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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민 Aug 04. 2023

진리 없는 삶의 목표 1. 불안해소

미래의 불안을 없앨 오늘 하루를 계획하기

나는 잘 살고 있을까?

문득 이러한 의문이 생길 때가 있다.

그러면 우리는 마치 영화 트루먼 쇼의 주인공 트루먼이나 매트릭스의 주인공 토머스 앤더슨처럼 나의 삶과 일상에 대한 어색함과 불편함을 느끼기 시작한다.

“무언가 잘 못 되어가고 있어!”

트루먼의 무대 밖 세상이나 앤더슨의 매트릭스 밖 세상과 같은 무언가 나만의 진짜 삶이 있을 것만 같다.

이토록 절실한 불안 때문에 우리는 다른 삶의 방식 혹은 목표를 고민하게 된다.

혹은 널리 알려진 어느 한 노인의 후회가 우리에게 영향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기독교 지식이 매우 짧은 나조차도 엄청난 지혜를 갖고 모든 것을 누린 왕이 최후의 순간에 자신의 삶을 후회했다는 일화를 알고 있다.

누구보다 많은 성취를 하고 누구보다 현명했던 자 역시도 삶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는 일화는 삶의 목표, 의미라는 게 보통의 노력으로는 다가갈 수 없다는 교훈을 준다.

그 왕에 비해 잘난 바가 없는 우리라면 정말 피나도록 노력해야 죽음의 순간에 자신의 삶 전체를 공허에 비유하는 끔찍한 선례를 따라가지 않을 것이다.

나 역시 한 인생의 선배가 자신의 삶을 자조하는 모습을 보며 삶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

번듯한 직장과 가정, 일반적인 삶의 성취를 모두 이룬 것 같은 그녀는 자신의 삶을 자조했다.

그 자조에서는 50년의 세월이 만들어온 보람과 의미보다, 이 모든 과정이 끝을 향해 가고 있다는 두려움만이 느껴졌다.

그 두려움이 너무나 생생해서인지, 어린 나이였음에도 지금부터 서둘러서 삶의 목표나 의미를 찾아야 한다고 다짐했다.

이처럼 삶에 대한 강력한 의심과 불안이 삶에 대한 고민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곤 한다.     


불안의 성질을 생각해 봤을 때, 이러한 고민은 필연적이다.

불안을 포함한 다양한 감정은 유전과 기억으로 형성된 삶의 무의식적인 길잡이이다.

특히 불안은 우리가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다가올 미래를 대비하도록 만든다.

잊을 만하면 돌아오는 불안 덕분에 우리는 평생 동안 완전히 안주하지 않을 수 있고 분주히 움직이며 살 수 있다.

하지만 불안이 우리를 행동까지 이끄는 과정에서 느껴지는 여러 정보나 느낌은 매우 불쾌하다.

불쾌함이 올라오고 해소하는 과정을 통해 삶에는 다양한 경험과 의미가 쌓여가지만 동시에 우리는 반복되는 불안 때문에 조금씩 지쳐간다. 

때문에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진짜 삶, 진리, 엄청난 목표 등을 상상하며 그것을 성취하기만 하면 불안이 완전히 해소될 수 있다는 행복한 상상을 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그렇게 긴 기간 수많은 사람들이 삶의 목표를 찾아왔다.

누군가는 불안의 불쾌함과 반대에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감정인 행복을 추구했고 누군가는 삶에 대한 정답을 알려줄 진리 등을 찾아 헤맸다.

혹은 그러한 여유가 없는 대다수는 너무 거창한 목표는 추구하지 않고 그저 믿을 만한 사람의 삶의 목표를 모방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여러 가치를 좇는 이 중에 삶의 답을 찾아냈다는 이는 없다.

깊은 고민 없이 타인의 삶에 대한 답을 모방한 결과 그 타인에게 이용당하는 현대인의 사례도 늘어나고 있다.     


어쩌면 상상을 좇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또 이성적으로 생각해 봐도 모든 가치는 상황과 시기에 따라서 필요할 때가 다르기 때문에 다른 가치를 희생하면서 까지 추구할 더욱 우월한 가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당연히 조금만 더 이성적으로 생각해 봐도 예측 불가능한 삶을 매번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줄 무언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때문에 우리는 필연적인 실패를 마주하며 이전에 추구했던 가치를 부정하고 또 내가 추구하지 않았던 가치에 대해 후회하는 일을 반복한다.

결국 답을 찾고 부정하는 일을 반복하며 해소되지 않고 쌓이는 불안을 따라 삶에 대한 부정적인 느낌도 쌓여만 간다.

이렇게 불안에서 시작된 삶에 대한 고민의 답을 더 나은 삶의 방식과 타인에게서 찾은 결과는 실패였다.

더 이상 대단한 가치나 타인이 아니라 이 문제의 근본적인 문제에 집중해야 할 때일지도 모른다.

이와 같이 불안에 대한 오해로 만들기 시작한 목표는 실패했기 때문에 삶에 대한 고민을 만들어내는 불안을 제대로 해소하고자 한다면 불안과 불안을 만들어내는 생존과 번영의 욕구를 이해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거창한 삶의 목표를 고민하게 만들 만큼 큰 불쾌함을 가진 불안은 사실 생존과 번영을 위해 힘쓰라는 신호였다.

따라서 결국 삶에 대한 고민을 해결하는 방법은 그 고민을 일정 주기로 만들어내는 감정을 해소하기 위한 노력을 반복하는 것이다.

삶이 하나의 신념과 삶의 목표로 정의되어야 한다는 집착에서 벗어나 감정의 출현과 해소 과정에 충실한 생물다운 삶을 누리는 것이 삶의 고민에 대한 답으로서 더 알맞을 것이다.

하지만 그 방법을 구체적으로 고민하다 보면 다양하고 복잡한 고민에 빠지게 된다.

우선 정신적인 압박을 만들어내는 불안이 해소되어야 할 존재이면서 동시에 미래를 위한 다양한 행동의 동기가 되는 존재라는 상반된 정보는 우리에게 혼란을 준다.

이러한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불안 해소 과정을 더 세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불확실성(위험)에 대한 두려움인 불안은 보상(행복, 결핍)과 함께 생존과 번영을 향한 가장 근본적인 두 가지 동기 중 하나이다.

동기의 정도나 빈도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개인차가 있고 때문에 의견차이가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이들이 적당한 수준으로 있어야 함에는 대다수가 동의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무기력함에 갇히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위험을 예측하고 불안이 발생하며 그에 대응하고자 행동하고 그 결과에 따라 불안의 해소 여부를 판단하는 전체 과정이 우리 삶에 필요하다.

특히 불안이 동기로서 작동하기 위해서는 불안을 외면하지 않고 불안에 대응하고자 고민하거나 행동하는 과정이 꼭 포함되어야 한다.

따라서 불안의 해소과정은 보통 그것을 지우기 위한 실질적인 행동을 하는 것까지 포함한다.

반대로 불안과 그것이 주는 불쾌감을 해소하고자 고민을 하거나 행동하지 않고 감정 자체를 외면하거나 혹은 조절하는 방법은 우리가 불안에게 기대하는 동기와 같은 효과를 보기에는 적절하지 않다.

물론 때에 따라서는 행동하기에 앞서 비합리적으로 혹은 필요보다 과하게 작동하는 불안을 진정시킬 필요가 있기도 하다.

예를 들어 우리는 의도치 않게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요소까지 과도하게 신경 쓰며 불안해하거나 몇 번의 실패를 통해 자신과 환경의 통제 가능성에 대한 과하게 부정적인 피드백과 불안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비합리적이고 큰 불안을 마주하다 보면 통제하지도 못할 대상을 향해 헛된 통제 노력을 하게 될 수도 있고 혹은 통제되지 않는 환경을 앞두고 좌절하거나 무기력해질 수 있다. 

따라서 불안과 불쾌감에 대응하기 전에 우선 자신이 통제할 대상을 명확하게 정의하거나 불안을 키우는 실패에 대한 비합리적이고 부정적인 생각을 수정하며 불안을 잠재울 필요가 있다.

이러한 불안의 조절 과정을 통해서 불안에 대한 더 현명한 대응 행동을 만들어낼 수 있다.

따라서 불안을 해소하고자 할 때, 명상 등을 통해 의식적인 조절만으로 해소하는 방법과 직접적인 행동을 통해 해소하는 방법, 두 가지 방법을 완전히 분리해서 둘 중 하나만을 고려하는 것보다 두 가지를 함께 하는 게 더 좋은 불안 해소 방법이 될 것이다.

가끔 완전히 비합리적이고 때문에 행동하지 않고 해소해야 할 불안이 발생할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불안의 조절 과정과 그렇게 조절된 불안에 대한 대응 과정이 함께 해야 불안을 동기로서 활용하며 동시에 그 동기가 더 현명한 행동으로 이어지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마치 배고픔이라는 결핍의 불쾌함이 나타났을 때, 외면하는 것은 0점짜리 답안, 그것에 무작정 대응하는 것은 50점짜리 답안이고 배고픔을 느끼는 자신의 신체 상태나 식단을 고민하고 행동하는 것이 100점짜리 답안인 것처럼 생존에 대한 기여와 불쾌함을 동시에 갖고 있는 불안 역시 조절과 대응 행동을 모두 포함한 해소 과정을 거쳐야 더 현명하게 해소할 수 있다.   



  

이렇게 불안이 해소해야 할 존재이자 동기로서 활용해야 할 존재라는 모순이 설명되었다고 해도 여전한 의문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반복되는 불안을 동기로 행동하고 불안을 해소하는 일을 반복하면서 살아가는 것으로 충분한가? 삶이란 것은 무언가 다른 게 있지 않을까?’

물론 불안 해소로는 만족되지 않는 감정이나 특별히 신경 써야 하는 생존 재화가 있기에 불안 외의 삶의 목표도 다룰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의문은 추구할 요소의 다양함에 대한 의문이라기 보단 삶의 방식으로서 생존과 번영의 경향 혹은 감정만을 따라가는 것이 올바른지에 대한 의문일 것이다.

즉 우리는 인간이기에 다른 동물과 같이 생존, 번식, 감정을 따르는 것과는 다른 무언가 대단한 목표가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하지만 이 글의 첫 번째와 두 번째 문단에서도 다뤘고 앞선 진리와 의식에 대한 글에서도 다뤘듯 이상적인 세계란 상상에 불과하다.

완벽한 세계, 한 차원 높은 존재, 진리에 대한 다양한 가정은 모두 우리 뇌와 그 의식이 자연스럽게 만들어내는 허구이다.

따라서 이성적으로 봤을 때, 삶에는 답이 없고 우리에게는 마땅히 따라야 할 소명이 없다.

하지만 답이 없다는 것은 매우 익숙지 않은 일이기에 혼란을 준다.

또 추구해야 할 바가 없다는 사실은 삶의 의미를 빼앗고 무기력함을 주기도 한다.

무엇보다 우리는 지난 긴 시간, 본능적으로 소명이나 목적과 같은 조건을 통해서 불안을 해소해 왔다. 

불안은 불확실한 미래에서도 어떻게든 살아남고 기왕이면 더 잘 살고자 작동하게 된다.

그러나 불확실한 미래, 통제되지 않는 다양한 변수 때문에 불안을 통한 대응은 필연적으로 한번 이상의 실패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리 대부분은 당연한 실패를 경험하며 쌓인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아무것도 못하고 부정적인 생각에만 빠져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실패를 마주하고도 다시 일어나서 기꺼이 불안을 마주하고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나아가곤 한다.

실패에도 불구하고 불안의 증식을 억제하고 다음 시도를 기꺼이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신념, 목적, 소명 등이 결과를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 있게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신념이나 목적을 추구했다는 생각은 그 과정에서 마주하는 하나의 실패가 주는 충격을 줄여준다.

삶의 목표를 이뤘을 때 마주할 찬란한 미래에 대한 기대는 실패가 주는 충격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기에 충분하다.

이렇게 신념이나 목표는 몇 번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여전히 삶의 주도권을 갖고 있다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지금까지 우리는 신념 혹은 삶의 목표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고 그 노력에서 의미를 찾으며 선택의 순간이나 결과를 마주했을 때 나타나는 불안을 조절해 왔다.

하지만 지독한 의심 끝에 그러한 목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에 다다랐고 대신에 그냥 불안을 해소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여러 근거로 그것이 더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답이 된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실존하지 않는 상상 속의 목표나 이상은 분명 마음에 위안을 주었기에 새로 찾은 이성적인 답이 완전한 대체 답안이 되기는 힘들다.

이대로라면 우리는 실패나 불안이 주는 충격을 그대로 받아야 할지도 모른다.

또 불쾌하게도 의식에게 우리 삶의 통제권을 뺏어서 그것을 본능이나 환경에게 넘겨야 할지도 모른다.   

  

삶의 목적이나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이에게 차라리 그것을 만들어내는 감정을 해소하라는 조언이 완전한 답이 될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삶에 대해 알고자 과학을 공부한 끝에 허무함을 마주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어쩌면 제한된 시간을 가졌기에 그 제한된 시간의 삶을 어떻게든 무언가 하나의 의미 있는 것으로 바꾸고자 하는 집착은 자연스러운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생존과 번영, 그리고 인간을 공부한 입장에서 봤을 때, 의식적으로 만들어낸 삶의 목표가 허구라는 것과 삶의 의미가 없다는 얘기는 분명 다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오직 이성과 의식의 입장에서만 삶의 목적이나 의미를 찾는다.

의식적인 의미나 목적은 앞서 얘기한 것과 같이 위로가 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미리 만들어둔 목표나 의미를 좇아가는 것은 삶이 통제되고 있다는 의식적인 증거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우리는 의식적인 생각으로 대단한 목표나 의미를 상상해 내며 그것만이 삶의 목표나 의미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 때문에 의식적으로 상상해 낸 진리와 같은 삶의 목표가 허구라는 말에 모든 삶의 목표나 의미가 사라졌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의식되지 않을 뿐, 가장 처음의 순간부터 늘 우리와 함께 하고 있는 삶의 의지나 목적이 이미 존재한다.

그것은 살아가는 것 혹은 삶을 누리는 것이다.

우리 삶에 존재하지만 의식되지 않는 의미를 더 뚜렷하게 마주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처음 생기는 순간으로 돌아가 봐야 한다.

삶에 대한 의미와 의지는 내가 처음 세상에 나타나는 순간부터 함께한다.

‘나’라는 존재가 이 세상에 처음 존재하기 시작하는 것은 두 종류의 생식 세포가 만났을 때일 것이다.

그리고 그 두 세포의 유일하고도 가장 강력한 바람 혹은 목표는 분열 끝에 수많은 세포 덩어리로 거듭나는 것이다.

대단히 감동스럽게도 지금 이 순간의 우리는 이미 우리가 처음 세상에 나타나는 순간 간절히도 원했던 모습이 되어 있다. 

말도 안 되는 확률을 뚫고 자신이 가장 간절히 바랐던 꿈을 실현시킨 대단한 통제를 이루었다.

무언가 간절히 바라던 모습이 되었다면 그다음에 우리가 바라게 될 것은 무엇일까?

아마 그 꿈꾸던 모습으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 즉 그저 꿈꾸던 삶을 누리기만 하는 것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고 행복할 것이다.

우리는 이미 아무런 조건 없이 의미가 넘치는 삶 속 한가운데에 있다.

허구의 목표 없이도 삶에는 생존과 번영 혹은 삶을 누리고 싶다는 강렬한 소망과 의미가 담겨 있다.     


즉 굳이 다양한 허구를 내세우며 이미 구원된 삶에서 또 다른 구원과 위로를 찾아나갈 필요는 없다. 

간절한 바람 끝에 얻어낸 삶을 누리면 된다.

우리는 삶이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상처받지 않고자 삶 이상의 무언가를 꿈꾸고 그것에 집착하며 가장 소중하게 다뤄야 할 자신의 삶을 외면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어떻게 소중한 삶을 누리면 될까?

물론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이 그저 삶을 누려도 좋지만 누군가는 구체적인 답이 필요할 수도 있기에 지금까지 여러 번 다뤘던 그 내용을 다시 한번 다뤄보고자 한다.

삶의 의지에 영향으로 자동적으로 작동하는 뇌는 본능 혹은 감정이라는 언어로 삶을 누릴 방법을 제시한다.

본능 혹은 감정은 살아가기 위한 다양한 행동의 동기를 만들어줌과 동시에 동기를 올바른 행동으로 구체화하기 위한 고민을 던져준다.

따라서 감정과 본능으로 표현되는 삶의 욕구를 현명하게 해소하고자 노력하고 충실히 해소하는 것이 삶을 누리는 방법이 될 수 있다.     


다만 좋은 삶은 오직 감정과 본능에만 충실한 삶과는 다르다.

삶을 이끌어나가기 위한 생각과 행동을 만들기 위해서는 다양한 역할의 복잡한 기여가 필요하다. 

때문에 감정과 관련 있는 뇌 부위만이 삶의 유일한 주체인 것은 아니다.

감정에만 충실한 삶을 살게 되면 그 외의 다른 역할을 하는 이들의 요구는 무시하는 일이 있다. 

만약 때문에 삶의 주도권이 완전히 감정에게 넘어갔다는 느낌이 의식되면 살고 있다고 느끼기 어렵다.

특히 감정과 본능에게 주도권을 완전히 내어줬다고 생각하는 순간 의식, 이성은 삶의 통제권(대리감)이 훼손당했다고 느끼며 살아가는 것이 곧 감정과 본능에게 끌려다니는 것이라고 느끼게 될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감정과 본능에만 충실한 삶에 거부감을 느끼곤 한다.

앞서서 의식에 대한 글에서도 다뤘듯, 의식적으로 삶에 대한 통제감이나 대리감의 훼손을 경험하게 되면 환경 통제에 관한 자신감이 하락하거나 사회생활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따라서 의식이 분명 삶에 있어서 일정 부분 주도권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인지해야 하며 더 나아가 그 주도권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삶에 주체적인 참여자 중 하나라는 감각을 발달해야 한다.


물론 지금까지의 글에서는 계속해서 감정과 본능의 역할을 재발견하고 의식과 이성의 역할에 쌓인 환상을 없애 왔기에 의식 혹은 이성의 중요성을 조금 낮게 봐왔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지난 긴 기간, 이성, 의식에 너무 치우친 경향을 수정하고 우리 안에는 의식과 의식 밖 요소가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얘기하기 위해서였지, 의식의 역할을 완전히 빼앗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몇몇 연구는 확실히 의식만이 개선시킬 수 있는 의사결정이나 행동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앞서서 다뤘던 Persaud, N., McLeod, P., & Cowey, A. (2007)의 연구는 자신의 수행을 가지고 내기를 하는 일에는 주로 의식이 관여한 다는 것을 보여준다.

더 나아가 에릭슨(2016)은 일반적으로 의식되지 않는 자신의 수행 수준과 자신의 수행 상태를 의식하고 그것을 활용해 연습하면 습관을 변화시키고 큰 전문성 개선을 이룰 수 있음을 보여줬다.

이처럼 의식은 자신과 환경에 대한 더 깊은 정보를 만들고 그것을 통해 우리가 더 어려운 일을 해나가는데 기여한다.

따라서 의식 역시 우리 삶에 있어서 분명한 역할이 있으며 특정 부분의 통제자이다.

삶의 목표에 대한 고민에서도 의식과 의식 밖 영역 모두 분명한 역할이 있다.

처음에 그 고민은 분명 의식 밖 요소가 만든 본능이나 감정의 영향으로 시작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삶의 목표에 대한 고민이라는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필요한 더 깊은 통찰은 의식의 활발한 활동이 만들어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의식(혹은 의식을 이루는 여러 요소) 역시 본능과 감정으로 대표되는 의식 밖 요소와 함께 우리 삶을 이끌어가는 핵심 주체이다.     


결국 감정과 본능이 제시하는 삶의 방향에도 충실하며 동시에 의식적으로 삶의 통제권을 느끼기 위해서는 감정과 본능을 해소하되 그것을 의식적인 노력을 통해 조절하고 현명하게 해소해야 한다.

그러나 의식은 여러 감정과 본능의 의도를 명확히 파악하지 못하기에 일반적으로 현명하다고 보기 어려운 판단을 내놓는다.

예를 들면 반복되는 불안이 엄청난 목표를 통해서만 해소될 수 있다며 이상적이지만 존재할 수 없는 삶의 목표를 만들어 내곤 한다.

의식이 더 현명한 판단과 조절을 할 수 있게 돕기 위한 좋은 방법 중 하나는 감정과 본능 그리고 의식에 대해서 더 알아가는 것이다.

여러 감정과 본능이 어떠한 의도에서 만들어지고 어떤 특징을 갖는지 파악하며 의식이 어떤 실수를 할 수 있는지를 알아낸다면 의식이 감정에 더 알맞은 대응을 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

의식과 삶의 목표라는 이전 글에서도 다뤘듯, 이처럼 의식은 의식 밖 요소의 대표자이자 조율자로서 자신의 역할을 재정의 하고 삶의 목표에 기여할 수 있다.

그 빈도나 강력함 때문에 핵심으로 여겨지는 감정을 공부하고 그것을 현명하게 해소하고자 목표를 만들고 실천하는 것이 곧 우리가 의식할 수 없는 부분과 의식할 수 있는 부분 모두가 삶을 누릴 방법이 되겠다.

주어진 삶이 그 자체로 누릴 의미가 있다고 한다면, 그 삶의 선장인 의식과 의식 밖 요소 모두의 의견은 소중한 것이 되고 결국 삶의 목표는 이와 같게 된다.   



  

그렇다면 다시 돌아와 불안 해소의 삶의 목표는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이 되어야 할까?

나타나는 불안을 올바르게 파악하고 그것을 현명하게 해소할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앞서서 다뤘듯 불안의 조절과 해소 행동에 대한 논리와 방법을 만들면 될 것이다.

따라서 불안을 현명하게 해소하고자 한다면 먼저 그것을 조절하기 위해 현대 환경에서 그것이 적당한 수준으로 작동하는지부터 파악해야 할 것이다.

불안의 수준이 적당하지 않고 특히나 비합리적인 이유 때문에 그렇다면 다양한 방식을 통해서 그 수준을 조절해야 할 것이다.

불안의 수준을 파악하며 불안을 조절할 근거에 대해 다루고 난 후에는 불안을 해소할 구체적인 방안에 대해서 다뤄볼 것이다,

이렇게 만든 방법을 단기 목표로 구체화하고 추구하는 것을 반복하는 것이 불안 해소 측면의 삶의 목표가 되겠다.     


우선 불안의 수준에 대해서 다뤄보자.

생존과 번영을 책임지기에 불안은 당연히 끈질기고 집요하다.

반대로 이 집요함 때문에 지난 긴 기간 생존을 위한 여러 노력을 기꺼이 하며 생존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는 생존이 너무 쉽게 이루어져 더 대비할 위험이 없는 데도 불안이 발생하며 이 때문에 오히려 문제가 생기기도 한다. 

심지어 몇몇 현대 환경의 특징은 이러한 불안의 집요함을 증폭시킨다.

이렇게 현대에 와서 불안은 더욱 잘 해소되지 않고 쌓이기 때문에 적당히 조절할 필요가 있다.

생존과 번영을 향한 채찍질인 불안은 구체적으로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과하다.

첫 번째로 불안은 생존을 위해서 늘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대비한다.

지난 긴 기간 우리 선조가 살아온 환경에서는 한 번의 실수가 엄청난 손해나 죽음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몇 십만 년 전의 환경에서는 그날따라 유난히 나무에 올라타기 싫어서 딱 하루만 땅바닥에서 잔다는 선택을 한 결과, 밤사이 포식자에게 먹혔을 수도 있고 배가 고파서 캐낸 버섯의 식용 여부를 장로에게 묻지 않고 일단 입에 넣은 결과 중독되어 죽었을 수도 있었다.

따라서 늘 최악의 상황을 상정하고 불안해하며 조심하는 개체가 살아남을 확률이 더 높았을 것이다.

생존과 번영 입장에서는 백 번의 신호를 울려서 한 번의 미래 위험을 대비해 냈다면 성공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

때문에 불안은 온갖 최악의 상황을 상정하고 그 모두에 대비하도록 끊임없이 작동한다.

현대의 높은 기술 수준과 지식수준은 이러한 불안을 더욱 자극한다.

똑똑해진 현대인은 과거에는 알 수도 없었던 온갖 위험 요소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난 전쟁 때문에 내 생활이 타격받지 않을까 걱정하고 지금까지 잘 마셔온 제로 콜라의 당 성분이 위험할 수 있다는 뉴스에 걱정하고 미래에 완성될 AI가 내 일자리를 빼앗아 갈까 봐 걱정한다.

환경에 대한 너무나 풍부한 정보는 각각의 정보에 대한 최악의 상황을 상정하는 불안을 끊임없이 자극한다.

때문에 현대인은 가끔 과한 불안에 휩싸여 자신감을 잃고 안전한 길조차 선뜻 걷지 못한다.

과거에 비해 너무나 많은 정보 때문에 과도하게 불안한 현대인은 의도적으로 신경 쓰는 불안의 양을 줄여줄 필요가 있다.     


두 번째로 불안은 생존과 번영을 위해서 현재에 안주하지 않는다.

살아남고자 한다면 오늘 얻은 수확물에 만족하지 않고 내일 먹을 것을 구할 방법까지 고민하는 것이 좋고 더 나아가 번영하고자 한다면 당연히 자신을 계속해서 채찍질하는 것이 좋다.

수많은 변수 때문에 마음대로 되지 않는 삶을 이해하고 현재에 안주하지 않는 태도는 분명 생존과 번영에 효과적이다.

이 때문에 어느 정도 안정된 삶을 살게 되어도 불안은 여전히 작동한다.

특히 무리 동물인 우리는 우리 주변 더 번영한 이를 바라보며 그를 목표로 자신을 채찍질한다.

그러나 현대 환경에서의 이러한 목표는 높은 확률로 너무나 과하다.

옛날에는 마을에서 잘 나가는 이를 목표로 그와 유사한 점을 만들어 나가며 생존을 확보했거나 번영에 가까워졌다고 판단했고 불안을 해소했었다.

하지만 정보 통신이 발달한 현대에서는 감히 목표로 할 수 없는 수준으로 번영한 이에 대한 정보가 주어진다.  

대성한 이들의 삶에 대한 정보는 곧 더 이상 생존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삶 혹은 번영한 삶에 대한 기준이 되어버리고 그렇게 너무나도 높은 목표가 생긴다.

때문에 현대인은 이 정도면 생존하고 번영하는데 충분하다는 생각을 쉽게 할 수 없고 불안을 해소할 수 없다.

현명하게 불안을 해소하고자 한다면 이러한 비합리적인 기준점을 수정하고 불안을 조절할 필요가 있다.

사실 그 높은 목표를 좇을지, 아니면 그 불안이 비합리적이라고 의심해 볼지는 각자의 선택이긴 하다.

둘 중 어떠한 것이 삶에 있어서 정답이라고 확답할 수는 없다.

또한 아마 정답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글을 읽고 삶의 목표를 만들고자 함께하는 이들은 분명 평생을 불안에 끌려다니며 분주히 사는 삶에 대한 의문이 있을 것이다.

많은 것을 누릴 수 있는 시대, 아니면 삶 그 자체가 많은 것을 누려야 하는 것인데 불안의 강렬한 발언만 따라가는 것은 최선이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 나만의 진실된 삶의 목표를 만들고자 한다면, 특정 삶의 목표를 강요하는 대상에 대해서 인지하고 있어야 하며 그것에 끌려 다니기보다는 그것을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

불안의 관성으로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생긴 높은 목표를 좇는 것과 자신에게 영향을 준 불안을 이해하고 자신이 자발적으로 높은 목표를 추구하는 것은 분명 다르다.     




현대인으로서 우리가 겪는 불안은 과하다.

과한 불안에 현명하게 대처하기 위해서는 그 감정에 자극당해 행동하기 전에 우선 몰려오는 감정을 조절해야 한다.

마치 강렬한 화가 올라와 같이 있는 동료에게 당장이라도 소리치고 싶을 때, 오늘따라 화가 난 이유가 아침부터 치통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을 상기하고 감정과 행동을 조절하는 것이 더 현명한 선택인 것과 같다. 

현대에서는 불안이 언제든 과할 수 있음을 명심하고 내가 신경 쓰지 말아야 할 정보는 적절히 차단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이와 같이 불안을 조절했다면 그다음으로 그것을 해소할 행동을 하면 될 것이다.

최선의 해소 방법은 당연히 상황에 따라 불안의 원인을 파악하고 그것을 위한 적절한 대처 행동을 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의식은 일반적으로 의식할 수 없는 사이에 발생한 불안의 원인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불안의 원인이 무엇이며 그 원인을 제거할 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아갈 필요가 있다.     

대부분의 느낌(감정)이 생존과 번영을 목표로 한다고 가정한다면, 일반적으로 불안이 무엇을 목적으로 발생하는지 파악할 수 있다.

불안은 생존과 번영을 위한 행동을 목표로 작동한다.

따라서 불안 해소의 핵심 중 하나는 다가오는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 생존, 번영 자원을 확보하는 것이다.

한편 몇몇 자원은 확보 과정이 까다롭고 길다. 

불안은 우리가 그 긴 과정을 차근차근 잘 밟아 나갈 수 있도록 계속 채찍질한다.

따라서 불안 해소의 또 다른 핵심은 자원 확보 과정 혹은 삶이 잘 통제되고 있다는 믿음, 근거이다.

결론적으로 불안이 목표로 하는 생존 자원(자원 고갈 위험 회피)과 통제감을 얻는 구체적인 방법이 불안을 해소하는 방법이 된다.     


통제감을 얻는 방법에 비해 생존과 번영을 위해 행동하는 법은 비교적 명확하다.

다가오는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서 생존과 번영을 위해 필요한 것을 확보하거나 혹은 확보를 위해 노력할 때, 그것을 근거 삼아 생존과 번영을 향한 불안을 해소할 수 있다.

현대인으로서 우리는 거친 환경에게 공격받을 위기와 굶어 죽을 위기에서 과거에 비해 엄청나게 자유로워졌지만 그 위기에서 완전히 해방된 것은 아니다.

때문에 현대인 역시 생존을 위해 필요한 다양한 자원을 얻고자 노력해야 한다.

이러한 노력은 불안을 해소할 근거가 될 뿐만이 아니라 실제 생존과 번영에도 도움이 된다.

이처럼 생존과 번영을 위해 노력하며 불안을 해소하는 법은 그 방법이 비교적 명료하고 또 지금까지 우리가 관성적으로 해오던 일이기에 간단해 보인다.

하지만 생존 자원의 종류가 다양하고 각 자원마다 얻기 위한 방법이 달라지기 때문에 고려할 바가 적지는 않다.

물론 현대에서는 다양한 생존 자원 대부분이 화폐로 거래되기에 일반적으로는 화폐로 바꾸기 용이한 돈, 주식, 채권, 부동산 등의 자산 획득을 목표로 노력하면 될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사유재산을 안정적으로 인정하는 나라에서 일정 이상으로 축적한 부는 신용의 증거가 되거나 우월함의 증거가 된다.

즉 부의 축적만으로 무리에서 유명해지고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자산을 획득하기 위한 노력은 불안을 자극하는 생존과 번영, 둘의 요구를 모두 어느 정도 만족시킬 수 있다.

하지만 자산이 신용의 증거가 되기 한참 전의 삶이 더 익숙한 생존과 번영은 돈이 아닌 곳에서도 생존과 번영의 증거를 찾곤 한다.

예를 들면 무리 생활을 통해 생존해 왔던 기간이 길기에 생존과 번영을 향한 본능은 현대에서도 여전히 친구나 이웃의 존재를 요구한다.

생존과 번영의 입장에서는 무리와 함께하며 느끼는 소속감, 무리 구성원에게 받는 인정, 신뢰할 수 있는 친구를 통해서 생존 자원이 확보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생존, 번영의 자원을 획득해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돈 이외에 지난 긴 기간 동안 우리가 필요로 했던 자원을 찾고 획득하고자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사실 멀지 않은 과거까지는 굳이 따로 노력할 필요 없이 사람들과 부대껴야 자산을 쌓을 수 있었다.

돈을 버는 일이 곧 소속될 무리에 들어가 교류하는 일이 되었다.

하지만 특히 최근에 노동 환경이 점점 더 개인화되어 가면서 돈의 획득과 무리 생활이 점점 분리되어가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생존을 위한 적응에 반영되기에는 너무나도 짧은 역사를 지닌다.

때문에 현대인의 마음은 갑작스러운 일터에서의 고립에 불안을 키울 수 있다.

이처럼 생존과 번영을 위한 행동을 하며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지난 긴 기간 우리가 생존을 위해 해 오던 활동 중에 더 이상 하지 않는 활동을 돌아볼 필요도 있다.

해당 활동이 생존과 번영에 어떤 도움이 되었는지를 돌아보며 그 행동 혹은 가치가 자산 획득 활동만으로 해소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면 해당 자원을 따로 획득하고자 노력해야 불안에 온전히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렇게 다양한 생존 자원을 찾고 추구하고자 하는 노력은 현대인으로서 우리가 돈의 축적이나 소비를 통해서만 불안의 해소나 쾌의 추구를 하고자 하는, 위험성이 큰 집중투자에 빠지는 것을 막아주기도 한다.     

구체적으로 어떤 자원을 추구할지는 상황에 따라서 매번 달라질 것이다.

때문에 때에 따라 필요한 자원을 고민하고 단기 목표를 만들면 될 것이다.

물론 정확히 어떤 자원 혹은 위험을 대상으로 불안이 작동되었는지는 의식할 수 없다.

우리 의식은 주로 의식 밖에 존재하는 본능의 의도를 알 길이 없다.

아니 어쩌면 본능이 원하는 원시적인 자원을 현대의 특정 자원이 완전히 대신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가 성공적으로 불안을 해소한 경험이 있는 것은 불안을 만든 이와 불안을 제어하는 이가 어느 정도 분리되기 때문이다.

즉 우리 의식 혹은 의식되는 정보는 불안의 진원지가 아님에도 불안을 해소해도 된다는 판단에 영향을 준다.

실제로 불안 발생에 관여하는 부위는 편도체이며 불안을 조절하거나 대응할 계획을 세우는 부위는 주로 전전두엽에 해당한다.

편도체와 전전두엽의 주장을 필두로 감각 정보, 미래 예측, 과거 데이터 등 다양한 정보가 모여 불안 대처 방법을 토론하거나 대처 이후에 불안 해소 여부를 결정할 토론을 진행할 것이다.

이러한 토론은 보통 의식되는데, 가끔 토론의 진행자 혹은 참가자로서 의식이 인지하는 불안 해소 여부에 대한 토론의 결론은 불안 발생원인 제거와 관련이 없다. 

예를 들면 우리는 정확히 불안이 왜 발생했는지도 모르면서 그 불안이 동기가 되어 일단 자신이 해야 할 일 중 하나를 아무거나 열심히 했을 때, 뿌듯함을 느끼며 불안을 해소하곤 한다.

즉 때론 의식에 불안의 발생원인 제거와 상관없이 불안 해소를 위해 충분한 노력을 했다는 판단이 생길 때, 불안을 해소해도 된다는 결론이 생긴다. 

의식의 이러한 모습은 앞선 글에서 인용한 인지부조화 이론이나 공정한 세상 가설에도 나타난다.

두 가지 주장에 의하면 우리는 우리가 충분한 노력과 돈을 투자했을 때, 결과를 더 긍정적으로 예측하거나 해석하며 날뛰는 불안을 잠재운다.

아마 많은 이들이 이 정도로 노력했으니 잘 될 것이라며 혹은 최선을 다했으니 괜찮다며 불안을 해소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물론 우리는 최대한 불안이 지목하는 대상을 정확히 파악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 또한 불안 해소를 더 강력히 주장할 근거가 되며 동시에 더 현명한 방법을 선택할 확률을 높여줄 것이다.

이처럼 의식에 나타나는 올바른 대처 방법에 대한 고민과 그 방법을 향한 노력은 분명 의식 밖에서 발생한 불안을 해소할 수단이 된다.

긴 기간 우리는 불안이 생존과 번영을 향한 채찍질임을 파악했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다양한 생존 자원의 존재에 대해 알아봤다.

이제 이 정보를 토대로 해당 시점에 필요한 생존, 번영 자원을 고민하고 그것을 얻고자 노력한다면 분명 우리 의식은 불안 해소를 강력히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불안 해소의 두 번째 핵심은 통제감이다.

최종적인 목표만 봤을 때, 불안의 목표는 분명 생존과 번영을 방해하는 위험 제거(대비) 혹은 생존과 번영을 돕는 여러 자원 확보이다.

그러나 불안은 그것이 경고한 대상을 향한 대처를 시작했다고 해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불안은 대처 결과를 마주할 때까지 계속해서 작동한다.

즉 불안은 결과까지 이르는 과정을 방해하는 불확실성에 대응하기 위해서 생성된다.

따라서 불안의 또 다른 목표는 과정의 통제 혹은 과정의 통제를 방해하는 불확실성의 해소이다.

한편 우리가 불확실한 것, 예상에 없던 것을 예방하거나 대응하고자 한다는 얘기는 우리가 늘,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무언가를 예측하고 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예측이 존재해야 그 예측에 반하는 결과, 즉 불확실성이 정의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불확실성과 통제는 그전에 계획과 예측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통제를 목표로 하는 불안 해소 과정은 미래를 예측하는 과정에서부터 시작한다.

즉 과정 통제를 위한 예측 과정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예측된 위험에 관한 경고에 대비하기 위해서 몇 가지 예측, 계획이 만들어진다. 

그중 괜찮은 시나리오가 선택되고 실행되어 행동으로 이어진다. 

이어서 실제 결과를 마주하고 난 뒤에 예측 값(선택된 시나리오 혹은 계획)과 실제 결과 값을 비교하고 그 비교를 통해 통제 성공 여부를 포함한 다양한 정보를 얻고 불안해소 여부를 결정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예측 값과 결과 값이 일치할 때, 통제가 되었다고 판단하고 불안을 해소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과정에 개입해서 통제감 형성을 촉진시키는 것이 불안을 해소하는 방법이 될 것이다.    


구체적인 방법을 고민하기 전에 그 전제가 되는 가설을 더 탄탄하게 만들기 위해 먼저 통제감이 예측한 정보와 여러 정보를 비교하는 과정을 통해 생성될 것이라는 가설의 근거를 더 찾아볼 것이다.

사실 의식 안팎에서 벌어지는 감정의 발생과 해소 과정이 완벽히 이와 같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안이 이와 같이 예측과 통제를 통해 해소될 것이라는 추측은 두 가지 근거를 통해 더욱 지지할 수 있다. 

첫 번째, 우리에겐 이미 비슷한 방식으로 작동하는 예측 기능이 있다고 여겨진다.

의식되지 않는 정신 활동이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지는지 알아내는 일은 매번 어렵다.

불안과 불확실성에 대응하고자 예측값을 만들고 그것을 실제값과 비교하며 다양한 정보를 얻는다는 추측 역시 충분히 설득력이 있지만 그것은 여전히 의식 안팎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한 추측에 불과하다.

하지만 만약 의식 안팎에서 이루어지는, 예측값을 만들고 그것을 실제값과 비교하는 과정이 필요한 이유가 더 다양한 측면에서 제시된다면 이 주장은 더욱 지지받을 수 있을 것이다.

다양한 목적으로 예측을 통해 통제 여부를 확인하는 일을 이미 해왔다면 불안 역시 그와 같은 방식으로 처리할 확률이 올라간다.     


우리는 이미 운동 통제와 대리감 형성 측면에서 유사한 예측 기능이 필요함을 다뤘었다. 

앞서서 대리감을 설명하면서 다뤘던 운동 통제 과정에서의 예측 기능의 존재는 예측값을 만들고 그것을 다른 정보와 비교하는 정신 활동이 의식 안팎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근거가 된다.

목표로 한 행동을 성공적으로 해내기 위해서 운동 통제 기능이 만든 운동 명령은 운동 수행 기능에게 전달될 뿐만이 아니라 그대로 복사되어 예측 기능(포워드 모델)에게도 전달된다.

예측 기능은 전달받은 정보를 시뮬레이션하며 운동이 올바르게 이루어졌을 때의 동적, 감각적 정보를 만들게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예측값은 운동 명령이 처음 의도에 맞게 만들어졌는지 확인할 기준이 된다.

또 예측 기능이 만든 감각정보는 행동이 이루어진 후의 감각정보와 비교되며 그 결과가 일치할 경우 대리감이 형성된다.

이와 같이 불안 해소 목적뿐만이 아니라 운동 통제를 위해서도 예측값을 만들고 그것을 실제값과 비교하며 통제여부를 확인하는 과정이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이미 운동 통제를 위한 예측 과정이 이뤄지고 있었다면 그러한 정보 처리 방식을 다른 정신 기능까지 확장해 사용했을 가능성이 생긴다.

뇌라는 수뇌부가 목표로 하는 생존과 번영을 위해서는 환경을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뇌 속의 뉴런들이 외부 환경에 영향을 주기 위해서는 우선 신체, 행동을 조종할 수 있어야 한다. 

이처럼 외부 환경 통제를 위해서는 우선 운동의 통제가 이루어져야 되기 때문에 환경에 있는 변수의 통제를 목표로 하는 불확실성 통제 과정과 운동 통제 과정이 유사한 것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도파민 예측 오류 이론도 뇌에서 미래를 예측하고 그 예측값을 실제값과 비교하는 정보처리 절차가 있음을 지지한다.

도파민과 학습을 연구하는 Schults(2016)는 외부 환경과 상호작용을 하며 정보를 얻고 그 정보를 행동에 반영하는 '학습'을 진행하기 위해 예측하고 예측과 실제 결과 값을 비교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이러한 제안에서 발전한, 예측값과 실제값을 비교한 결과 중 일부가 도파민 양 조절에 영향을 미친다는 도파민 예측 오류 이론은 다양한 연구를 통해 지지되었다.

실제로 Den Ouden(2012)은 다양한 뇌 부위에서 예측과 비교 그리고 그를 통한 정보 획득과 학습의 근거로 보이는 신경 신호를 발견했다.

더 나아가 Forillo(2013)는 회피해야 할 위험을 예측하고 그 결과에 대한 정보처리를 하는 뉴런을 발견하고 이를 보고 했다.

부정적인 미래를 예측하고 그에 대응하라는 예측 정보가 학습에 쓰일 수 있다는 이러한 연구 결과는 이글에서 제안한 불안 해소 가설의 근거가 될 수 있다.

다양한 연구 결과에서 알 수 있듯, 애초에 예측과 비교는 생존을 위해서 꼭 필요한 기능이다.

변수를 갖는 환경 속에서 자신이 의도한 일을 성공적으로 해내기 위해 다양한 대상을 예측하고 그 값을 여러 정보와 비교하는 정신활동이 발달했을 가능성이 크다.


두 번째, 불안 해소 실패에서 자신의 예측 능력과 환경의 불확실성에 대한 부정적인 피드백의 흔적이 확인되기에 불안 해소 과정에서 예측값과 실제값의 비교가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불안과 미래 예측 과정의 관계는 불안 해소 실패가 반복된 끝에 나타나는 무기력함과 극단적인 행동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불안 해소 실패를 반복하다 보면 자신의 예측 능력에 대한 불신을 갖거나 환경 속의 변수에 대한 과대평가를 하게 되며 결과적으로 환경이 통제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환경 통제에 관한 부정적인 생각은 의식 안팎으로 발현되어 구체적인 증상으로 나타나는데, 그 대표적인 증상이 우울증 혹은 극단적인 행동이다.

불안과 우울의 높은 상관 혹은 불안장애가 우울증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이와 같이 불안에 대한 대응 행동을 통해 삶의 통제 여부를 판단하게 된다는 가설로 설명할 수 있다.    

즉 무기력함은 예측한 위험에 대한 대처의 실패가 학습된 결과이다.

 

예측된 위험, 불확실성과 그로 인한 불안을 해소하고자 대응에 관한 예측, 계획을 만들고 그것을 실제 결과와 비교하게 되면 통제 성공 여부와 자신의 판단에 대한 피드백, 환경의 불확실성에 대한 정보를 얻게 된다.

이렇게 불안에서 시작된 생존과 번영을 향한 다양한 시도는 단발성으로 끝나지 않고 다음 시도에 대한 교훈이 되기도 한다.

예를 들면, 반복된 실패를 통해서 자신의 판단이 옳지 않다고 배울 수 있으며 또 환경이 자신의 예측과는 매번 다른 결과를 주는, 불확실성이 넘치는 위험한 곳이란 판단을 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 생존 본능은 이렇게 부정적인 피드백이 나오는 열악한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든 살아남고자 조치를 취한다.

잘못될 확률이 높은 자신의 판단에서 더 이상 학습이 이뤄지지 않도록 조치를 취하고 불확실성이 넘치는 환경에서 최대한 활동하지 않고 그저 가늘고 길게 목숨만 연명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한다.

이와 같이 실패의 지속과 그로 인한 불안의 지속은 우울증의 증상으로 대표되는 학습과 기억 기능의 감퇴와 무기력함으로 이어지기도 한다(야오나이린. 2021).

우울증의 흔한 증상인 도파민 학습을 담당하는 전전두엽과 학습과 기억을 담당하는 해마의 손상은 틀릴 가능성이 높은 자신의 판단이 기록되고 반복되는 것을 막고자 한 흔적이다.

도파민 보상 회로의 저하된 활성화 등으로 인한 무기력함은 최대한 소극적이고 안전한 행동이나 판단만을 유도하며 위험한 환경에서 우리가 최대한 길게 생존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

이처럼 반복된 불안 해소 실패는 자신이 통제 능력이 없거나 환경이 통제되지 않는다는 결론으로 이어지고, 이러한 결론은 더 이상 섣부른 예측, 행동이 빈번하게 이루어지지 않도록 막고 잘못될 가능성이 큰 예측과 행동에서 최대한 아무것도 배우지 않도록 막는 우울증으로 이어진다.

이는 불안을 해소 과정에서 예측과 비교를 통해 자신과 환경에 대한 정보를 학습하는 과정이 포함된다는 증거가 된다.      


우울뿐만이 아니라 더 심각한 문제로 이어지는 현상 또한 이와 같이 통제에 대한 부정적인 피드백으로 설명된다.

불확실한 환경에 대응하는 방법에는 무기력함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불확실한 환경에서 생존해 내고 더 나아가 번영까지 이루기 위해서 그 환경에서 아무도 시도하지 않을, 더 위험하지만 때문에 보상이 많을 시도를 해볼 수도 있다.

때문에 누군가는 불확실성이 넘쳐나는 끔찍한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더 충동적이고 파괴적인 행동을 한다.

특히 환경 통제를 포기하고 무기력함 속에서 있다가 갑자기 폭발적인 에너지를 내는 조울증 같은 경우가 이러한 위험에 더 높은 확률로 노출된다.

그 행동을 통해서 정말로 환경을 극적으로 극복해 낼 수 있으면 좋겠지만 대부분은 충동적인 도전의 대가를 치르며 그 미래를 희생시키게 된다.     


물론 더 많은 연구와 증거가 필요하겠지만 이처럼 예측하고 그 결과 값을 비교하는 과정을 통해 불안을 처리한다는 가설을 지지하는 근거가 다양하다.

또 불안과 우울의 관계는, 불안이 하나의 동기로서 우리가 더 열심히 살도록 만들지만 다른 한편으로 불안이 통제감 형성 실패를 특정 방향으로 해석하게 만들면서 우리를 무기력하게도 만들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무기력함은 애초에 시도 횟수를 줄임으로써 성공 경험을 맛보고 통제에 대한 믿음을 만들 수 있는 기회 자체를 빼앗아가기에 불안 해소에 치명적이기도 하다.

결과적으로 불안이 무기력함으로 이어지면 무기력함이 다시 불안 해소를 방해하는, 빠져나오기 어려운 굴레에 빠질 수도 있다. 

따라서 우리는 불안 해소 과정에서 환경과 자신에 대한 과하게 부정적인 평가가 생기지 않도록 조절해야 할 필요가 있다.     


다시 통제감 형성 방법으로 돌아와 불안 해소 과정에 대한 가설이 지지된다면 불안 해소의 핵심인 통제감은 불안 혹은 불확실성을 해소하고자 노력하는 과정에서 찾으면 될 것이다.

우선 당연히 예측과 실제 결과가 일치할 때, 자신이 통제력이 있고 환경이 통제 가능하다는 판단이 생길 것이고 불안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자면 우리는 미래와 그 불확실성을 완전히 통제할 수 없다.

예측 실패는 필연적이고 때문에 예측의 성공 여부와는 별개로 통제감 혹은 대리감을 찾을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혹은 최소한 예측 실패가 환경과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나 무기력함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막을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실제로 예측 실패나 성공이 바로 학습이나 통제감 형성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우리 주변에는 실패해도 좌절하지 않는 이가 있고 성공해도 무기력함이나 불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이 어떻게 예측 실패나 성공을 일반적이지 않게 해석할 수 있는지 알게 된다면 예측 결과에 얽매이지 않고 무기력함이나 통제감을 조절할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실패가 통제에 대한 부정적인 피드백 혹은 성공이 통제에 대한 긍정적인 피드백으로 무조건 이어지지 않는 이유는 그 사이에 실패 혹은 성공을 해석하는 절차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결과 혹은 현상을 마주하고 그것을 해석하는 의식적인 혹은 무의식적인 방식을 귀인 양식(style) 혹은 설명 양식이라고 부르고 많은 연구자들이 이를 연구했다.

그중 심리학자 셀리그먼은 실패라는 결과가 좌절로 이어지지 않기 위한 설명 양식으로서 낙관주의를 제안했고 우리가 가진 기존의 설명 양식을 낙관주의로 전환하기 위한 방법을 제시했다.

셀리그먼은 실패에도 좌절하지 않는 사람의 특징을 연구했는데 특히 그들이 결과와 원인을 해석하는 방법에 집중했다(Seligman, M. E. 2006).

연구 결과, 좌절하지 않는, 낙관주의적인 사람들은 성공이란 결과를 마주할 때, 성공이나 성공의 원인을 다음 시도에 확산하고자 했다.

그들은 성공을 해석할 때, 성공을 이끌어낸 주된 요소는 자신이 통제하는 요소이고 성공 혹은 성공을 이끈 요소가 다음 시도에도 이어질 것이며 다른 분야의 시도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으로 봤다.

반대로 비관주의자, 회의론자, 무기력한 사람, 좌절한 사람으로 불리는 이들은 성공을 했음에도 그 원인이 통제되지 않으며 성공이 다음 시도에 이어지거나 다른 분야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지 못할 것으로 해석하며 성공을 일시적인 우연으로만 바라봤다.

또 낙관주의 설명 양식의 소유자는 실패를 해석할 때, 실패나 실패의 원인이 다른 일에 확산되는 것을 막았다.

그들은 실패의 원인이 외부에 있기에 자신을 탓할 필요가 없다고 여기며 실패가 다음 시도나 다른 분야에 영향을 주지 못할 것으로 봤다.

반대로 비관주의자는 실패가 자신 혹은 자신을 둘러싼 환경 때문에 일어났으며 그것이 반복될 것이라고 여겼다.

이와 같이 실패 혹은 성공을 마주할 때, 자신의 안팎을 기준으로 원인의 위치, 결과의 지속성, 결과의 확산성, 세 가지 차원에 대한 해석에 따라서 낙관주의자와 비관주의자가 갈렸다.

그리고 셀리그먼은 여러 인지행동치료 결과를 통해 낙관주의자와 같이 결과를 해석함으로써 그들의 설명양식을 습득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통제 실패로 인한 좌절을 피하고자 낙관주의 설명양식을 불안 해소 과정에도 적용해 볼 수 있다.

불안 해소 과정에서 예측 실패가 일어나도, 즉 불안해서 하게 된 대응 행동이 예측과 다른 결과를 가져오더라도 예측 실패를 낙관주의적으로 해석하면 환경과 자신의 통제에 대한 부정적인 결론을 막을 수 있다.

예측 실패의 원인이 자신 밖에 있고 그 원인 혹은 실패가 일시적이며 다른 일에 영향을 줄 수 없다고 해석해 낸다면 해당 실패가 환경과 나에 대해 많은 것을 설명해주지는 못한다고 여기게 될 것이다.

다만 예측 결과에 대한 성급한 결론은 대부분 우리의 통제 없이 자동적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우선은 무의식적으로 형성된 비합리적인 결론이나 정보를 반박하며 결과 해석을 수정해 나가는 방식으로 낙관주의를 실천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실패를 통해 환경과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결론이 자동적으로 나오면 그것을 반박하는 일을 반복하면 된다.

반복을 하다 보면 나중에는 자동적인 해석 방식 또한 영향을 받아 변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좌절을 몰아내는 낙관주의를 정착시킬 수 있다.

이처럼 셀리그먼의 낙관주의를 이해하고 연습하면 불안 해소 과정에서 우리가 필연적으로 마주할 통제 실패 사실이 통제감에게 주는 충격을 줄여주며 무기력함을 예방할 수 있고 반대로 성공이 주는 통제감을 온전히 누릴 수 있게 된다.     


셀리그먼의 낙관주의는 필연적인 예측 실패가 좌절로 이어지지 않게 막아줌으로써 불안이 무기력으로 이어지지 않게 해 준다. 

따라서 불안을 조절하고 때로는 해소하기 위해서 꼭 필요하다.

그러나 이는 예측 혹은 행동이 이루어진 후 성공에서 통제감을 온전히 찾고 실패로부터 통제감을 보호하기 위한 방법이며 때문에 대처에 가깝다는 한계를 갖는다. 

결과를 마주하기 전, 특정 노력을 했다는 근거만으로 삶의 통제감을 키울 방법은 없을까? 

예를 들어 학생들은 학업에 관한 통제감을 지키고자 시험 결과를 낙관주의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렇게 결과를 마주하고 해석하는 방법을 통해서 학업에 관한 통제감을 지킬 수도 있지만 또 다른 방법으로 열심히 공부하며 그 노력을 근거로 학업에 대한 통제감을 기를 수도 있다. 

이처럼 결과가 나오기 전에도 통제감을 찾고 불안을 물리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존재한다. 

학업과 삶의 통제감이 같을 수는 없겠지만, 삶 혹은 과정에 관한 통제감을 적극적으로 형성할 방법이 분명 있지 않을까? 

불안을 이겨낼 삶에 관한 통제감을 적극적으로 키우기 위한 방법을 찾기 위해서 우선 통제를 예측과 결과의 일치로만 정의하는 것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 능력의 한계와 각종 변수 때문에 예측과 결과의 일치는 통제되지 않는 것에 가깝기 때문이다. 

통제할 수 없는 통제 대상에서 벗어나 삶, 과정에 관한 통제의 정의를 더 넓힌다면 통제감을 적극적으로 기르고자 할 수 있는 노력이 보일지도 모른다.     


우리를 생존과 번영으로 이끌고 싶은 불안은 내 삶이 통제된다고 느껴질 때 해소된다.

우리는 두 가지 정보를 통해 삶이 통제된다고 판단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지금까지 다뤘듯, 예측한 결과가 실현되었을 때 삶이 통제된다고 느낄 수 있다.

누군가는 원했던 직장에 취직하고 샀던 주식이 올랐을 때 삶이 통제된다고 느낀다. 

예상했던 미래가 실현되었을 때, 머릿속에서 만들어졌던 예측과 계획이 외부 환경과 내 삶을 통제해 냈다고 판단하게 된다.

그리고 통제 성공 경험은 학습되어 앞으로도 삶을 통제해 낼 수 있을 것이라는 보다 장기적인 감각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판단 과정은 자주, 의식 밖에서 자동적으로 이루어진다.

때문에 우리는 의식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결과를 통해서 삶의 통제 여부를 판단하곤 한다.

그러나 우리 예측 능력의 한계와 환경 속 다양한 변수 때문에 예측했던 결과를 얻는 일은 쉽지 않다.

결과를 통제하기 위한 노력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고 때문에 필연적으로 실패를 마주하게 된다.

예측 실패는 불쾌한 느낌을 동반하며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우리의 통제감을 훼손하고 우리는 그 결과를 학습한다.

다행히도 우리는 통제감의 훼손과 실패의 학습을 막고자 예측 실패에서 얻는 정보를 선별하는 과정에 개입할 수 있다.

셀리그먼의 낙관주의를 활용해 성공 혹은 실패라는 결과를 특정 방향으로 해석한다면 통제감을 지켜낼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로 자신의 의지로 자신의 삶의 방향을 정했을 때, 자신이 삶을 통제한다고 느낄 수 있다.

누군가는 결과와는 별개로 자신만의 가치를 추구한 경험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고 있다고 느낀다.

혹은 버는 돈이 적어도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삶에 감사함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 

즉 우리는 삶에 있어서 자유롭게 자신만의 선택을 할 때 또한 삶을 통제한다고 느낀다.

통제를 이와 같이 여기는 이들 역시 예측을 만들고 예측값과 결괏값을 해석하며 삶의 통제여부를 확인한다.

그러나 이들은 통제여부를 해석하는 데 있어서 예측과 그 계획에 자신의 의도가 얼마나 담겼는지도 평가한다.

자신의 의지가 듬뿍 담긴 계획이라면 그 결과와는 별개로 삶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었기에 삶을 통제했다고 여긴다.

Zhou, Q., Mao, J. Y., & Tang, F. (2020)의 연구는 자율성을 가진 직원이 실패 이후 실패에서부터 적극적으로 학습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보여줬다.

자율성과 같은 내적동기를 갖고 자기 결정을 한 이들이 삶의 통제에 대한 부정적인 정보를 주는 실패를 겪고 나서도 그것을 통제하고자 기꺼이 마주하고 분석한다는 결과는 삶을 통제하고 있다는 감각을 형성하는 데 있어서 자율성을 통한 자기 결정이 실패라는 결과보다 더 큰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우리는 불안을 마주하고 미래를 예측, 계획하는 과정에 의식적, 주도적으로 참여함으로써 통제감을 형성할 수도 있다.     


우리는 이미 자신의 의지가 반영된, 자신을 위한 선택을 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다. 

자신을 위한 선택을 만들어내는 주체가 의식 안팎으로 다양하다는 것을 알며 공부를 통해 그들과 소통해 낼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소통을 통해 알아낸 그들의 의도를 잘 반영해 선택한다면 진정 자신을 위한 선택을 할 수 있다. 

따라서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히 공부했기에 학업에 관한 통제를 자신할 수 있듯, 올바른 방법으로 자신을 위한 선택을 했기에 삶에 관한 통제를 자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공부가 쌓일수록 통제감이 커지듯 노력이 담긴 선택이 쌓일수록 통제감도 커질 것이다. 

결국 자신의 의식 안팎에 대한 공부를 통해 그들과 소통하며 자신만의 선택을 반복해 나가는 것, 그것이 삶을 통제하고 있다는 증거를 늘려가며 사는 방법이다.


선택은 삶에 있어서 생각보다 더 큰 부분을 차지한다.

우리는 어떤 학교를 갈지, 어떤 직장에 갈지, 어떻게 살아갈지 등을 선택하고 자신이 선택한 것에 시간을 쏟아 부우며 살아간다.

즉 우리 삶을 형상화하자면 선택과 그것을 위해 쓴 시간이 쌓인 모양일 것이다.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노력을 해왔는가가 우리 삶에 가장 큰 영향을 주게 된다.

우리가 삶에 있어서 중요하다고 생각해 온 결과는 엄밀히 말하자면 삶에 직접 영향을 주기보다는 다음 선택에 영향을 주며 삶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준다.

때문에 물론 결과도 중요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선택과 그 선택을 실현시키기 위한 노력이 우리 삶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이처럼 삶을 통제한다는 관점에 있어서 결과의 통제 역시 중요하지만 선택의 통제가 생각보다 더 큰 부분을 차지할 수 있다. 

     

불안을 해소하고자 자신만의 선택을 하며 삶에 관한 통제감을 형성한다는 측면에서, 얼핏 보면 자신의 의식 안팎의 목소리를 통해 선택하는 방법과 자신에게 가장 우월한 가치를 찾아 좇는 방법은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전자는 의식 밖에서 만들어진 본능, 감정과 같은 정보에 충실한 방식처럼 보이지만 결국 그것을 의식적으로 조절하고자 노력하는 방법이고 후자는 의식적으로 모든 것을 통제하며 답을 찾는 방식처럼 보이지만 결국 감정이나 본능, 사회적인 정보에 충실한 방법이다.

후자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의식적으로 찾아낸 가장 우월한 가치란 무엇일까? 

많은 이들이 삶에서 가장 의미 있는 것을 찾겠다며 결국 특정 가치가 줄 느낌을 비교한다. 

자신의 지식, 경험, 사회적인 정보 등을 잘 조합해 가장 큰 기분 좋음과 가장 큰 평안함을 줄 무언가를 찾아내고 그것을 삶에서 가장 의미 있는 것이라고 여기게 된다. 

결국 그들이 추구하게 되는 것은 미래에도 계속해서 유지될 만큼 지속 시간이 길거나 양이 대단히 큰 평안함 혹은 행복함이다. 

사실 이런 방식으로 삶의 방향을 정하는 것은 마치 처음 초콜릿을 먹은 아이가 엄청난 충격에 휩싸여 자신은 앞으로 평생 초콜릿만 먹으면서 살 것이라고 선언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둘 모두 출처도 모를 느낌, 감정에 압도되어 그것에 주도권을 넘겨주고 자신의 삶의 전부를 쏟아붓는 것에서 비슷하다. 

가장 우월한 가치라는 너무나도 비합리적이고 감정적인 목표는 정말 이성과 합리적인 판단의 결과물일까? 

게다가 이러한 목표를 좇는 이들은 목표와 현실의 괴리에서 오는 괴로움을 똑바로 마주하지 않기 위해 목표에서 멀리 떨어진 자신의 삶을 아직 미완성인 것, 아직 가치 없는 것으로 여긴다. 

자신의 삶이 아직 미숙하다고 여기는 것은 목표를 향한 자극이 됨과 동시에 자신이 겪는 괴리와 고통이 당연하다는 위로가 되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은 존재하지도 않을 엄청난 느낌을 좇으며 자신의 삶을 아직 미완성이라며 매도하고 한편으로 안도한다. 

그러나 실패를 통해 이러한 안도를 덮을 만큼의 불쾌함이 쏟아져 나오는 순간, 매도와 불쾌한 느낌이 삶에 대한 평가를 벼랑 끝으로 몰아간다. 

거대한 실패는 지금까지 잘못된 목표를 좇았다는 피드백을 주며 그들에게 유일했던 삶의 목표를 부정한다. 

그 결과, 길의 끝에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희망으로 버텼던 미완성의 삶은 유일한 희망을 잃고 방황하게 될 것이다. 

그에 비해 우리를 이루는 다양한 요소를 이해하고 그들의 요구를 존중하고자 노력하다 보면 삶의 의미, 가치를 발견하고 절대적인 길잡이인 줄 알았던 의식과 감정의 실체를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불안을 특정 감정으로 덧칠해 지우는 것보다는 우리가 지금까지 해온, 생존과 번영 입장에서 삶을 바라보고, 삶의 의미를 되새기며, 의식 안팎을 공부하고, 조율자로서 의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삶을 통제하고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더 나은 절차가 되겠다.  


통제되기 어려운 대상을 잘 통제하고자 공부하고 의사결정을 해 본 경험이 쌓이면 그 대상을 통제할 수 있다는 감각이 형성될 수 있다는 또 다른 근거가 있다. 

천방지축인 삶을 통제하고자 자신만의 판단을 만든다는 점에서 우리(의식)는 삶이라는 전장의 장교이자 지휘관이다. 

좋은 판단을 만들고자 노력하고 직접 판단을 해보며 또 예상치 못한 상황에 노출되고 대처해 본 경험은 삶의 지휘관과 전장의 지휘관 모두에게 자신이 통제하고자 하는 대상을 잘 통제해 낼 수 있을 것이란 감각을 만들어줄 것이다. 

재밌게도 이러한 추측을 지지하는, 직접 판단하고 선택한 경험이 쌓인 고학년 사관생도와 그러한 경험이 부족하고 반대로 수동적인 명령을 따른 경험이 많은 저학년 사관생도, 일반 병사의 대리감이 차이가 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통제감과 밀접한 개념인 대리감을 연구하는 Haggard, P. (2020)는 벨기에 육군 사관학교 교수들과 협력하여 시민, 일반병, 저학년 사관생도, 고학년 사관생도의 대리감을 비교하는 연구를 했다. 대리감은 환경과 자신의 상호작용, 즉 행동의 원인을 자신의 의식으로 돌리는 느낌을 의미한다. 

Haggard는 집단주의와 수직적인 문화를 가진 군대에서 일하는 이들이 명령을 받고 행동하는 일에 익숙해지며 이러한 대리감이 낮아졌을 것이라고 추측했고 이를 증명하고자 연구를 진행했다. 

실험 대상자는 보수를 높이기 위해 자율적으로 다른 실험 참가자에게 전기 충격을 줄지 말지 선택하는 자유 조건과 명령을 통해 다른 실험 참가자에게 전기 충격을 주는 명령조건, 두 가지 조건에 노출되었다. 

두 조건 모두, 버튼을 누르면 전기 충격이 발생함과 동시에 특정 소리가 울렸다. 

이때 보통 대리감이 감소된 피험자는 버튼을 누른 자신의 행동과 그 결과인 소리의 인과 관계를 약화시키고자 소리를 더 늦거나 더 약하게 인지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의지가 외부 환경에 영향을 끼쳤다고 판단할 근거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즉각적이고 눈에 띄는 변화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친구를 장난 삼아 때렸는데 바로 큰 소리를 지르지 않고 한참이 지나서야 그 친구가 약한 비명을 질렀다면 자신이 그 비명의 원인이라고 여기진 않을 것이다. 

따라서 신기하게도 자신이 그 행동의 원인이라는 감각인 대리감이 약화된 사람에게서 보통 행동의 결과를 더 늦거나 약하게 인식하는 모습이 관측된다.

실험 결과, 시민에 비해 저학년 사관생도와 일반 병사는 자유 조건과 명령 조건 모두 소리를 약하게 인지하며 전체적으로 약화된 대리감을 보여줬다. 

하지만 고학년 사관생도는 군인임에도 저학년 사관생도나 일반 병사에 비해 두 조건에서 모두 소리를 강하게 인지했고 다른 방식으로 측정된 대리감도 더 강했다. 

연구자는 이를 고학년 사관생도가 받은 훈련과 그로 인한 경험이 대리감과 책임감 형성에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연구자는 특히 똑같이 군 경험 기간 자체는 상대적으로 긴 편에 속하는 일반 병사와 고학년 사관생도의 차이에 집중했다.

일반 병사는 명령을 받는 훈련을 반복하며 행동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대리감, 책임감을 줄였고 반대로 고학년 사관생도는 명령을 지시하는 훈련을 반복하며 행동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대리감, 책임감을 늘렸을 것이라고 보았다. 

즉 통제되기 어려운 전장을 잘 통제하고자 공부하고 의사결정해 본 경험이 쌓이면 대리감이 형성될 수 있다.


하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이러한 고학년이 받는 훈련은 전장을 더 잘 통제하기 위한 노하우와 더 잘 통제해 낼 수 있다는 장기적인 믿음을 키운다. 

즉 훈련을 통해 익히게 된 것은 전시 상황 통제에 대한 자기 효능감일 수도 있다. 

자기 효능감은 의도한 바를 이루기 위한 자신의 능력에 대한 강한 믿음을 뜻한다(albert bandura. 1977).

그런데 자기 효능감을 키우는 훈련이 결국 대리감의 향상을 불러온 것처럼 보이는 연구 결과와 같이 이러한 자기 효능감은 대리감과 각 구성 요인이 밀접하게 연관된 것으로 여겨진다(Ala Alsaleh. 2023.). 

즉 둘은 서로 적극적으로 영향을 주기 때문에 주로 같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높은 자기 효능감을 가진 사람은 자신이 좋은 결과를 만들어냈을 것이란 기대를 갖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행동의 책임자라는 것을 당당히 인정할 수 있다. 

이러한 대리감은 또한 자율성 그리고 삶에 관한 통제감과도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우리는 외부 압박 없이 순수한 자신의 의지를 발현할 수 있을 때, 자율성을 느낄 수 있고 순수한 자신의 의지가 발현된 결과를 마주할 때, 대리감을 느낄 수 있다. 

이처럼 둘은 많은 구성 요소를 공유하기 때문에 둘이 완벽히 분리되는 상황이 흔치 않다. 

삶이 통제된다는 느낌 역시 다른 요소에 압박을 당하지 않고 자신만의 생각과 행동을 할 수 있을 때, 그리고 마음속에 만든 예측과 그것을 실현하겠다는 의지가 현실 세상에 실제로 구현될 때, 즉 자율성을 느낄 때와 대리감을 느낄 때 모두 느껴질 수 있다. 

때문에 자기 효능감, 대리감, 자율성, 삶에 관한 통제감은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가진 존재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러한 문제는 특정 상황에 대한 뇌의 활성화를 먼저 관측하고 그다음에 해당 활성화가 주는 느낌을 특정 단어로 정의하지 않고 개개인의 주관적인 경험을 먼저 주관적인 단어로 정의하고 그다음에 사실은 비슷할지도 모르는 다양한 주관적인 단어를 객관적인 뇌 활동으로 증명하고자 해서 생긴 일이기도 하다. 

앞으로의 연구를 통해서 그들의 엄격한 구분이 추가적으로 이루어질지도 모르지만, 일단은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를 참고해 그들이 어느 정도 상호 교환 가능한 존재로 여기고자 한다. 

따라서 고학년 사관생도가 의사결정을 준비하고 실행하며 사후 처리하는 일을 반복하며 해당 상황에 대한 자기 효능감과 대리감을 키웠듯, 우리 역시 비슷한 훈련을 통해 선택에 관한 자기 효능감과 자율성, 삶에 관한 통제감을 키울 수 있을 것이다.


사관생도가 받는 훈련의 내용을 참고하면 삶에 관한 통제감을 키울 방법을 더 명확히 정립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연구에서는 훈련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다루진 않았지만 육군 사관학교 커리큘럼을 참고해서 대리감 형성에 도움을 준, 훈련 요소를 추적해 볼 수 있다. 

사관생도는 고학년이 되는 기간 동안 전시 상황을 통제하기 위한 지식을 익히고 실제 명령을 내리며 그 후 상황에 대응하는 연습을 반복하면서 명령을 내리기 위한 역량을 개발하고 자기 효능감과 대리감을 형성해 온 것으로 보인다. 

즉 지식, 명령 경험의 반복, 대처 경험의 반복 그리고 이렇게 쌓인 노력까지 총 네 가지 요소가 상황 통제에 대한 믿음을 형성하는데 도움을 준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통제 믿음, 대리감 형성에 영향을 준 첫 번째 요소는 지식이다. 

지식이 늘어나면 통제를 위한 예측에 활용할 수 있는 정보량이 늘어나게 된다. 

더 많은 변수를 예측할 수 있게 되고 또 실제 상황에 가까운, 정교한 예측을 만들 수 있게 된다. 

이를 반영하듯, 저학년 생도가 상상해서 그린 전시 상황과 고학년 생도가 상상해서 그린 전시 상황을 보면 그 세세함과 현실성에서 차이가 매우 클 것이다. 

또 머릿속에 다양한 예측을 만들고 대처해 본 경험을 통해 여러 가지 예측 시나리오를 형성할 수 있다.

다양한 시나리오가 존재한다면 나중에 실제 상황을 마주했을 때, 처음부터 새롭게 상황을 해석할 필요 없이 기억 속의 시나리오를 불러와 약간의 수정만 하면 되기 때문에 통제에 도움이 되고 결과적으로 통제에 대한 믿음을 형성하는데도 도움이 된다. 

이처럼 지식을 익히는 것은 상황 통제에 필요한 정보를 형성하도록 돕고 통제를 해낼 수 있다는 믿음을 형성하는데 영향을 준다. 

두 번째 요소는 명령 경험의 반복이다. 

실제 상황과 유사하게 연출된 훈련 상황에 들어가 명령을 내려 보는 일을 반복하게 되면 더 많은 변수에 대한 정보를 얻고 자신의 예측을 더 정교하게 다듬을 수 있다. 

그 결과, 상황에 대한 정보 처리가 익숙해지며 노하우를 형성할 수 있게 되고 잘 해낼 수 있다는 믿음이 형성될 수 있다. 

세 번째 요소는 책임과 대응 경험의 반복이다. 장교는 결과를 마주하고 그것에 대응하거나 책임질 의무를 지니기도 한다. 

결과에 대응해 보는 경험을 통해 선택 후에 생기는 일에 대한 정보를 얻고 그에 대응하는 노하우를 만들어 상황에 대한 통제 능력과 그 믿음을 향상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명령으로 인해 자신과 부대, 부대원이 받은 영향을 확인하고 책임을 지는 경험은 행동의 원인을 자신에게 돌리는 대리감 형성에 보다 직접적인 영향력을 주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전체적으로 이론 학습과 훈련, 판단을 내리기 위한 노력을 한 경험이 통제감을 형성하는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인지 부조화 가설이나 공정한 세상 가설의 내용과 같이 우리는 우리가 흘린 땀이 더 좋은 결과, 즉 더 좋은 통제 능력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믿는다. 

이처럼 열심히 공부하고 그 내용을 활용하는 일의 반복은 이러한 노력의 목표를 성공적으로 통제해 낼 수 있을 것이라는 느낌을 만들어내는데 기여한다.   

     

훈련에 포함된 네 가지 요소가 자기 효능감과 대리감을 이끌어냈듯, 자기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기 위한 지식, 의사결정(선택), 대처, 노력의 축적 또한 삶을 잘 이끌어나갈 수 있다는 믿음과 삶을 자신의 의지로 잘 통제하고 있다는 믿음으로 이어질 수 있다. 

훈련 내용을 반영해 통제감을 형성하고자 우리가 할 일을 구체적으로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우선 지식을 익힐 수 있다. 

전장 상황을 통제하고자 여러 지식을 익히는 장교와 같이 우리는 삶을 통제하고자 삶에 대해 공부할 수 있다. 

지금까지 우리가 다뤄온 내용과 같이 삶을 이끄는 의식 안팎의 요소에 관한 공부가 적절할 것이다. 

살면서 생기는 여러 상황과 그 상황에 대한 의식 안팎의 주관적인 정신 경험(감정 등)에 올바르게 대응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정신 경험을 만들거나 조절할 수 있는 존재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선택 경험을 반복하며 통제감을 형성할 수 있다. 

판단 경험을 반복하며 전장의 통제자가 되는 장교와 같이 삶에 자기 의도를 반영하기 위한 선택을 해본 경험이 풍부해져야 삶의 전문가이자 통제자가 될 수 있다. 

익힌 지식을 그저 머리 안에서만 활용할 뿐만이 아니라 직접 여러 계획을 만들고 그중 하나를 선택해 실천하는 일을 반복하게 되면 그 선택과 시간이 쌓여 삶을 자신의 의지로 통제했다는 증거가 늘어난다. 

세 번째로 선택 후 대응, 책임을 반복하며 통제감을 형성할 수 있다. 선택은 때로는 당연히 예상치 못한 결과를 가져온다. 

예상치 못한 결과가 주는 당혹감은 삶을 삼켜버릴 것만 같이 위협적이지만 사실 대부분은 그저 익숙하지 않을 뿐이지 대응할만하다. 

지난 패배를 오히려 기회로 활용해 다음번에 대승을 만들어 내는 전장의 베테랑과 같이 되기 위해 결과를 마주하고 그것에 책임지거나 대응하는 일을 반복하며 그 일에 익숙해져야 한다. 

셀리그먼의 낙관주의와 병행하며 결과가 주는 충격을 줄이면 결과에 더 능숙하게 대응할 수 있게 될 것이고 거리낌 없이 자신을 위한 선택을 이어나갈 수 있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이 모든 과정에서 치열하게 노력했을 때, 그 노력 경험이 통제감 형성에 기여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자신을 공부하고 그것을 활용해 자신을 위한 선택을 하는 일을 반복하는 것이 삶에 관한 통제감을 되찾고 불안을 해소할 방법이 된다.


공부하고 선택하고 책임지는 일의 반복이 집단적이고 수직적인 문화에서도 대리감을 꽃피워낼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말해주는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군대에서 대리감이 성장하는 모습은 그와 유사한 환경인 우리 조상이 살던 환경에서 어떻게 각 개체가 대리감을 형성했었는지를 설명해 준다. 

또한 우리 조상이 대리감을 형성하며 살았다는 것은 그 마음을 이어받은 우리 역시 그렇게 사는 것에 익숙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오래전이나 지금이나 우리는 대리감, 통제감을 형성하며 살아간다. 

물론 현대 환경은 과거에 비해서 인간에게 너무나 큰 자유를 보장하는 것 같다. 

아주 긴 기간, 우리 조상은 권위적이고 자유롭지 않은 사회에 갇혀 살았다. 

이 때문에 대리감, 자율성, 통제감은 어쩌면 전통적이고 본능적인 욕구가 아닌 현대 문화가 만들어낸 적응적인 느낌일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훨씬 오래되고 강력한 본능으로 여겨지는 불안을 해소하기에는 충분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연구 결과에 의하면 대리감, 통제감을 얻기 위해서는 예측하고 선택하며 결과에 책임지는 일이 필요하다.

하지만 권위적이고 자유롭지 못한 과거 문화 속에서는 자신이 직접 예측을 만들고 환경과 상호작용 하기 전에 권위를 가진 상급자 혹은 다수의 의견이 해야 할 행동을 정해줬다. 

때문에 그러한 환경에서 산 조상들 중 대부분은 마치 연구에서 나온 일반 병사나 저학년 사관생도와 같이 오히려 자신의 대리감, 통제감을 낮추고 명령을 따르며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해도 딱히 생존과 번영에는 문제가 없었을 것인데, 왜냐하면 소수의 지도자와 그들이 만든 체계가 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명령을 따르는 이들의 생존을 어느 정도 책임지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우리 조상 중 일부는 아주 긴 기간 생존에 있어서 딱히 대리감이 필요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 그 마음을 그대로 물려받은 우리 역시 대리감 발달이 익숙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그들이 평생을 수동적인 위치에 머물러 있던 것은 아니다. 

마치 계급이 올라갈수록 선택과 책임의 기회가 늘어나며 통제감과 자기 효능감을 형성하는 군인과 같이 우리 조상들도 무리 내에서 어느 정도의 위치가 되거나 혹은 최소한 자신의 아이를 책임질 부모가 되면서 책임을 감당하고자 노력하게 되고 이러한 일이 쌓여 대리감, 통제감이 형성되었을 것이다. 

이처럼 권위주의적인 문화에서 집단생활을 하면서도 그 구성원은 상황에 따라서 자신만의 선택을 하거나 자신의 행동에 책임질 필요가 있었다. 

사실 지금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우리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생애 초기에는 무언가를 제대로 통제할 수 없이 나약하고 때문에 성장할 때까지 타인이 통제하는 보호 환경 아래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성장하고 난 뒤에는 누구나 직접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통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또 때로는 타인의 삶까지 책임지는 경우가 생긴다. 

때문에 집단생활을 하던, 개인 생활을 하던, 수직적이거나 수평적인 문화에서 생활을 하던 어쨌든 어느 순간 우리는 직접 환경과 상호작용하고 대리감, 통제감을 형성해야 할 필요가 있다. 

사람에 따라서 또 상황에 따라서 대리감을 조절할 필요가 있었을 뿐, 우리 삶에서 대리감, 통제감의 존재가 완전히 멀어졌던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통제감, 대리감은 생존과 번영을 위해 과거부터 계속 우리 마음에 존재해 왔을 가능성이 높다.      




불안이 주는 거대한 불쾌감은 그것을 기꺼이 덮어버릴 만큼 큰 쾌 혹은 큰 안정감을 주는 엄청난 목표를 찾도록 만든다.

우리는 그 끈질긴 잔소리에 항복해 결국 엄청난 목표만이 내 삶의 유일한 의미이자 목표가 될 것이라고 착각한다.

하지만 당연히 착각으로 만든 유일한 목표나 의미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결국 불안은 해소되지 않는다. 

우리는 자신이 잘못된 목표와 의미를 설정했기 때문에 불안이 해소되지 않는 것이라는 오해를 갖고 새로운 의미를 찾아 헤매게 된다.

목표를 찾고 폐기하는 반복 속에서 불안은 더욱 커진다.

이런 악순환을 끊기 위해서는 잠시 멈춰 서서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

목표나 의미를 왜 추구했을까?

불안했기 때문이며 목표나 의미가 그 불안을 해소할 행복이나 평안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감정에게 쫓기고 감정을 좇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 감정에 대해서 알아봐야 한다.

왜 불안할까? 

왜 행복이나 평안함이 불안을 잠재울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일까?

더 깊은 질문에 답하고자 우리는 내 안에서 감정을 만들어내는, 의식할 수 없는 존재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감정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감정이 내 안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 아이스크림을 먹고 행복해하는 과정에서 행복이라는 감정을 생산한 주체는 아이스크림이 아니다.

아이스크림의 맛을 행복으로 변환시켜 주는 복잡한 과정이 뇌 안에 존재하지 않다면 아이스크림은 행복이 될 수 없다.

신기하게도 우리는 그 존재가 내 안에 있음을 인지할 수 없지만, 감정은 분명 우리 안에서 만들어진다.

한편 우리가 유일하게 우리 내부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의식이다.

그러나 우리 안에는 우리 내부에 있지만 의식 밖에 있기에 그 정보를 얻을 수 없는 세포 뭉치 혹은 장기가 다수 있다.

예를 들면 배가 꼬르륵 거리는 것이 소화문제인지, 단순히 가스가 생성된 것인지, 배가 고픈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는 것처럼, 우리 의식은 우리 안의 여러 부위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알 수 없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정보, 의식과 소통하지 않는 세포 뭉치들의 목적은 매우 명확하다.

바로 내가 생존하고 기왕이면 번영하는 것이다.

이 목표를 거스르는 이는 없고 있었다면 그 유전자가 지금 우리에게까지 전해지지 못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따라서 뇌 안에 있지만 의식이 소통할 수 없는, 감정을 만들어내는 세포 뭉치 역시 생존과 번영을 목표로 한다.

결국 불안과 평안함, 결핍과 행복은 나를 생존과 번영으로 이끄는 신호였다.      


내 안의 나를 구성하는 모든 이들이 생존과 번영을 신경 쓴다는 것은 그들 모두가 내 삶을 엄청나게 소중하게 여기고 있었다는 뜻이다. 

우리 의식은 그들과 제대로 소통할 기회가 없어서 아이스크림과 같은 밖에 존재하는 무언가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 있었지만 사실 기억력이 나쁜 의식을 제외한 모두는 이미 내 삶이 가치 있다고 여기고 있었다.

두 생식 세포가 만나 그들의 유일한 꿈이 이루어진 그 순간부터 우리 삶은 이미 의미로 가득 차 있다.

이처럼 불안이 생존 신호라는 것을 알고 우리 삶이 이미 의미 있다는 것을 안다면 외부의 의미에 끌려 다닐 필요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따라서 사실 성취와 가치는 삶의 유일한 의미가 아니라 이미 의미 있는 나의 삶을 조금 더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수단이었고 불안은 우리 목을 매어 끌고 다니는 거친 마부가 아니라 조금 성질 급한 조언자였다.

이렇게 우리가 무엇에 영향을 받아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알고 나서야 불안을 해소하고 삶을 더 좋게 이끌어갈 방법에 대해서 얘기해 볼 수 있다.      


구체적으로, 불안의 요구를 만족시켜 주며 살아가고자 두 가지 목표를 가질 수 있다.

우선 다양한 생존 재화를 얻기 위한 노력이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한 가지 방법이 될 것이다.

대부분의 생존 재화를 얻을 수단인 돈을 추구할 뿐만 아니라 우리 마음이 생존 재화라 느끼는 이웃 등, 인류가 생존하고 번영하기 위해 필요했던 다양한 대상을 추구하며 살아가면 될 것이다.

하지만 생존과 번영은 이루기 쉽지 않다.

따라서 온갖 것에 반응하는, 꼼꼼한 불안은 그것을 얻기 위한 과정에서도 나타나 그 과정이 잘 통제되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 한다.

따라서 생존과 번영을 향한 과정의 통제가 또 다른 불안 해소 방법이 된다.

과정, 삶은 두 가지 기준으로 통제되었다고 여겨진다.

첫 번째로 우리는 우리가 예상한 것과 같은 결과를 마주할 때, 삶, 상황을 통제했다고 판단한다. 

그러나 예측 능력의 한계와 변화무쌍한 환경 때문에 예측 실패는 필연적이다.

때문에 예측이 실패했을 때, 그 실패가 삶 전체에 대한 통제 실패로 해석되지 않도록 막을 필요가 있다.

셀리그먼의 낙관주의를 활용해 실패라는 결과를 특정 방향으로 해석하게 되면 실패가 또 다른 부정적인 정보의 생산으로 이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두 번째로 우리는 자신의 의지로 자신의 삶의 방향을 정했을 때, 삶, 상황을 통제했다고 판단한다.

결과와는 별개로 자신을 위한 자신만의 선택을 하는 것은 삶을 자신이 의도한 방향으로 끌고 간다.

삶의 계획을 만드는데 자신만의 의견을 제대로 반영하고 싶다면, 우리가 앞서서 불안과 삶을 이해한 것과 같이 의식 안팎에 존재하는 자신의 의견을 이해하기 위한 공부를 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활용해 자신만의 선택을 하고 그 선택으로 인한 결과를 온전히 책임지고 대응해 보는 경험을 반복하면 된다.

그렇게 쌓인 선택과 시간은 분명 삶을 자신이 원하는 모양에 가까워지도록 만들 것이다.

결국 자신의 삶이 본래 가진 의미를 알고 소중한 삶을 누리기 위해 여러 방법으로 살아가기 위한 힘을 키워나가는 것이 다가올 위험에 대한 경고인 불안을 해소하며 살아가는 방법이 된다.




  

불안해소를 위한 단기 목표 만들기

이제 우리는 불안을 해소하면서 살아가는 방법을 알고 있다.

생존과 번영 재화를 추구하거나 자신만의 선택을 하며 삶의 통제감을 만들어나가며 살면 될 것이다.

구체적인 목표들은 이전 글에서 다뤘듯, 사람마다 상황이나 개성에 맞게 단기 목표, 계획의 형식으로 추구하면 될 것이다.

자유롭게 전략과 목표를 만들면 되지만 단기 목표를 만드는 방법이 익숙하지 않을 수 있으니 그 방법에 대해서 간단하게만 다루고 넘어가고자 한다.

그 구체적인 방법은 꼭 정해진 것은 아니며 단순하게 꼭 고려해야 할 사항들을 정리한 것이기에 아래 내용은 사람마다 다르게 활용할 수 있다.

아주 간단하게 단계별로 설명하고자 한다.

그 단계는 다음과 같다.     


1. 자기 자신 파악하기

2. 전략 수립

3. 구체적이고 단기적인 삶의 목표 만들기

4. 피드백과 다음 목표 만들기

5. 피드백 반영과 순환               


결국 간단히 요약하자면 자신을 파악하고 그에 맞는 단기 목표를 만드는 것을 반복하면 된다.

각 단계를 조금 더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1. 자기 자신 파악하기

먼저 자신이 느끼는 불안과 통제감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모을 수 있다.

우리 모두는 처한 상황이 다르고 발달한 뇌의 모양이 달라 주관적인 경험의 내용도 다르다.

따라서 사람마다 알맞은 방법은 모두 다르기에 우선은 자신을 알아야 한다.

나 자신에 대한 정보들은 결국 내가 상황마다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알려준다.

사람마다 특정 사건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 다르고 그 감정을 해석하는 방식도 달라 그에 영향을 받는 삶의 목표 역시 천차만별이다.

불안 역시 개인차가 있다.

불안에 대한 자신의 성향을 파악하기 위해서 자신의 과거 경험을 돌아보거나 심리학 연구나 심리 검사를 활용할 수 있다.

내가 어떤 불안을 해결하지 못하고는 잠을 잘 수 없는지, 어떤 불안을 높은 빈도로 느끼는지, 어떤 것을 추구했을 때 삶에 대한 통제감을 느끼는지 등을 파악해서 미래의 불안에 대응하기 위한 정보를 수집할 수 있다.

아마 먼저 기억 회상을 통해 해당 감정을 느꼈던 관련 경험을 찾은 다음, 자신의 성향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 해당 경험과 관련된 심리학 연구를 공부하거나 심리 검사를 시도하게 될 것이다.

연구와 검사를 활용하게 되면 타인의 데이터와 자신을 비교하며 자신의 특성이 상대적으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 파악할 수 있다.

만약 너무 극단 값의 특성들이 비적응적인 행동까지 부른다면 삶의 목표를 만들어 나가기 전에 일단 치료를 시도할 수도 있다.

이처럼, 구체적인 단기 목표를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불안과 불안을 해소할 통제감, 생존 재화와 관련된 다양한 정보를 정리하며 자신을 파악해야 한다.       


2. 전략 수립

자신에 대해서 파악했다면 다음으로는 그것에 대응할 전략을 고민한다.

이전에 파악했던 자신의 불안과 통제감, 상황에 대한 정보를 엮어보며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대략적인 방법을 고민해 본다.     

예를 들어 기억 회상과 공부, 검사를 통해 개인적으로 다음과 같은 대략적인 불안 해소 목표를 만들었다.


나는 초등학교 때의 경험으로 만족할 만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불안과 강박에 크게 시달리고 있다.

실제 심리학 검사 상에서도 강박 점수가 높게 나온다.

그 끔찍한 불안과 강박은 나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동시에 쉽게 벗어날 수 없었다.

때문에 그 불안과 강박을 어떻게든 극복해야 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다.

지금까지 삶에 관한 불안과 강박을 극복하고자 사용한 방법은 사람에 관한 공부를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실제로도 유효했으며 재미 또한 있었다.

따라서 아마 공부를 통해 살아가는 법에 대한 만족할 만한 답이 나와야 삶이 통제된다고 느끼고 만성적인 불안을 해소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나이와 상황에 맞게 주어진 일을 하느라 그러한 공부에 투자할 수 있는 시간이 부족했다.

따라서 아직은 여유가 있는 이 시기에 나를 계속해서 괴롭히는 삶에 관한 불안을 해소해 보고자 진지하게 고민해 보고 공부해 볼 시간을 갖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이 나왔다.     


3. 구체적이고 단기적인 삶의 목표 만들기

불안 해소를 위한 나만의 전략, 가설을 검증하고자 그것을 단기적으로 성취할 수 있는 구체적인 목표로 만든다.

이때는 자신이 갖고 있는 능력, 자격과 처한 환경을 고려해서 현실성 있는 목표를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너무 장기적이지 않은 선에서 자신의 삶을 계획한다.

예를 들어 앞선 단계에서 좋은 삶을 살아야 한다는 강박과 불안이 크기에 공부를 통해 이러한 불안을 해소해 줄 좋은 삶에 대한 답을 찾을 필요가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 구체적인 방법으로 최소 3개월 최대 1년 동안, 온라인 환경에 삶의 목표에 대한 글을 연재하며 생각을 정리하고자 했다.

또한 진지하게 해당 활동에 임할 동기를 형성하고 추후 이번 경험을 활용할 수 있도록 최종적으로는 반년에서 일 년 사이에 출판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4. 피드백과 다음 목표 만들기

단기적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행동을 하면서 계획이나 예측에 없던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막상 해보니 지금 따르고 있는 계획보다 좋은 방법이 보여서 계획을 수정해 나갈 수도 있다.

혹은 막상 해보니 생각보다 그 일이 더 재미있어서 다음 목표도 비슷한 목표로 만들고 싶어질 수 있다.

이렇듯 하나의 단기 목표를 향한 계획을 이행하면서도 많은 변화가 생기고 많은 배움이 있다.

그러한 것들을 반영해서 이다음으로 추구할 구체적인 목표를 만들어야 한다.

단기 목표를 실천하는 중에는 이러한 피드백을 기록하고 해당 목표가 끝나고 다음 목표를 찾을 때 이를 반영하면 된다.

현재 단기 목표가 끝난 후에 다시 전략 수립이나 단기 목표 만들기 단계로 돌아가서 새롭게 알아낸 정보를 반영해 이다음에 추구할 목표를 고민해 보면 된다.     

예를 들어 개인적으로 글을 쓰며 삶의 목표와 관련된 통계 자료가 더 풍부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당 통계 자료를 모아보는 것을 다음 목표로서 고민하고 있다.

혹은 지금 쓰는 글을 책으로 옮기는 방법에 대해서 조금 더 다양한 고민을 하고 있다.

글을 쓰는 과정이 생각보다 즐거웠고, 해당 글에 대한 애착 또한 생각보다 커졌다.

그래서 기획 출판을 하고자 한동안 투고를 하는 것을 다음 목표로서 고민하고 있다.

그 과정은 앞으로 다른 글을 써나가는 것에 있어서 도움이 될 것이고 또한 출판사의 관리를 받아 아끼는 글이 더욱 발전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5. 다음 목표 설정 및 전체 과정의 순환

피드백한 내용을 반영한 다음 목표를 추구한다.

이때 불안 해소가 아닌 다른 측면의 목표를 수립하고 추구해도 좋다.

자신의 상황이나 감정을 살피고 우선도에 따라서 행복추구나 인간관계 측면에서의 삶의 목표를 추구해도 좋다.

혹은 한 번에 여러 목표를 추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목표를 구상하는 시간이 약간 길어지거나 휴식이 필요한 경우 잠시 여유를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각 단계의 순환을 반복하며 삶을 채워나가고 불안을 해소해 나가면 된다.          




불안 해소는 이미 의미 있는 삶을 더 좋은 방향으로 통제하는 것이지, 텅 빈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다.

앞서 다뤘듯 우리는 다양한 이유로 이러한 사실을 잊고 삶의 의미에 목 매인다.

그리고 밖에는 존재하지 않는 의미를 찾다가 실패하고 불안이 더 커지는 악순환에 갇힌다.

삶을 그 자체로 만족하지 못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이유는 우리가 무리 동물로서 특별함을 추구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름, 특별함은 무리 동물에게 있어서 그 자체로 생존과 번영의 수단이 되기에 우리는 특별함을 강하게 추구한다.

이러한 특별함에 대한 욕구는 자연스럽고 또 마땅히 응용해야 하는 정신 에너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특별해지기 위해 기존의 삶의 의미를 무시하며 배수의 진을 치는 것은 장려하기 어렵다.

누군가는 특별함을 오해하고 삶에는 오직 하나의 특별함만이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그저 살아있는 것 자체로는 의미가 없고 그 이상을 이뤄야지만 삶의 의미가 생긴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특별함을 추구하는 것과 살아 있음이 특별하고 소중하다는 것은 별개의 것으로 서로 양립할 수 있다.

우리는 삶이 주어진 것에 감사함을 느끼며 동시에 새로운 특별함을 얻고자 노력할 수 있다.

추가적인 특별함의 성취는 이미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는 삶을 더 풍부하게 꾸며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누군가는 특별함을 더 절박하게 추구하고자 자신의 생명의 가치를 지워버린다.

그러나 배수의 진이나 절박함이 삶에 더 큰 에너지를 줄 것이라는 믿음은 잘못되었다.

재가치에 특별함이라는 조건부를 거는 방식은 만연한 불안, 긴장, 좌절 위험을 만들며 때문에 딱히 특별함을 얻기에 더 유리한 방법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이미 있던 삶의 의미를 지워버리는 배수의 진은 자신을 벼랑 끝으로 몰고 끊임없이 채찍질하도록 만든다.

계속해서 불안이 발생하고 그것을 장작 삼아 계속 긴장 상태에 돌입하게 된다.

불안, 긴장의 과한 활성화는 계속해서 교감 신경을 활성하고 이는 수면, 소화, 휴식의 질의 하락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장기적으로 봤을 때, 끊임없는 채찍질은 비축해 둔 에너지를 모두 태워버리고 정작 가장 중요한 순간에 전력을 내는 것을 방해하며 우리가 제대로 된 효율을 내는 것을 방해한다.

특별함을 이루기 위한 목표 대부분이 장기 목표이기 때문에 단기간에 비축해 둔 에너지를 모두 태우는 배수의 진은 더욱 알맞지 않다.

또 앞서서 길게 다뤄왔듯, 특별함의 성취 여부로 자신의 삶 전체에 대해 판단하는 위험한 집중투자는 실패가 주는 충격을 크게 늘리고 우리가 쉽게 좌절하도록 만든다.

결국 이 때문에 절박함, 배수의 진은 한 번의 시도에 큰 에너지를 줄 순 있어도 전체적인 시도 횟수에는 악영향을 줄 수 있다.

때문에 딱히 더 유리하지도 않고 더 나아가 장기적으로 악영향을 주기 때문에 이 방법을 추구할 이유는 없다.

삶은 그것을 가진 이에겐 무엇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우리는 그 위에 타인과 다름이라는 특별함을 새롭게 쌓으며 삶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줄 수 있다.


삶을 누리는 것 자체가 의미 있고 불안은 그 방법에 대한 조언자 중 한 명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모든 게 좀 다르게 보인다.

만끽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여러 가지 경험을 할 수 있는 삶은 마치 온갖 경험을 할 수 있는 놀이공원과 비슷하다.

각종 경험은 우위를 따지기 어렵고 때문에 무엇부터 만끽해야 할지 고민이 되겠지만, 다행히도 우리에겐 자기주장이 강한 동행자가 있다.

행복, 불안 등 우리를 특정 경험으로 이끄는 감정들은 자주 떼를 써서 가끔 성가시지만 어쨌든 우리가 삶을 만끽할 수 있도록 돕고자 한다.

표현이 서툴지만 언제까지나 우리를 위하고 있다.

감정은 마치 우리의 기분을 풀어주겠다며 놀이공원에서 이것저것 해보자고 떼쓰는 아이와 비슷할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살아가는 과정에서 그렇게까지 두려움을 느낄 필요는 없다.

귀여운 손을 꽉 잡고 있는 힘껏 삶을 만끽하면 될 것이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해소하고자 생존과 번영을 위한 대비를 하고 삶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끄는 것 외에도 살면서 할 일이 많다.

그중 하나는 우리에게 좋은 감정을 주는 것들을 추구하는 것이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자 시간을 쓰고, 좋아하는 풍경을 보기 위해 시간을 쓰며 멋진 연인과 시간을 쓴다.

이것들은 일반적으로 미래에 대한 불안의 눈초리를 가리기에는 조금 빈약한 만족감을 준다.

하지만 그럼에도 추구하는 것은 멈출 수 없는,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것들이다.

이러한 행복은 어떻게 추구하면 되는 것일까?

다음에는 이러한 행복추구 측면에서의 삶의 목표를 다뤄보겠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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