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욕을 숨긴다고 해결될까? 차라리 자기결정권을 존중하자

세 번째 마음 : 성욕

by 세미한 소리

미투, 몰카, 데이트 폭력, 성폭력과 같은 성 관련 범죄가 끊이지 않고 일어나는 것을 보면, 교황 대그레고리오 1세가 '성욕'을 불행과 죄를 만드는 7가지 마음 중 하나로 제시한 것에 공감하게 된다. 나 자신의 성욕이 불편해지고, 타인의 성욕이 두려워져서, 성욕 자체를 피하거나 없애야 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그러나 성욕을 없앨 수는 없지 않은가? 모든 사람에게서 성욕이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 인류는 더 이상 존속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아무리 성욕이 불편하고 두려워도 함께 할 수밖에 없다.


성욕은 마치 불과 같다. 인류 초기 불은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불은 들짐승의 공격과 추위로부터 보호해주었고, 뿐만 아니라 불을 이용해 음식, 농기구, 무기 등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불은 인류 문명이 만들어지는 일에 중요한 역할을 했고, 이에 그리스 사람들은 불이 신들만 사용하던 것인데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선물로 가져다준 귀한 것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소중한 불이 통제를 벗어날 때 두려운 존재가 된다. 산불과 화재를 생각해보자. 안에 있는 생명을 태워버릴 뿐만 아니라, 쉽게 통제하거나 끌 수도 없다. 바로 성욕이 그렇지 않은가? 인간에게 필요하지만, 잘 대처하지 못하면 우리를 압도하고 폭력적으로 변한다. 따라서 관건은 건강한 태도이다. 불을 조심히 다루며 사용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도 성에 대한 건강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



자신의 성욕을 인정하자!


프로이트가 활동한 1900년 전후는 가장 보수적인 시대로 평가받는 빅토리아 시대였는데, 역설적으로 역사상 성매매가 가장 많이 행해진 시대이기도 하다. 그만큼 성에 대한 이중적인 태도가 만연해 있었고, 그것은 여성들에게서 더 두드러졌다. 왜냐하면 당시 보수적인 사회가 여성들에게 정숙함을 강요함으로써 성을 억압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렇게 억압된 성이 심리적 히스테리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실제로 그와 같은 심리적 히스테리로 아파하는 많은 환자를 진찰하게 되었고, 그를 통해서 무의식과 정신분석을 발전시켜 나갔다. 오늘날 프로이트의 이론이 성에 너무 집착한다고 지적을 받곤 하는데, 억압된 성으로 심리적 히스테리 환자가 넘쳐나는 당시 시대 상황과 함께 생각해보면 프로이트가 성에 집착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따라서 우리는 프로이트라는 개인이 성에 관심이 많았다는 오해를 하기보다는, 빅토리아 시대에 성에 대한 억압과 이중적인 태도가 만연했었고, 그것이 많은 심리적 문제를 일으켰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행히 우리는 프로이트와 동시대 작가였던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속에서 빅토리아 시대의 억압되고 이중적인 성생활에 대한 단면을 볼 수 있다. 정숙함을 요구받는 귀부인들은 몇 곁의 옷과 모자, 장갑으로 자신의 살뿐만 아니라 숨겨진 성욕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지만, 밤이 깊어지고 주변이 어두워지면, 몰래 살과 성욕을 드러내고 애인과 밀애를 나눈다. 시대정신과 신념, 명예와 예의를 말하는 젠틀한 신사들이 마치 발정 난 짐승처럼 가정에서는 가정부와 술집에서는 일하는 여성과 길거리나 어디서든 만나는 이들에게 추파를 던지며 자신의 욕정을 해소하고자 한다.


유독 빅토리아 시대에 성욕이 사람들에게 강하게 작용했다는 이상한 논리를 펼치지 않는다면, 성을 억압하고 성에 대한 이중적인 태도를 갖는 것이 성에 대한 많은 문제들을 만들어 냈다는 나름의 결론을 얻을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성욕에 대해 가장 먼저 가져야 할 태도는 자신의 성욕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성은 생명력을 가진 소중한 힘으로, 사람이 성욕을 느끼는 것은 부끄럽고 숨겨야 할 부분이 아니다. 마치 나무나 식물이 빛을 보지 못하면 시드는 것처럼, 오히려 성욕을 감추고 숨길 때 시들고 문제가 생긴다.


기독교 전통에서 의인은 죄를 짓지 않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죄에 대해 더 많이 그리고 더 슬피 우는 사람이다. 그래서 자신을 의인이라고 착각하는 죄인과 자신을 죄인이라고 여기는 의인이 있다고 한다. 성욕에 대해서도 적용할 수 있다. 건강한 성을 지닌 사람은 성을 숨기고 성욕이 없다고 착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성욕을 인정하고 그를 조심히 잘 다루는 사람이다.



성욕의 뒷면에는 사랑이 있다.


그럼에도 내가 성욕을 느낀다고 자신 있게 인정하고 대놓고 말하기에는 괜히 부끄럽다. 은밀히 숨어서 해야 하는 것 같다고 할까? 그럴 때에는 성욕이라는 동전을 뒤집어서 내놓자. 그러면 성욕의 뒷면에 있는 사랑이 나타난다.


성경에서 예수님은 제자인 베드로에게 자신을 사랑하냐고 물어보신다. 그때 사용된 단어는 “ἁγαπάω 아가파오”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아가페와 같은 어원이다. 이 물음에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답을 하는데, 그때 사용한 단어는 “Φιλἐω 필레오”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여기에 에로스를 덧붙여서, 에로스는 육체적 사랑, 필레오는 인간적이지만 이지적인 사랑, 마지막으로 아가페는 신적인 사랑이라고 구분 지어 이해했다. 그럴듯하게 들리고, 육체적 사랑에서 우리를 조금 떨어지게 만드는 것 같아서 안심이 되기도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자신을 사랑하냐고 총 3번 물으셨는데, 마지막 세 번째에는 베드로가 사용했던 “Φιλἐω 필레오”라는 단어로 물어보셨다. 이처럼 필레오와 아가페가 서로 구분되어 떨어져 있지 않다. 인간적인 사랑이 따로 있고, 신적인 사랑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에로스도 마찬가지이다. 육체적인 사랑은 저 차원의 사랑이고 고차원적인 사랑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 안에 에로스, 필레오, 아가페 모두 조화롭게 하나 되어 있다.


우리는 흔히 사랑은 아름답고 예쁘지만 성욕은 무섭고 불편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성과 사랑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성은 사랑에서 나온 자연스러운 우리 마음의 일부이고, 성을 통해서 사랑은 활력과 생명력을 얻는다. 그리고 사랑은 성이 통제를 벗어나 산불이나 화재가 되지 않도록 지켜줄 수 있다. 물론 이처럼 건강하고 조화로운 상태를 이루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만 말이다.



자기 결정권과 성 평등


아들이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자, 아내가 성교육을 해야 한다며 책 한 권을 읽어보라고 소개했다. 성교육 전문가 손경이 씨가 쓴 “당황하지 않고 웃으면서 아들 성교육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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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경이 씨는 가부장적인 아버지와 남편 사이에서 아들만큼은 ‘좋은 남자로 키우겠다’는 생각으로 직접 공부를 하고 성교육 전문가가 되었다고 한다. 울림이 있는 말이다. 오늘날 일어나는 여성에 대한 많은 범죄와 차별은 몇몇 나쁜 놈들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보통의 아버지와 남편, 아들과 형제에 의해서 일어난다. 물론 반대로 남자에게 가해지는 차별과 폭력도 마찬가지이다. 한 개인이 오늘의 수많은 성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아니겠지만, 한 개인이 자신의 성인식과 사랑의 관계에 대한 건강한 태도를 지닌 좋은 사람이 될 때 많은 성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따라서 먼저 자신이 성과 사랑에 대한 건강한 태도를 가지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러면 어떤 태도가 건강한 것일까? 손경이 씨가 말하는 성교육의 목적에서 이를 배울 수 있다.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성에 대한 판단을 스스로 내리는 자기 결정권과 상대방의 성에 대해 이해하는 젠더 감수성을 일상 속에서 가르쳐 주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즉 성 의식과 성 평등에 보다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성교육하면 성지식이나 예방 훈련 정도를 배우는 것으로 오해했던 나는 손경이 씨가 말하는 성교육의 목적을 읽고 나서 순간 아하! 체험을 했다. 자기 결정권이야 말로 우리에게 필요한 성교육의 목적이고, 성에 대한 건강한 태도이다. 상상해보자. 남자나 여자나 높은 수준의 성 평등과 성감수성을 가지고 자신의 성욕과 성에 대한 모든 과정을 자기 스스로 결정을 할 수 있다면, 그리고 동시에 상대방의 자기 결정을 존중한다면, 우리의 일상은 많이 달라지지 않을까? 그럴 때 여자나 남자나 지금보다 더 자유롭고 안전하게 성과 사랑을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다만 성에 대한 자기 결정권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일상의 전반적인 자기 결정권을 회복해야 한다. 일상에서 하는 행동과 생각들을 온전히 스스로 결정하고 있는가? 각자의 결정이 충분히 존중받고 있는가? 반대로 함께 이들의 결정을 무시하고 묵살한 적은 없는가? 안타깝게도 많은 이들이 부모라는 이유로, 부부라는 이유로, 상사라는 이유로, 온갖 이유로 우리의 자기 결정을 무시하고, 동시에 우리도 같은 이유로 누군가의 결정을 무시한다. 따라서 먼저 일상의 자기 결정권을 회복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사랑이 필요하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만큼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결정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수 있고, 타인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만큼 타인의 결정을 있는 그대로 존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결국 성과 사랑은 다시 연결된다.

짧은 글로 성과 사랑을 충분히 담아낼 수 없다. 물론 내가 길게 글을 쓴다고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만큼 성과 사랑이라는 주제가 깊고 복잡하기 때문이다. 성 관련 문제들 역시 사회, 문화, 제도, 정치 등 많은 요소들이 섞여 있기 때문에, 일반화시킬 수 없고, 단순한 방법으로 해결하기도 어렵다. 따라서 이 글은 성과 사랑에 대해 그 어떤 정의와 정답을 내릴 의도가 전혀 없다. 다만 성욕을 느끼며 다양한 사랑의 관계 안에서 하루하루를 보내야 하는 평범한 이들이 최소한 어떤 태도를 가져야 그나마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을지 나누고 싶을 뿐이다. 부디 어제보다 조금이라도 더 건강한 성과 사랑의 태도를 지닌 좋은 사람이 되어보자.





1. 성욕이 피해야 하는 마음이 아니라 사랑에서 나온 자연스러운 내 마음의 일부임을 받아들이자. 다만 사랑으로 성욕이 산불이나 화재가 되지 않도록 늘 조심하자.


2. 오늘날 일어나는 여러 가지 성차별과 성범죄는 나와도 상관이 있다. 내가 성과 사랑에 대한 건강하고 평등한 인식과 태도를 지닌 좋은 사람이 되면, 그만큼 성 문제는 해결된다.


3. 남자와 여자 모두 주체적으로 성에 대한 자기 결정권을 가져야 하고, 동시에 상대방의 자기 결정권을 존중해야 한다. 이를 위해 일상에서 나와 타인의 자기 결정권을 보호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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