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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민 Aug 07. 2023

털 없는 원숭이와 삶의 목표

삶의 목표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지?

황당한 일이다.

삶에 있어서 늘 의미와 목표를 찾는 우리지만 정작 우리 삶이 어떤 의미나 목표를 갖고 시작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아무리 노력해도 있지도 않은 소명이나 절대적인 삶의 목표를 발견할 수 없다.

그저 두 생물이 상호작용한 결과, 그것만이 우리의 탄생이란 결과의 원인이다.

더 큰 세포 덩어리가 되고 싶다는 생식 세포들의 단순하고도 절박한 소망만이 삶의 시작을 장식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 마음속 가장 깊숙한 곳에 여전히 남아있는 우리의 탄생을 이끌어낸 그 작고도 강렬한 소망을 따라서 사는 것은 어떨까?

수많은 세포 덩어리가 된 우리는 이미 이 모든 것이 시작하던 순간 가장 소망하던 모습이 되었다.

원하던 모습이 되었으니 이제는 소망을 확장시켜 나갈 차례다.

다음으로 우리가 할 일은 소망했던 삶을 최선을 다해 만끽하는 것이다.

삶을 만끽하기 위해서는 복잡할 것 없이 그저 잘 살아가면 된다.

잘 먹고 잘 자고 잘 어울려서 잘 살면 된다.

하지만 잘 살아간다는 목표가 단순하기 때문에 우습게 보면 안 된다.

잘 먹고, 잘 자고, 잘 어울리는 일은 사실 매우 어렵다.

우리에겐 단순하고도 익숙한 일이 사실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알아보고자 한다면 똑같은 일을 기계로 실현시킬 때 무엇이 필요한지를 상상해 보면 된다.

인간이 꿈꾸는 많은 것을 과학 기술로 실현할 수 있게 된 지금이지만 잘 먹고, 잘 자고, 잘 어울리는 방법을 이해하고 이를 실천할 AI, 로봇을 창조해 낼 수준은 한참 멀었다.

그런데도 자연의 신비함일까?

우리는 그럭저럭 잘 해낸다.

우리 안에 있는 생존 본능은 아주 복잡하게 작용하며 우리를 자연스럽게 더 좋은 삶으로 이끈다.

대신에 좀 까다로운 일이 생겨버렸다.

부작용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냐는 매우 까다로운 질문에 시달리게 되었다.

생존 본능의 영향을 받은 뇌는 우리가 그럭저럭 잘 살도록 특정 행동을 유도하는 감정이란 신호를 쏴준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응하라는 뇌의 신호는 불안함이라는 형태로 전달되고 생존 자원 확보 행동을 더 하라는 뇌의 신호는 행복이라는 형태로 전달된다.

이 두 신호가 시도 때도 없이 우리를 괴롭히기 때문에 우리는 매번 이 요구에 만족할 만한 답을 내놓아야 한다.

그래서 미래에 대응하기 위해 하루하루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그 와중에 행복하기 위해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고민한다.

고민을 반복하며 이 모든 고민을 해결할 수 있는 하나의 답이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게 미래와 행복에 대한 고민은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답을 찾는 과정이 된다.


이렇게 우리 대부분은 삶의 목표를 찾으며 살게 된다.

사람마다 기질과 살아온 환경이 모두 다르기에 각자 다른 삶의 목표를 가질 것만 같지만 사실 그렇지도 않다.

고민을 할 기간이 짧아서 인지 아니면 타인에게 쉽게 영향을 받아서인지, 혹은 대부분이 불안이나 행복을 느끼는 상황이 비슷해서 인지 우리는 생각보다 비슷한 삶의 목표를 추구한다.

성공, 평범함, 행복, 특정 철학의 가르침 등을 삶의 목표로 설정하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이 그중 하나를 삶 전체를 관통할 가장 우월한 목표로 삼고 추구한다.

하지만 각각의 가치는 사실 모두 우리 삶에서 각자만의 역할이 있기에 우월함을 따져서 한 가지만 추구하고 다른 것을 버리는 것은 최선의 답이 될 수 없다.

살면서 한 가지 가치만을 추구하면 다른 가치의 공백을 느낄 수밖에 없고 이 때문에 기존의 삶의 목표를 후회하고 부정하며 새로운 목표를 찾게 될 가능성이 크다.

결국에는 실패를 통해 기존의 삶의 목표를 부정하고 새로운 목표를 추구하는 일을 반복하는 오답의 굴레에 빠지게 된다.


누군가는 이러한 굴레에 지쳐 더 이상 삶에 있어서 가장 우월한 가치를 찾지 않고 어떤 미래가 와도 변하지 않아서 삶의 이정표가 될 수 있는 것을 찾는다.

즉 진리가 있다는 생각까지 도달한다.

아주 옛날의 현자가 제시한 이 생각은 여전히 강력하다.

하지만 가장 우월한 가치와 진리 모두, 어떤 미래가 와도 우리를 평안하고 행복하게 만들어줄 하나의 답이 있다는 비합리적인 생각에서 나온 것은 마찬가지이다.

인간이 진리나 절대적인 답을 상상하게 된 과정을 과학적으로 접근해 보면 진리가 비합리적인 인간의 상상에 불과하기에 우리가 도달할 있는 무언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낼 수 있다.

과거 우리는 우리 생각의 주체인 '자유 의지'가 어떠한 영향을 받지 않은 순도 높은 생각을 해낼 수 있고 때문에 더 나아가 시간을 포함한 세상 모든 요소에 영향을 받지 않는 가장 순수한 본질인 진리까지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또 이러한 가장 순수하고도 상위의 존재인 의지는 우리 생각을 조종하고 신체를 조종하는 존재로 여겨졌다.

하지만 현대 심리학 연구는 우리 의지가 우리 몸과 생각을 조절하는 상위 체계 존재도 아니고 심지어 다른 상위 체계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순수하고 이성적인 생각을 해내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실제로 의지가 하는 생각이란 의지 자신의 요구와 의도에서 시작되었다기보다는 뇌의 요구에 맞춰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행동이 이루어지는 데 있어서 의지가 가장 처음에 명령을 만들고 하달할 것이라는 편견과 달리 실제로 의지는 별도의 의사결정자에게 행동 명령을 전달받고 그 명령과 일치하게 실제 행동이 이루어졌는지를 확인하며 피드백을 주는 완전히 다른 역할을 한다.

또 가끔은 감정과 같은 뇌가 주는 다양한 신호를 받고 그 신호에 담긴 요구사항에 알맞은 대응을 찾고자 시뮬레이션을 하는 역할도 한다.

심지어 의지는 자신에게 내려진 명령의 의도를 완벽히 파악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의지는 가끔 좋은 피드백을 주고자 뇌의 의도를 추측해보곤 한다.

뇌의 본래 의도와 상관없이 의지가 접근할 수 있는 기억을 활용해서 그럴듯한 추측을 한다.

예를 들어 뇌가 사람이란 보상을 원해서 외로움이란 신호를 보냈지만 의지는 그 헛헛함을 해석할 때 점심 식사가 부족했단 사실을 떠올리며 저녁에 더 많은 음식을 섭취할 것을 다짐한다.

뇌가 내린 명령에 더 좋은 답을 찾고자 하는 의지의 불완전한 추측은 가끔 좋은 답으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완전히 엉뚱한 답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러한 의지는 또 한 번 불완전한 추측을 하고 엉뚱한 답을 낸다.

뇌에서 오는 큰 크기의 불안과 행복에 대한 요구를 보다 잘 만족시켜 주기 위해서 그러한 요구를 평생 만족시킬 완벽한 하나의 답이 있다는 추측을 하는 것이다.

에너지 절약, 통제감에 대한 필요, 사회적인 유용성 등 다양한 내외부적 압박이 의지의 추측에 뒤엉킨 결과, 가장 우월한 하나의 삶의 목표가 있다는 착각이 만들어진다.

가장 우월한 하나의 삶의 목표는 이런 식으로 불완전한 의지가 만들어낸 하나의 상상에 불과할 가능성이 높다.




다시 돌아와 진리와 같은 가장 우월한 하나의 목표라는 것은 없다.

그렇다면 어떤 삶의 목표를 찾아야 할까?

한 가지 가장 우월한 목표를 찾는 것에서 벗어나서 삶의 목표를 다시 정의해야 한다.

인간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이냐는 머리 아픈 토론에서 벗어나 우리 모두가 왜 삶의 목표를 갖는지, 그 용도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그러면 맨 처음 얘기로 돌아가게 된다.

우리는 잘 살라는 뇌의 생존 명령을 따르기 위해서 삶의 목표를 만든다.

따라서 알맞은 삶의 목표는 뇌의 불안해소 신호와 행복추구 신호를 적절하게 만족시켜 줄 수 있어야 한다.

뇌의 요구를 알맞게 들어준다면 시끄러운 뇌의 신호가 잠잠해져서 잘 살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고 생존과 관련된 요구를 현명하게 만족시키고자 노력했기에 실제로도 잘 살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답을 알아냈다고 해도 삶의 목표에 관한 지금까지의 관성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수 있다.

이러한 관성에서 벗어날 논리를 만들고 생존 본능의 해소라는 새로운 삶의 목표를 만들고자 최선의 지식인 과학을 활용할 수 있다.

현명하게 과학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어떤 연구 대상이던 다양한 측면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다양한 연구 결과들을 복합적으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한 가지 사실에만 매몰되면 다양한 측면을 가진 인간의 삶을 이해하기 어렵다.

또 나중에 다양한 방향으로 발전하거나 해석될 가능성이 있는 하나의 연구 결과에 지나치게 몰입하게 된다면 자신의 가능성을 제한할 수도 있기에 모든 과학 지식을 접할 때는 비판적으로 수용할 필요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미래를 예측하고 삶의 목표와 계획을 만들고자 하고 있기 때문에 언제까지나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대응을 늦출 수는 없다.

다양한 변수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두면서도 최대한 바뀌지 않을 한 가지를 정해서 삶의 목표와 계획을 만들 기준으로 설정할 필요가 있다.

의식적으로 조절되지 않으며 오랜 기간 아주 강력한 영향을 준 생존 본능이 그러한 기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생존 본능 역시 환경에 따라 다양하게 발현될 수 있다고 가능성을 열어두긴 하지만 앞으로 살아갈 삶 속에서 아주 큰 변화를 겪진 않을 것으로 가정한다면 과학적인 지식을 활용하면서도 빠르게 삶의 목표를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생존 본능과 뇌의 요구를 따라 삶의 목표를 만들고자 한다면 삶의 목표에 영향을 주는 다양한 차원의 생존 본능을 이해해야 한다.

다양한 생존 상황을 가정하고 이겨내고자 하는 생존 본능 때문에 삶의 목표는 한 가지 차원만 단순하게 다뤄서는 안 된다

생존에 필요한 자원은 다양하며 자원을 얻기 위해 고려해야 할 것도 다 다르다.

그래서 자원을 성질에 따라 나누고 또 각 자원 추구가 상호 보완할 수 있도록 삶의 목표를 세 가지 측면으로 나누었다.

뇌의 여러 요구를 들어줘서 잘 산다는 느낌을 받고 동시에 삶을 향한 합리적인 선택을 하기 위해서는 불안, 행복, 인간관계 세 가지 측면의 삶의 목표를 세우고 실천해야 한다.

우선 어떤 목표를 설정하든 간에 불안, 행복 등을 느끼거나 반응하는 방식이 사람마다 다르기에 먼저 자기 자신을 파악하고 이를 목표에 반영해야 한다.

그리고 장기목표보다는 단기 목표를 추구하도록 한다.

세상과 자신의 변덕스러움이 언제든 장기적인 삶의 목표를 부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단기 목표를 이뤄가는 시점에 세상과 나의 변화를 반영해서 다음으로 추구할 단기 목표를 설정하는 것이 좋다.

마지막으로 그럼에도 세상의 변덕스러움 때문에 예상치 못한 일을 경험할 수 있기에 필연적인 불확실성을 이해하고 수용하며 살아갈 필요가 있다.


세 가지 삶의 목표 중 첫 번째는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삶의 목표이다.

불안은 완전히 통제할 수는 없는 세상과 미래에 대한 합리적인 두려움이다.

미래에도 잘 살 수 있게 준비하라는 생존 본능의 경고는 그 요구를 충분히 만족시켜 주고자 행동하면 사라진다.

지금까지는 보통 우리가 한 행동을 통해 예측할 수 없는 미래의 변수가 통제될 것이라는 믿음인 미신을 형성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며 불안을 해소해 왔다.

하지만 아주 먼 미래까지 내다보는 삶 전체에 대한 불안은 필연적인 실패와 좌절 때문에 기존의 믿음이나 미신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삶 전체에 대한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어중간한 미신이나 지식이 아니다.

끝나지 않는 시달림에서 벗어날 답과 믿음을 찾기 위해서는 불안을 더 깊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불안이 과도한 상태이며 때문에 그것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는 명확한 근거가 필요하며 의지나 본능이 불안이 해소되었다고 느끼는데 필요한 과정을 알고 그것을 활용해 불안을 해소할 방법을 발전시켜야 한다.

불안에 대한 이해를 토대로 근거 있는 답과 행동 양식이 만들어진다면 다시 행동과 믿음을 통해 삶 전체를 감싼 불안을 해소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 방법으로 두 가지가 있다.

불안은 미래에도 우리가 잘 살길 바라는 생존 본능에서 왔기에 생존 자원을 확보하면서 불안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생존 자원 확보를 위한 구체적인 목표와 계획을 만들고 실천하는 것이 불안이란 감정도 해소하고 살면서 필요한 자원도 확보할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또 다른 방법은 결과에 과도하게 집착하지 않으며 자신의 삶을 주도적인 선택과 선택을 실현시킬 노력으로 채워 나가는 것이다.

생존 본능의 요구에 맞춰 미래를 예측하고 계획을 만드는 의지는 예측과 실제 결과가 같아서 계획대로 삶이 통제되었을 때, 불안을 해소해도 좋다고 판단한다.

하지만 예측하지 못한 다양한 변수 때문에 삶이 완벽히 통제될 가능성은 낮기에 통제되지 않는 결과에도 좌절하지 않을 낙관성이 필요하고 또 결과뿐만이 아니라 선택과 과정의 가치에 더 집중할 필요가 있다.

자신만의 선택과 그것을 실행하는 과정이 꼭 원했던 결과로 이어지지 않아도 우리는 그 과정을 통해 삶을 자신이 원하는 바로 채웠다는 만족감과 삶에 대한 통제감을 느낄 수 있다.

이런 근거와 믿음으로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의지의 불안 해소 여부 결정을 도와주기 때문에 또 다른 불안 해소 방법이 될 수 있다.

생존 자원을 확보하고 자신만의 삶을 살기 위해 구체적인 단기 목표를 만들고 실천하는 일을 반복하자. 

이 과정을 지탱하는 믿음과 그 사이의 몰입으로 삶은 발전하고 불안함은 해소될 수 있다.


두 번째는 행복을 추구하기 위한 본능의 삶의 목표이다.

불안을 이겨내는 안정감, 통제감 외에도 추구할 것이 있다.

뇌는 행복도 추구하도록 명령한다.

하지만 행복이란 감정은 다채롭기 때문에 행복 추구하는 과정은 매우 까다롭다.

또 복잡한 현대사회에서 행복을 추구하고자 하는 행동은 의도치 않은 다양한 결과로도 이어질 수 있다.

그래서 행복 즉 쾌를 주는 자극은 적절히 통제하며 추구해야 한다.

또 한편으로는 너무 많은 자극 사이에서 권태로워지지 않기 위해서 나에게 행복을 주는 자극을 더 다채롭고 장기적으로 경험할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좋아하는 것에 대한 전문성을 발전시키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쾌 자극을 추구하는 시기, 주변 환경, 적절한 빈도 및 크기, 얻기 위한 전략, 다채롭게 경험할 방법 등을 고려하며 복잡한 현대 사회에서 뇌의 행복 추구 요구를 현명하게 들어주기 위한 목표와 계획을 만들자.     


세 번째는 인간관계의 삶의 목표이다.

행복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요소이자, 삶의 질을 크게 낮추는 외로움의 원인인 타인은 우리 삶에 가장 중요한 자원 중 하나이다.

소중한 사람을 만들어 간다는 것은 곧 내가 살아갈 의미를 하나 더 만들어가는 것과 같다.

한편 반대로 누군가에게 내가 소중한 사람이 된다면 그 사람의 지지를 통해 어려운 상황도 이겨나갈 수 있다.

즉 같이 살아갈 소중한 인간관계를 만드는 것은 삶의 목표인 '잘 살아간다'를 이룰 수 있는 바람직하고 강력한 방법이다.

좋은 인간관계를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타인과 교류할 때 나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어야만 한다.

타인과 교류할 때 솔직하지 못한 모습으로 연기를 하게 되면 교류를 통해 느껴지는 행복이나 쌓이는 신뢰보다 피곤함을 더 크게 경험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그때의 교류 경험은 부정적인 경험이 되며 더 이상 관계를 발전시키기 어렵게 된다.

자신을 사랑하고 타인을 믿어 상호 신뢰를 쌓아갈 수 있는 솔직한 관계를 만들어나가면 소중한 사람 만들기라는 삶의 목표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정체를 명확히 파악할 수 없는 존재에게서 불편한 감정을 더 크게 느낀다.

가슴 한편을 답답하게 만드는 삶의 목표라는 놈을 극복해 내려면 우선 그놈이 무엇인지 알아야 했다.

삶의 목표란 무엇일까?

무언가가 왜 존재하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그 용도부터 파악하는 것이 용이하다.

인간이 왜 삶의 목표를 만들었는가?

그리고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인간이란 동물을 보다 담백하게 볼 수 있어야 한다.

복잡한 인지 처리 과정의 결과라고 생각했던 삶의 목표는 사실 더 나은 삶을 살고자 뇌가 하는 잔소리의 결과였다.

결국 그 시작은 생존 자원 획득을 위한 불안과 행복이란 감정이다.

적절한 삶의 목표란 뇌가 걸어온 잔소리를 적절하게 들어주고 뇌에게 내가 잘하고 있으니 이제는 더 이상 감정을 주지 않아도 된다고 설득하는 과정이다.


털이 좀 없어진 영장류라고 해서 우쭐해진 우리는 가끔 거대하면서도 모호한 상상을 하기도 한다.

무한한 가능성, 신, 진리

그 상상은 아주 드물게 놀라운 규모의 협력, 성과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은 엄청난 상상을 좇아가다가 실패를 경험하고 자신이 그 대단한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인생의 조연 혹은 엑스트라가 되었다며 좌절한다.

하지만 당연히 실재하지 않은 상상을 좇기에 실패는 필연적이다.

누군가가 명확한 길을 제시하는 것도 아니다.

삶의 목표로서 진리를 얘기하는 사람 중에서 그 진리로 향하는 명확한 길을 제시하는 사람은 없다.

근거도 희박하고 좇는 것도 어렵기에 삶의 목표에 무한한 가능성을 첨가하는 일은 한마디로 좌절로 가는 지름길일지도 모른다.

대단하지만 그 실체를 알지도 못해 불안해하고 또 이루지 못해 좌절할 것이라면 차라리 속 시원하게 그 환상을 걷어내는 게 맞다.

가장 우월한 단 하나의 삶의 목표는 없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고민은 그냥 삶에 도움이 되고자 울리는 각종 신호에 대한 반응이다.

털이 좀 없어졌다고 허세 부리는 일을 멈추면, 특별함이라는 공허한 자부심이 없어지는 대신 혼란과 자기비판이 해소되는 큰 위로가 올 것이다.

비로소 담백하게 나에게 맞는 적절한 목표를 세워 살아나갈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답에 도달하기 위한 기나긴 과정을 지나왔기 때문에 더욱 자신 있게 나만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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