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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첩장 없으면 안 되세요.

by 송대근
“청첩장 없으면 안 되세요.”


혼수가전을 보러 간 어느 주말 오후, 상담 직원은 정색하며 말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가방 속에서 서류를 꺼냈다.

“여기 혼인관계증명서예요. 이번 달에 혼인신고했어요. 날짜도 다 나와 있고요.”

직원은 잠시 그 서류를 들여다보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죄송하지만, 신혼부부 할인은 청첩장이나 웨딩홀 영수증이 필요합니다.”

“저희는 결혼식을 안 했어요. 그래서 그런 게 없어요.”

“그렇다면... 두 분이 함께 찍은 웨딩 사진은 있으실까요?”


그 순간, 나는 이상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법적 효력이 있는 국가서류는 증거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결혼식의 흔적이 남은 사진이나 종이쪼가리만이 결혼의 ‘증명’이 되는 사회.

사랑도, 혼인도, 청첩장이 없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자리에서 나는 할인 몇 푼 받겠다고 억지를 부리는 진상 고객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런 경험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직장에 결혼축하금을 신청하려 했을 때도, 같은 벽에 부딪혔다.

청첩장 또는 식장 계약서 제출’이 내부 규정이라는 것이었다.

청첩장이 없다고 하자, 담당자는 짧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요즘 그런 분들이 좀 있어요. 혼인신고만 나중에 하시고... 혜택 받으시려는.”

우리는 ‘제도 악용자’ 취급을 받았다.


물론 알고 있다.

결혼식만 올리고 법적 혼인은 미루는 커플들도 있다.

부동산 청약이나 신혼부부 우대, 각종 세금 혜택 등을 고려해서다.


하지만 우리는 아니다.

혼인신고를 했고, 이미 법적으로 부부였고, 함께 살고 있었다.

그런데도 시스템은 우리의 결혼을 인정하지 않았다.


청첩장 하나 없이 결혼했다는 우리의 선택은, 이 사회에선 증명되지 않는 일이었다.

시스템은 진실한 관계보다, 꾸며낸 형식을 믿었다.

서류가 아닌 사진을, 사랑이 아닌 연출을, 인물보다 액자를 더 신뢰했다.

마치 예식장의 조명 아래에 서야만 부부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처럼.


그래서 제도의 눈엔, 우리는 결혼했지만 결혼한 사람이 아니었다.

사회는 사랑이 시작된 순간보다,

그 사랑을 어떤 방식으로 ‘보여주었느냐’에 따라 인정과 혜택을 나눈다.


그렇기에 축하금도, 할인도, 여러 가지 혜택도.

겉으로 드러나는 형식에 따라간다.


결국 우리는 가짜 청첩장을 만들기로 했다.

인터넷 검색창에 ‘청첩장 무료 샘플’이라고 검색했다.

이름을 넣고, 날짜를 정하고, 장소까지 적었다.

존재하지 않는 결혼식을 위해, 허구의 식순까지 만들어냈다.

그렇게 2천 원을 결제하자, 마치 진짜 부부가 된 것처럼 시스템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틀 뒤, 그 종이가 택배로 도착했다.

함께 도착한 건 허탈한 웃음과 무력감, 그리고 말할 수 없는 씁쓸함이었다.

국가가 보증한 진실보다, 허구로 꾸민 형식이 더 강력한 증명이었다.


우리는 결국, 형식을 흉내 냈다.

가짜 청첩장을 냈고, 신혼부부 할인을 받았고, 회사에서 축하금을 받았다.

돈이 하게 했다.




안마의자, 세탁건조기, 작은 냉장고 두 대까지.

그렇게 우리의 방식대로 집을 하나하나 채워나갔다.

"웨딩사진은 어디에 두지?"

"냉장고 옆에 붙이자!"


베트남에서 이름 모를 사진사에게 100kD(5천 원) 주고 찍은 웨딩사진은 밥 먹을 때마다 보이는 냉장고 측면에 자리 잡았다.


둘만의 선택으로 채워 넣은 집은 소박하고 아름다웠지만, 그것만으로는 결혼이 끝나지 않았다.

다음 형식이 곧 도착했다.



집들이는 언제 하실 거예요?’

우리의 결혼은 아직도, 시스템의 절차 속 어딘가를 통과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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