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로 만으로도 50이 되니
사람이 없다. 아니, 사람이 무서워졌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힘든 지인들을 많이 본다.
물론 나 또한 사람 속에서 힘듦의 삶을 사는 같은 사람이다.
(안 그런척하고 있지만)
흔히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한다. 혼자는 살 수 없고, 누군가와 더불어 살아야 한다. 그래서인지 우리의 삶은 우리가 원하지 않더라도 무엇인가 항상 엉켜있다. 때론 그 엉켜있음으로 인해 다리가 걸려서 넘어지고, 갇혀 있으므로 우리의 마음이 답답함을 느낀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함께 살려고 노력을 할까?
이 엉켜있는 함께 삶의 시작은
첫째,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에서 시작된다.
자녀는 부모를 선택할 수 없지만, 눈을 뜨면 부모라는 관계가 형성되어 있다. 어떤 유형의 부모이냐 따라 자녀의 삶이 달라진다. 분명히 우리의 삶의 모습의 대부분은 부모에게 물려받은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내 나이 만으로도 50이 되어 생각해 보니, 자식으로 부모님께 물려받는 유산에는 우리는 손을 댈 수 없지만, 부모로서 자식에게 물려주는 선한 영향력이 포함된 유산을 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부모에게 물려받은 좋은 또는 나쁜 삶의 형태를 자녀가 거스르기 위해서는 중력을 거부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만큼 부모에게 받은 유산을 벗어나기는 어려운 것이다.)
둘째, 결혼으로 시작되는 배우자 간의 관계이다.
30년을 따로 살던 아주 다른 세계의 사람이 함께 산다는 것은 참으로 기적 같은 일이 아닐 수 있다. 얼마 전만 해도 결혼은 삶의 필수조건 중에 하나라는 인식이 강했다. 결혼할 때가 되었는데, 하지 않음에 대한 무언의 압박이 있었지만, 현대의 삶에서는 결혼은 선택이 되었다. 그 이유는 결혼하여 두 남녀가 함께 산다는 것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 맺음이 어렵기 때문이다. 암튼, 만약 결혼했다면 어떻게 유지하는 것이 온당할까?
내 나이 만으로도 50이 되어 생각해 보니,
배우자와 가깝던지, 멀던지 손잡고 한 방향의 삶의 길을 갈 수 있는 것이 결혼이 아닐까 싶다. 여기에서 배우자에게 한 변화를 요구하는 것은 아주 위험하다.
셋째, 나와 타인과의 관계이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을 만난다. 그 사람은 나의 아군일까? 아님, 적군일까? 삶의 전부를 줄 듯 추억으로 똘똘 뭉친 고향 친구들, 학교에서 만난 동지 또는 경쟁자인 친구들, 사회에서 만나 힘들 땐 함께하고, 서로에게 현재의 위로가 되어준 수많은 친구가 우리에게 존재한다. 하지만, 이들과의 관계가 온전하다고 할 수 있을까? 이 중에서 한 명의 진짜 친구가 내 곁에 있는 것만으로 우리는 성공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가족 외에 다른 사람을 벗으로 둔다는 것으로 참으로 힘든 것이다.
내 나이 만으로도 50이 되어 생각해 보니,
우리의 삶에 속에 맺어진 수많은 친구들은 이해관계로 형성되어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따라서, 친구들이 원하는 이해관계에서 우리가 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들과 좋은 관계로 남을 수 있다.
사람 속 사람에게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내 나이 만으로도 50이 되어 생각해 보니,
자식에게는 선한 영향력으로
배우자에게는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손을 잡을 수 있는
친구들에게는 그들의 이해관계에 해가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