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uno Nov 21. 2023

봄을 기다릴 이유를 만들었다

튤립 구근 심기

어느 날, 나에게 작은 베란다 정원이 있는 걸 알고 있는 지인이 튤립 구근을 나누어 주었다.


가을이잖아요?  튤립을 심어야죠??


마치, 가드너라면 가을엔 응당 그리고 마땅히 튤립을 심어야 한다는 말과 같이...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튤립 구근은 이렇게 생겼다

나는 처음 보는 튤립 구근.

양파와 같은 겉껍질을 벗겨내고, 뽀얀 구근을 흙속에 묻어주는 거라 한다.


나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봄 준비였다.


뭐랄까?

봄이 되면 지천으로 나와있을 봄꽃을 사서 보리라 생각은 했지만, 내 손으로 꽃을 심고 기다릴 생각은 못해봤던 거다!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초보 가드너가 되어 한발 진일보하는 기분이 들었다.


아... 이래서 가드너들은 구근을 심겠구나.

내년 봄을 기다릴 이유가 한 가지 생겼어!


화분 세 개에 구근을 나누어 심고, 물을 흠뻑 준다.

이건 마치, 드립커피를 내리는 풍경과 흡사하구나. 근사한 기분이야 :)


튤립을 품은 화분 세 개를 안쪽 구석에 자리를 잡아주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아무것도 없는 빈 화분 같지만

나에겐 이미 봄을 상상하게 만드는, 마법 같은 존재가 되었지.

이제 내가 할 일은 기쁘게 봄을 기다리는 일이구나.


말하자면, 베란다는 기다리는 일을 즐기는 자의 공간이었다.

하루하루 변화하는 초록의 식물을 기대하며 기다리는 일을 즐기는 자.

그게 꽃이라면 더 환호하겠고, 꽃이 아닌 새잎이어도 탄성을 내지를 것이다.

잘 자라라는 응원을 담아 물을 주고, 마른 잎을 거둬내고, 바람을 내어주고, 자주 바라봐 주는 사람이 가드너였다.

문득 그런 생각도 했다.

내가 가드너로서 자질이 있다면 좀 더 성숙해지겠구나.

애정을 주었다는 이유로 기대하고, 제 멋대로 실망하지 않는 법을 배울 수 있겠구나.





누구에게나 기다림의 이유는 필요하다.

그것이 행복의 씨앗이 되어줄 일이라면 더욱 필요하고, 미래의 시간에 희망을 품게 할 이유가 되어준다면

그 사람을 구원하기도 한다.

어쩌면 그것이 봄에 필 튤립 한송이가 되더라도, 다가올 봄날의 나에게 작은 구원이 되어줄 거라고 나는 믿는다. 설령 모든 구근이 꽃이 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기대를 품고 기다린 날들을 행복해하면 그만이다.


튤립 구근을 심던 가을날, 나의 베란다 정원은 작은 희망의 씨앗을 품었다.


이전 03화 베란다 정원의 월동 준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