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인생은 짧고 가야 할 곳은 많다

by 수경

여행을 하지 않아 권태를 느끼고 있던 어떤 일상적인 날. 문득 '허무'와 '공허'에 대해 다루는 글은 많이 읽어본 것 같지만, 권태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심리학에서 다루는 권태감에 대해 알아본 바, 이는 무려 5가지로 분류된다고 한다.


1. 보정적 권태감: 권태감을 느끼지만, 무엇을 할지 모르는 상태
2. 반응적 권태감: 권태감을 느끼며, 자신을 옭아맨 대상에 공격적 성향을 보이는 상태
3. 탐색적 권태감 : 지루하거나 따분해서 가만히 있지 못하고 계속 출구를 찾는 상태
4. 무관심한 권태감 : 권태감을 느껴, 주변의 모든 일에 관심을 끄고 평온한 마음을 찾아가는 것
5. 심드렁한 권태감 : 기분이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닌데, 권태감을 느끼는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


어떤 권태롭지 않은 사람이 이렇게나 다양하게 분류를 해놓았을까 신기하기도 하던 찰나. 그 개념을 읽으면서 나의 상태는 '탐색적 권태감'에 해당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일상이 반복된다고 느껴질 때, 새로운 자극을 찾아 내가 모르는 곳으로 여행을 떠나곤 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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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내가 새해가 될 때마다 챙겨보는 영화가 하나 있다. 바로 <라스트 홀리데이>라는 영화인데, 이는 성실한 삶을 살아오던 여자 주인공 '조지아 버드'가 시한부 판정을 받고는 밀려오는 허무감에 돌연 여행을 떠나는 내용이다.


더 이상 행복을 뒤로 미룰 수 없음을 깨닫고는, 항상 자신의 꿈을 정리해 오던 '가능성 책(Possibilities Book)'을 펼쳐 겨울의 체코로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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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셰프의 음식도 먹어보고, 그와 대화를 나눠본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없으니 평소에는 시도해보지 못했을 액티비티도 잔뜩 즐긴다. 뉴욕에 살던 평범한 회사원이 아닌, 마치 새로운 사람이 된 것만 같다.


평생 미뤄왔던 즐거움이 쏟아지는 순간들 앞에서, 삶에게 뒤늦은 선물을 받은 것 같아 원망도 잠시 든다. 그래도 결국 그 감정을 압도하는 것은 벅찬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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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후반부에는 내가 새해가 될 때마다 이 작품을 다시 찾게 만드는 장면이 나온다. 조지아가 거울 앞에서 자신을 향해 말을 건네는 대사다.


"원하는 것을 다 얻진 못했지만, 넌 그동안 매우 운이 좋았어. 다음에는 우리 다르게 해 보자. 더 웃고, 더 사랑하자. 세상을 보자. 우린 결코 두려워하지 않을 거야. Happy new year."




여행이 그저 떠나는 일이 아니라, 삶을 다시 시작하는 일이라는 사실. 조지아는 그것을 보여준다. 익숙한 자리에서 벗어나 새로운 환경 속에서 숨을 고르며, 어제와는 다른 자신을 만나게 된다. 나 역시 그런 순간을 안다. 낯선 도시에서 이름도 사연도 잠시 내려놓고, 지금 이 순간만을 살아가는 시간. 그때의 나는 멈춰 있던 삶을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반복되는 하루 같아도 한 발만 다른 방향으로 내디디면 세상은 끝없이 달라진다. 허무와 권태의 그림자는 순식간에 벗겨져 버린다. 인생은 짧고 보고 느끼며 살아낼 곳들은 너무 많다는 것을 보여주며, 여행은 허무와 권태의 덧없음을 매 순간 일깨워주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다음 길을 향해 다시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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