내 어린 시절의 모습을 왔다 갔다 겹쳤으리라.
아침에 출근 준비를 마치고 자고 있는 딸을 보면 드라이기 소리와 ott 소리, 살짝 열어놓은 베란다 사이로 훅 들어오는 차가운 바람들이 잠을 깨우기에도 충분하지만 꿋꿋이 잠을 자고 있는 모습을 보일 때가 있다. 엄마가 곧 나에게 올 거라는 확신, 엄마가 옷을 입혀주며 나를 안아줄 거라는 마음으로 당당하게 누워있다. 스킨십을 좋아하는 딸은 영락없는 애착형이다. 그 모습 위로 과거의 내가 보인다. 엄마의 “제발 일어나라고! 늦었다고!” 짜증 섞인 소리에도 꿋꿋이 눈을 감고 엄마가 내 옷을 입혀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어린 내가 있다. 나의 엄마는 감정표현이 폭발형이다. 지금은 살아가는 삶이 많이 힘들었나 보다. 비빌 곳이 없었구나. 싶지만 어릴 때의 나는 내가 엄마의 주된 스트레스의 원인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엄마는 나에게 자주 화를 냈고 몰아세웠다. 그런 말들을 들으면서도 엄마가 내 몸을 터치하는 순간들이 좋았다. 나의 딸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볼에 뽀뽀를 하며 어린 나에게도 치유의 손길을 내민다.
유치원 시절에만 볼 수 있는 모습이 있을터. 아이는 시도 때도 없이 내 앞에서 공연을 한다. 하루에도 “엄마 나 봐봐!” 소리만 10번은 넘게 듣는다. 아이는 나에게 윙크를 하고 뒤를 돌아 엉덩이 춤을 춘다. 그런 아이의 모습 위로 티비 보는 나의 엄마 아빠 앞에 서서 티비를 막은 채 유치원에서 배운 율동을 열심히 뽐내고 있는 나를 본다. 내 솜씨를 보고 사랑스럽다는 듯 웃는 아빠의 얼굴이 좋았다. 부모를 기쁘게 해주고 싶은 마음을 가진 채, 지금은 나의 딸이 내 앞에서 춤을 춘다. 시간이 흘러도 이 마음은 자녀를 통해 흘러간다.
늘 내 생필품을 사주면서 기쁘게 사주는 엄마를 만나지 못했다. 나의 엄마는, 꼭 볼멘소리를 한 마디씩 하며 무언가를 사줬다. “나는 옷도 만원, 이만 원짜리 사 입는데, 너는 내가 불쌍하지도 않냐?” 엄마한테 미안하지도 않느냐는 말을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내 살아있는 존재 자체가 엄마에게 민폐는 아닌가. 그렇게 매일 조금씩 ‘나쁜 말’에 중독되어 나의 자존감은 깎여가던 때가 있다. 나는 그런 소리 자식에게 하고 싶지도 않다. 지나친 희생은 독이다. 빨래를 개던 중, 어렸을 때 엄마의 속옷에서 봤던 해진 구멍이 내 속옷에서도 생긴 것을 봤다. 가차 없이 속옷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어린 나는 엄마가 스스로를 불쌍한 위치에 두는 것이 싫었다. 나의 자랑스러운 부모는 누구보다 행복하길 바랐다. 자식은 그렇다. 나 역시 일거수일투족 일상을 공유하는 딸의 눈에 불쌍한 엄마가 되고 싶지 않다. 어떤 능력보다 자식이 없어도, 스스로 행복할 수 있는 ‘능력’과 자질을 갖추고 싶다. 나의 엄마가 불행할까 봐 그것이 마치 내 탓일까 봐 불안한 어린 나를 위해 이젠 괜찮다고 토닥이며 속옷이 버려진 쓰레기통을 바라본다.
자기애가 강하고 갑자기 돌변하듯 분노를 쏟아내며 자식을 희생양 삼아 폭언을 쏟아내던 엄마를 보며 엄마를 힘들게 한다는 죄책감을 가진 어린아이가 있다. ‘이젠 괜찮다고, 너의 존재 자체가 사랑스럽고 이 세상에 참 잘 태어났다고’ 말해줄 부모가 없었다. 숱한 가정폭력의 아픔 속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였던 어린아이는 이제 엄마가 되어 사랑스러운 딸을 키우고 있다. 지난날의 나의 엄마가 혼자 생계를 책임지며 참 애썼겠다는 마음도 들지만 그 누구보다 어린 나를 좀 더 위로해주고 싶다. 딸과 지내다 보면 문득문득 기억 속에 존재하는 어린 내가 시공간을 초월하여 다시 내 앞에 나타난다. 예전에는 있는지도 모르게 억눌러져 지하에 혼자 살고 있는 듯했던 아이가 이제는 자주 나타난다. ‘너를 용서해.’ 나를 용서하고 수용하는 마음으로 바라본다. 내 안의 내면아이가 마음껏 숨을 쉬고 나에게 기대어 비빌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