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을 좋아하는 이유
주변 친구들이나 가족들에게 과학 이야기를 하면 이상야릇한 눈빛을 보낸다. 이해할 수 없는 언어를 내뱉는 사람을 이상하게 쳐다보는 그 눈빛.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이 된 기분을 가장 또렷이 느낄 수 있는 순간이다.
그래도 난 과학을 좋아한다. 발상의 전환을 지켜보면서 세상이 뒤집히는 듯한 아찔함은 포기할 수 없는 즐거움이다. 하지만 그런 이유만으로 과학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과학은 오만방자하면서도 겸손한 학문이다. 자연의 법칙과 설계를 알아내겠다는 목적은 인간의 능력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했다는 인상을 준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강력한 힘을 가진 학문이 될 수 있었던 건 한편으로는 겸손한 학문 이어서다. 법칙을 발표하면서도 늘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하는 자세, 과학의 이론은 진리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자세, 반증이 쌓이면 언제라도 포기할 수 있음을 내제하고 있는 학문이라는 데서 온다. 과학을 공부하고 있다 보면 고집을 피우면서 내 생각이 옳다고 말하는 자세가 얼마나 부끄러운 행위인지 깨닫게 된다. 지금의 내 생각을 내 경험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이론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새로운 경험을 겪거나 타인의 경험을 듣게 되었을 때 본래 가지고 있는 생각이 새로운 것들을 설명할 수 없다면 과감히 포기하고 새로 생각하는 모습은 인간이 성숙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자세라고 믿는다. 적어도 나의 세상과 상대방의 세상은 다른 물리계에 존재하고 서로를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이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는 자세는 인간으로서 사회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모두가 필요한 기본이다. 과학을 통해 삶의 자세를 배울 수 있다.
사람들은 과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에 대해 상상하지 못하고 딱딱하게 현실만을 이야기한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건 그 사람들이 상상에서 꼭 필요한 인문학이나 예술이 그 사람들 세상에 부족해서 상상으로 발전하지 못하기 때문이지 과학이 상상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게 아니다.
과학은 상상이 망상이 되지 않기 위해 도움을 준다. 상상이 현실에서 실현 가능하거나 적어도 사람들에게 그럴듯하게 들리게 하기 위해서는 과학을 무시하기는 어렵다. 과학이 토대가 되지 않으면 본인의 머릿속 세상에만 존재할 수 있는 망상이 되기 쉽다.
물론 과학만이 인생에 교훈을 주거나 인간을 발전시키는 상상력을 부여해준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모든 학문을 공부하다 보면 각자의 교훈과 상상을 이끌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과학은 자연을 다루는 학문이라서 세상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아이디어를 제시해준다.
더해서 인간을 자연의 일부분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관점을 제시해준다. 학문을 공부하거나 살아가다 보면 인간 중심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런 면에서 과학은 적어도 살아가면서 바라보지 않는 관점을 제시해준다.
그래서 과학은 관심 가질 법하다.
※ 추가적인 이야기
- 과학을 알아야 하는 이유 -
현대사회에서 과학은 너무 큰 힘을 얻어서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아져 버렸다. 하지만 과학을 좋아하고 이해하는 사람은 세상에 미치는 영향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다. 그래서 소위 사기꾼이 활동하기 좋은 상황이다. 특히 미용이나 식품에 과학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이득을 취하는 사람을 찾는 건 너무 쉬워서 인터넷에 3분만 검색해도 찾을 수 있다. 물론 과학을 좋아하고 대중서를 읽는다고 사회에 나오는 제품을 모두 이해하거나 속임수를 피할 수는 없다. 하지만 많은 국민들이 과학을 이해하고 있다는 건 일종의 안전망을 구축하는 일이다. 함부로 과학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속일 수 없는 분위기가 형성될 것이다.
적어도 대왕 카스텔라가 한순간에 사람들의 외면을 받아 자영업자들이 망하게 되거나 MSG가 이유 없이 미움받을 일은 없을 것이다.
과학자들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해 판사들이 가습기 살균제에 대한 보고서를 오해해 형벌을 잘 못 내리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과학은 인간이 부여하는 의미나 가치가 포함되어 있지 않는 학문이다. 인간의 의지나 가치는 인문학에서 다루는 영역이지 과학이 다루는 영역이 아니다. 지동설이 인간이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게 아닌 것처럼 모든 과학적 지식은 사실에 근접하기 위해 노력한 정보에 불과하지 어떤 가치를 부여해 사회문제에 선택을 내리는 게 아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과학자들이 내린 결론이 어떤 선택을 강요한다고 생각하고 실험 결과를 반대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낙태 문제를 과학자나 의사가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과학자나 의사가 제공해줄 수 있는 건 임신한 지 얼마나 되었는지에 따라 태아가 어떤 모습을 띄고 있는지 뿐이다. 그 모습에 가치를 부여하고 판단을 내리는 건 사람들의 인문학적 상상에 가깝다. 의사들 중 낙태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결국 낙태를 했을 때 태아의 모습을 보고 스스로 가치 판단하는 것이지 과학적 지식에 정답이 있는 게 아니다. 낙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회적으로 고려해야 하는 다양한 가치를 서로 합의하여 결론을 내는 것이다. 과학은 가치가 현실에서 이루어지기 위해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다.
또 다른 예를 보면 인간과 동물 간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과정에서의 다툼을 들 수 있다.
인간이 아닌 동물이 고통을 느낀다는 과학적 증거들은 시간이 지나갈수록 쌓이고 있다. 누군가는 이런 과학적 지식이 당연히 다른 동물들을 학대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 그 자체라고 말한다. 하지만 과학적 지식 그 어디에도 고통이 인간이 다른 존재에게 해를 가하지 말아야 하는 기준이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건 인류의 역사를 통해 사람들끼리 어느 정도 합의된 기준인 것이다. 물론 기준에 대해 제대로 합의가 된 적이 없어서 다투고 있는 것이다.
사회적 합의가 그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가 된 요즘, 과학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잘 이해하고 있어야 조금이라도 더 타당한 과정과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