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는 언제 낳을 거니?”
말끝을 흐리며 어머니가 물으셨다.
인천에서 의정부까지 먼 길.
어머니께서 집들이로 우리 집에 처음 오신 날이었다.
신혼집이라 불린, 작고 소박한 공간.
거실 식탁도 변변치 않아 점심은 인근 식당에서 먹고, 집에서는 간단히 차만 마셨다.
어색한 침묵을 피하려 애써 분위기를 띄우던 중,
어머니는 갑자기 대화를 돌리듯 그 말을 꺼내셨다.
“그래도 하나쯤은 낳아야지. 안 그래?”
나는 웃지 않았다.
그 질문을 웃으며 넘길 수 없었다.
짧고 단호하게 말했다.
“안 낳을 거라니까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공기가 달라졌다.
어머니는 말없이 찻잔만 만지작거렸다.
내 안에 오래전부터 준비해 둔 말이었지만, 막상 꺼내고 나니 가슴이 먹먹했다.
아이를 갖지 않기로 한 건, 간단한 선택이 아니었다.
그 결정 안에는 아내의 아주 오래된 시간이 담겨 있었다.
아내는 NICU, 신생아 중환자실 간호사였다.
태어난 지 며칠도 안 된 아기들이 생과 사를 오가는 공간.
하루에도 몇 번씩 모니터 알람이 울렸고,
작은 손에 주삿바늘을 꽂고 조용히 울던 아기 곁에는
무기력하게 기도하던 부모들이 함께 있었다.
선천성 기형부터, 치료가 불가능한 병,
심장이 멈추기 직전까지의 몸부림.
아내는 그런 밤을 수도 없이 견뎠다.
어느 날, 아주 담담한 표정으로 아내가 말했다.
“건강하게 태어나는 아이들이 더 많긴 해. 근데... 난 못 낳겠어.”
나는 그 말을 가볍게 듣지 않았다.
그녀가 흘려보낸 감정과 시간, 죄책감과 무기력.
그 모든 이야기의 끝에 나온 단단한 결심이었다.
결혼 후 건강검진에서, 아내는 ‘중복자궁’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하나의 자궁이 두 갈래로 나뉜 선천적인 기형.
임신은 가능하지만 유산 위험이 높고, 출산도 쉽지 않다는 의사의 말.
하지만 아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나 봐. 그냥... 이 팔자로 살래.”
그녀는 늘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무엇이 옳고 그르냐 보다,
무엇이 가능한지 먼저 따지는 사람.
나는 아내를 설득하려 하지 않았다.
그럴 이유도, 자격도 없었다.
그저 그녀의 선택을 함께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녀는 생명의 진실을 너무 가까이서, 너무 많이 봤다.
축복의 순간이기도 했지만,
때론 그만큼의 상실과 아픔이 함께하는 현실이기도 했다.
“애는 하나 낳을 거지?”
어머니의 말은, 누군가에겐 자연스럽고 당연한 꿈.
하지만 우리에겐, 그 꿈을 마주할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그 대신,
우리가 지킬 수 있는 하루하루를 살아가기로 했다.
“안 낳을 거라니까요.”
그 말은 아내가 넘어선 고통 위에 세운 다짐이었고,
삶을 함께하겠다는 또 하나의 서약이었다.
나는 결혼을, ‘혼의 결합’이라고 믿는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혈연보다 가까운 0촌.
서로의 삶을 가장 깊이 나누는, 선택한 가족.
그래서 나는,
우리의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아내의 사연을 들먹이지 않기로 했다.
누군가는 내가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겠지.
스스로 내린 어떠한 '결정'.
괜찮다.
그게, 우리가 지켜야 할 사랑의 방식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