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팔색 눈이 이끄는 길
뮤뮤는 박 씨를 품에 안았다. 첫 번째 단서를 찾았다는 기쁨과, 욕심 많은 도깨비들의 존재에 대한 경계심이 동시에 밀려왔다. 이제 뮤뮤의 여정은 단순한 모험이 아니었다. 7가지 물건을 찾는 길은, 어쩌면 이 도깨비들과의 싸움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뮤뮤는 품에 안긴 박 씨를 다시금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희미하게 빛나는 박꽃 문양, 꿈틀거리는 실핏줄 같은 느낌. 그것은 단순한 씨앗이 아니었다. 월영님이 말씀하셨던 '박꽃'은 바로 이 박 씨, 피어나지 않은 박꽃의 생명력을 응축한 본질이었다. 박 씨를 손에 쥐자 따뜻한 온기와 함께 은은한 꽃향기가 풍겨오는 듯했다.
어둠 속에 홀로 남겨진 듯했던 뮤뮤와 몽몽이의 시야에, 신비로운 오팔색 눈의 고양이가 다시 나타났다. 고양이는 도깨비들이 사라진 어둠 속을 잠시 응시하더니, 뮤뮤를 바라보며 나지막이 야옹, 하고 울었다. 그 울음소리는 마치 "이제 갈 시간이다"라고 이끄는 듯했다.
"고양이가... 우리를 어딘가로 데려가려는 것 같아, 몽몽아."
몽몽이도 뮤뮤의 어깨에서 고양이를 유심히 바라봤다. 고양이는 몸을 돌려 미술관 야외 정원을 벗어나 도시의 복잡한 거리로 나섰다. 뮤뮤와 몽몽이는 방금 전의 싸움으로 지친 몸을 이끌고 고양이의 뒤를 묵묵히 따랐다. 월영 여신이 준 특별한 빛 덕분에 사람들은 뮤뮤를 크게 의식하지 않았다. 하지만 뮤뮤는 여전히 낯선 도시의 모습에 어색함을 느꼈다.
고양이는 복잡한 거리를 능숙하게 헤치고 낡은 골목길 어귀에 섰다. 그리고 언뜻 보기에는 평범하고 낡은 건물 앞에서 멈춰 섰다. 가이드북의 그림과 정확히 일치하는 건물, 그리고 희미하게 훈민정음으로 '쉼터'라는 글자가 새겨진 간판을 뮤뮤는 발견했다.
뮤뮤가 건물 앞으로 다가서자, 건물 주변에서 따뜻하면서도 알 수 없는 기운이 흘러나왔다. 마치 뮤뮤를 부르는 듯한 친숙한 기운이었다. 고양이는 건물의 문을 한번 쳐다보더니, 뮤뮤를 돌아보며 야옹, 하고 마지막으로 울고는 문틈 사이로 쏙 들어가 버렸다. 뮤뮤는 고양이가 자신을 여기까지 안전하게 데려다주었음을 깨달았다. 뮤뮤는 몽몽이와 함께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문이 열리자, 바깥세상과는 확연히 다른 아늑한 공기가 뮤뮤를 감쌌다. 내부는 겉모습과 달리 깨끗하고 정갈했다. 은은한 나무 향기가 코끝을 스쳤고, 따뜻한 촛불 같은 빛이 실내를 부드럽게 비추고 있었다. 벽에는 낯선 듯 익숙한 문양의 조각들이 걸려 있었고, 한쪽 구석에는 낯선 악기가 조용히 놓여 있었다. 작은 창밖으로는 희미하게 별들이 반짝이는 듯했으나, 바깥 도시의 소음은 거짓말처럼 들리지 않았다. 마치 시간과 공간이 멈춘 듯한, 마법 같은 공간이었다. 곳곳에 놓인 화분에서는 화연의 꽃들과 비슷한, 신비로운 색깔의 꽃들이 은은한 향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 아름다운 꽃들을 보자, 뮤뮤는 가슴 한편에 고이 간직했던 화연의 따뜻한 풍경이 눈앞에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꽃잎에 맺힌 영롱한 이슬, 친구들과 함께 웃던 푸른 초원, 그리고 무지개 빛깔의 햇살까지... 그리움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이곳은 인간의 눈에는 그저 낡은 건물로 보일 뿐이지만, 뮤뮤와 같은 특별한 존재들에게만 모습을 드러내는, 완벽한 안식처였다.
"어서 와, 뮤뮤."
따뜻한 목소리와 함께 푸근한 인상의 아주머니가 뮤뮤를 맞이했다. 그녀는 검은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묶고 있었지만, 몇 가닥 흘러내린 머리칼은 은은한 빛을 띠는 듯했다. 잡티 하나 없는 하얀 피부는 세월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고, 깊은 눈매는 친절했지만, 그 안에는 맑은 호수처럼 깊이를 알 수 없는 지혜와 오랜 세월의 흔적이 담겨 있었다. 단아한 한복 치마를 입고 있었지만, 그 옷감은 마치 새벽이슬을 머금은 듯 영롱하게 반짝였다. 뮤뮤는 그 눈빛에서 왠지 모를 편안함을 느꼈다.
"안녕하세요?" 뮤뮤가 어색하게 인사를 건넸다.
아주머니는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어서 와, 뮤뮤. 너를 기다리고 있었단다. 언젠가 화연의 요정이 우리 가게에 올 거란 걸 알고 있었지. 나도 몇 백 년 전에 화연에서 내려와서 여기에 터를 잡고 있단다. 그래서 이 아름다운 한국의 역사를 다 보았지."
"정말... 이세요? 어떻게...?"
뮤뮤의 끊어지는 질문에 아주머니는 따뜻한 눈빛으로 뮤뮤를 바라보며 손짓했다.
그때였다. 문틈으로 쏙 들어갔던 고양이가 아주머니의 발치로 다가와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 아주머니는 고양이를 내려다보며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후훗, 그래. 이제야 왔구나."
아주머니의 말에 뮤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고양이가 아주머니와 미리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니! 뮤뮤는 고양이가 자신을 이곳까지 인도한 이유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긴 이야기는 천천히 나누도록 하자. 먼 길을 왔으니 우선 따뜻한 차와 식사 내어 줄 테니 한숨 돌리렴." 설화 아주머니는 뮤뮤의 피곤한 눈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리고 서두르지 않아도 된단다. 네가 이 낯선 세상에 제대로 적응할 수 있도록, 며칠 머무르며 이곳에 대한 정보를 알려줄게. 그래야 더 안전하게 다음 여정을 시작할 수 있을 테니."
아주머니의 배려에 뮤뮤는 울컥하는 마음을 애써 감추며 우선 설화 아주머니가 내미는 따뜻한 차를 받아 들었다. 낯선 세상에서 만난 동족의 존재는 뮤뮤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뮤뮤는 마음속으로 아주머니의 이름을 궁금해했다.
"뮤뮤야, 내 이름은 설화란다."
마치 뮤뮤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아주머니는 환한 미소와 함께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뮤뮤는 설화 아주머니의 이름에서 느껴지는 포근함과 신비로움에 또 한 번 놀랐다.
"겉모습은 젊지만, 나이는 몇 살이더라~" 설화 아주머니는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뮤뮤는 설화 아주머니의 말에 빙긋 웃었다. 낯선 지구에서 처음 만난 진정한 동족이자 조력자, 설화 아주머니의 존재는 뮤뮤의 여정에 큰 힘이 될 것임을 직감했다.
뮤뮤가 식사를 마치자, 설화 아주머니는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뮤뮤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뮤뮤의 얼굴에는 피곤함과 함께 아직 지워지지 않은 긴장과 흥분이 역력했다.
"뮤뮤야, 무슨 일이 있었니? 표정이 어제와는 다르구나. 미술관에서 있었던 일이 평범한 만남은 아니었나 보구나."
설화 아주머니의 다정한 물음에 뮤뮤는 그제야 어제 겪었던 모든 일을 쏟아냈다. 앤디 워홀 그림 앞에서 신비로운 고양이를 만난 일, 고양이가 이끈 화단에서 박 씨를 발견한 일, 그리고... 도깨비들이 나타나 박 씨를 빼앗으려 했던 일과 붓으로 박꽃을 피워낸 이야기까지, 숨 막히는 순간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이야기했다.
설화 아주머니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그녀는 뮤뮤의 이야기를 조용히 듣다가, 뮤뮤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걱정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도깨비들이라... 네가 벌써 그런 존재들과 마주쳤구나. 다치지는 않았니?"
뮤뮤는 고개를 젓고 활짝 웃었다. "네! 몽몽이도 도와주고, 제 붓도 빛을 냈어요! 박꽃 문양을 그리니까 도깨비들이 사라졌어요!"
뮤뮤의 씩씩한 대답에 설화 아주머니는 안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빛에는 뮤뮤를 대견하게 여기는 따뜻함과, 앞으로의 여정에 대한 깊은 걱정이 동시에 담겨 있었다.
"그래... 네가 가진 붓과 박꽃이 너를 지켜주었구나. 하지만 항상 조심해야 한다. 그들은 네가 가진 물건의 힘을 호시탐탐 노릴 테니까. 특히... 그 복주머니도 말이야."
설화 아주머니의 시선이 뮤뮤의 허리춤에 달린 아기자기한 자수 무늬의 작은 주머니에 닿았다. 뮤뮤가 화연에 있을 때부터 항상 가지고 다니던, 겉보기에는 평범한 복주머니였다.
"뮤뮤야, 그 복주머니는 언제부터 가지고 다녔니? 아주 오래된 물건 같구나."
설화 아주머니의 질문에 뮤뮤는 자신의 허리춤에 달린 복주머니를 내려다보았다. "아, 이건 화연에 있을 때부터 항상 가지고 다니던 거예요. 안에 이것저것 넣어 다니는데, 왠지 모르게 아무리 넣어도 공간이 남더라고요!"
뮤뮤의 말에 설화 아주머니는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훗, 그건 그저 평범한 복주머니가 아니란다. 화연의 요정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특별한 마법을 담아 만든 것이지. 겉보기에는 작지만,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담을 수 있고, 필요할 때 원하는 것을 꺼낼 수 있는 신비로운 주머니란다. 너는 아직 그 진정한 힘을 다 알지 못하는구나."
설화 아주머니는 복주머니를 살짝 만져주었다. 그러자 복주머니에서 은은한 빛이 감돌더니, 뮤뮤의 마음속에 희미하게 복주머니의 사용법과 그 안에 담긴 무궁무진한 공간의 느낌이 떠올랐다.
"와! 정말요? 제가 몰랐던 힘이 있었네요!"
뮤뮤는 놀라움에 눈을 반짝였다. 이제 자신의 여정에 또 하나의 든든한 조력자가 생긴 것이다. 설화 아주머니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 뮤뮤 이제 피곤할 테니 위층에서 씻고 잠자리를 마련해 두었으니 푹 쉬렴."
뮤뮤는 설화 아주머니에게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전하고, 몽몽이를 안고 계단을 올랐다. 따뜻한 물로 피로를 풀고 포근한 이불에 몸을 뉘었다. 낯선 지구에서의 첫날, 수많은 일들을 겪었지만, 이제 뮤뮤는 혼자가 아니었다. 몽몽이와 설화 아주머니, 그리고 가이드북과 복주머니까지. 새로운 힘과 든든한 조력자들과 함께, 내일부터 시작될 다음 여정에 대한 기대감과 함께 뮤뮤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