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소가 불을 삼키러 온다

29장 수연아

by 수연


회전판이 몽돌과 맞부딪치며 산산이 튕겨 오르던 순간, 그 깨진 조각 하나가 유난히 시선을 끌며 지난 기억 하나를 환기시켰다. 낡은 선풍기 날개에 대한 기억이었다.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던 물건이라 형이라고 부르며 남몰래 정을 붙인 선풍기였다. 소년 시절의 마지막 여름이었다. 소년은 이튿날 학교 친구들과 바다에 가기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한창 짐을 챙기고 있는데 아무리 찾아도 수영복 바지가 안 보였다. 서랍마다 속속들이 뒤졌지만 나오지 않아 아예 서랍째 들어내 찾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침대 서랍을 들어냈을 때였다. 빠끔히 드러난 침대 밑바닥은 어둡기만 하여 처음엔 아무것도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런데 어떤 예감이 스쳐 소년은 옷걸이를 가지고 그 밑을 쑥 훑었다. 예상대로 뭔가 걸리는 것이 있었다. 거둬 보니 자신이 찾던 것이 맞았다. 기쁜 마음에 쾌재를 부르며 팔을 쭉 내뻗는데 그때까지 손에 쥐고 있던 옷걸이의 길쭉한 한끝이 선풍기 안전망 사이를 뚫고 들어가 버렸다. 탕, 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퍼졌고, 날카로운 파편이 튀었다. 부러진 날개 조각이었는데, 그야말로 그것은 부러진 날개처럼 보였다. 소년은 찌르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주워드니 손바닥보다 작은 크기였다.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끝이 뾰족한 게 비수 같은 모양새였다.

오래 버텼는데.

자기도 모르게 입 밖으로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소년은 이 말이 불러일으킨 여러 가지 상념들 때문에 더욱 가슴이 찔리며 우울해졌다. 왜 끝이 이럴까. 찾아 헤매던 것을 찾는 대신 무언가 망가져야만 된단 걸까. 선풍기는 멀쩡히 잘 돌아가고 있었다. 미세한 파편 가루로 의심되는 것도 날리지 않았다. 쓰는 데는 지장이 없어 보였다. 그래도 소년은 무언가 아쉽고 답답하여 밤새도록 그 의미를 되물었다. 그러나 끝내 답을 얻지 못하고, 파편조각은 파편조각인 채로 남아 이따금 심장을 욱신거리게 하는 통증을 유발했다. 소년은 게워낼 것 같은 그 통증을 향하여 이런 질문을 쥐어짜냈다. 사는데 지장은 없지만 눈에 띄게 망가지는 대가?

지금 그의 눈앞엔 그날의 것과 비슷한 깨진 조각이 떠올라 있었다. 소년은 그에게 물어왔다. 망가지는 것은 대가인가.

대가? 뭘 바랐기에? 흠 하나 없이 도달하길 바랐나?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순간 없이 제 길로 들어와지던가. 우리는 부딪쳐가며 바다에 왔다. 바닷가에서 본 조약돌도 그렇게 와있었다. 조약돌은 그간의 풍파를 한탄하거나 눈앞의 파도를 피하는 법 없이 의연하였다.

아, 이른바 ‘적당히’의 감각을 익히라는 건가. 애써 고민하지 않아도 깨지고 깎이고 부서지다 보면 저절로 다듬어져 적당히 둥글둥글해지는 시점이 온다는 건가. 그 다음부터는 한결 쉬워진단 거겠지. 감정의 역치에 맞춰 적당히 아프다 마는 습관이 들 테니까. 그렇게 적당히 넘어가고 자라라는 거겠지. 어른으로.

자란다는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니다. 적당히 만족하고 체념하는 버릇을 들여 어른이라 불리는 나이에 도달하는 것, 그것은 자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유기하는 짓이다. 결정코 자란다는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니다. 다시 한 번 소년이 되는 것. 그것이 진정으로 자란다는 것의 의미다.

그런 식으로 자라는 게 어떻게 가능하지? 우리는 자라면서 자꾸만 부서지고 망가지는데. 어떻게 소년으로 다시 거듭날 수가 있나.

너는 이미 그 방법을 안다. 너는 이전에 부서진 선풍기 날개 조각을 주워들었다. 그렇게 부서진 것을 소중히 주워드는 마음이면 된다. 그 부서진 것을 보던 대로 보고 판단해 사소하다 내던지지 않는 그런 마음이면 된다. 시간에서 튀어나온 그 사소한 조각을 곰곰이 들여다보고 그것에 어울리는 진짜 이름을 찾아주려 고민하면 된다. 그 이름이 마침내 네 안에서 확연해질 때, 부서짐은 부서짐이 아니라, 오직 부서진 한 조각을 되살려내려는, 부서져 떨어져 나간 작은 것들을 부활시키고자 하는, 도저히 멈출 수가 없는 마음으로 되새겨진다. 알다시피. 너는 안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나는 너에게서 배운 것이다. 신우휘.

흰 빛이 퍼졌다. 요동치는 빛의 알갱이들이 바늘 끝처럼 촘촘하게 날아오고 있었다. 거무스름한 비문은 한 가닥도 섞여있지 않은, 남김없이 태우고 녹이는 흼이었다. 하얗게 방울져 펄떡이는 소년의 동공 깊숙이 커다랗게 열린 아이의 눈동자가 그를 마주보아왔다. 그는 갑자기 주저앉고 싶어졌다. 이대로 머물러 있으면 안 될까. 그리움으로 멈춘 아이의 눈동자가 그에게 호소해왔다. 그는 견딜 수 없어졌다. 자신이 오랫동안 방치해온 아이였다. 그래서 크다 만 아이였다. 그는 아이의 슬픔을 심고 뿌리내리듯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이의 눈동자가 옅어져갔다. 하나의 이야기가 지워지고 있었다. 희박하게 눈앞이 트여만 갔다. 그는 자신이 이야기 바깥으로 나왔음을 느꼈다. 신우휘, 부르는 목소리만 남아 유리 위의 다이아몬드같이 투명하게 빛났다.

이때 또 다른 신우휘,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오의 목소리였다. 안팎으로 신우휘, 소리가 공명했다. 그리고 하나의 울려 퍼짐이 되어 말했다.

우리 눈이 왜 앞에 달렸나 생각해 봤는데, 몸을 가진 우리로서는 대상을 통하지 않고선 도저히 자기 안의 것들을 볼 수가 없거든. 너도 알잖아. 혼자서는 갖고 있어도 못 봐. 하물며 우리는 거울에 비추어 스스로를 대상화시키지 않고서는 자기 얼굴조차 볼 수 없잖아? 그런데 진짜 비춰볼 만한 것들은 네 안에 있잖아. 그것들을 다 어떻게 느끼니? 대상이 열쇠야. 대상이 없이는 그 반할 만한 것들을 꺼내 열 방법이 없지. 대상을 향해 나아가는 건 자기 자신을 향해 나아가는 일이야. 아직도 망설여지니? 물론 반할 만한 것들만 보게 되진 않겠지. 결함도 보이겠지. 하지만 네가 상대하는 것은 아무리 무서워도 바로 너라는 사실을 기억해. 너는 너를 마주보고, 너와 대화하고, 너와 갈등하는 거야. 그러면서 절대 박살나지 않는, 박살날 수 없는, 우리가 쪼개지기 전의 마음을 되비추어보는 거야. 그래도 엄두가 안 난다면 그럼 실컷 망설여도 봐. 때가 되면 네 몸이 알아서 움직일 거야. 우린 그렇게 진화하여왔으니까.

이렇게 말하는 소리는 오의 목소리 같기도, 그의 목소리 같기도 했지만 또한 두 목소리와 달랐다. 그 소리는 오와 그의 목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는 저 하늘과 맞닿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듯했다. 그 소리가 사뭇 낯설어지며 이렇게 물어왔다. 그런데 지금 난 누구에게 이따위 하소연을 하고 있는 것일까. 정말 너에게 하고 있는 걸까. 이 모든 헛소리를 대체 누구에게 지껄이고 있는 것인가.

날카로운 호통의 끝에 긴 휘파람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더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여전히 듣고 있었고, 그대로 들으면서 나는 눈뜬다. 층계참이다. 하늘이 보인다. 살짝 상기된 듯한 오묘한 살구 분홍색을 띤 구름이 막 옅어지고 있다. 새털구름이다. 한바탕 헤엄친 흔적 같은 구름의 꼬리가 희어지자, 하늘색 공기가 휘몰아치는 꼬리의 흰 빛을 마저 녹여낸다. 파랑이 잠시 완연한 때 흰 수염이 뜬다. 예닐곱 번 파닥파닥 잇다 아득히 흰 점으로 녹아든다. 백로의 날갯짓이 녹아든 그 방향으로 가파른 능선의 산이 비친다. 봉우리가 하늘에 잠긴 듯 보이는 일곱 시 삼십구 분의 전망. 나는 돌아선다. 굼뜨게 몸을 흔드는 사람들. 한낮의 나무들처럼 즐거웠다 괴로웠다, 수시로 낯빛을 바꾸는 얼굴들. 손바닥에 와 닿은 쟁반 밑이 서늘하다. 한 손은 비어있다. 꽉 쥐고 있던 것은 이제 깨지고 없다. 깨어짐은 빅뱅이었다. 개운하다. 여태껏 그네를 타고 놀던 그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 같다. 그가 돌아오고 흔들거리는 그네만 남은 것 같다. 그리고 지금, 텅 빈 그네마저 멈춰선 세상은 고요로 가득하다.

이대로 그만 멈추어도 좋겠지. 생각하는 순간 어머니가 배부른 나체를 하고서 걸어온다. 어머니는 눈동자의 초점을 맞추지 못하는 불안한 무표정으로 걸어왔다 걸어가고 걸어갔다 걸어온다. 그런 어머니에게 내가 다가간다. 팔을 뻗어 위에부터 불룩한 그 배에 두르고 힘차게 말한다. 엄마한테서 똥이 나와도 괜찮아. 내가 똥과 함께 엄마 옆에서 지켜줄게. 나는 울 수조차 없었다. 내가 경험한 것은 너무도 크고 밝은 펼쳐짐이어서 눈물로 응집되는 즉시 반짝이며 나아가는 감정이었다. 그것은 나를 태어나게 한 마음이었다. 내가 나를 소똥 밭에 처박아 굴리면서까지 기억해내고자 했던 첫 마음이었다. 나는 어머니의 배설물과 함께 태어났다. 날 적부터 똥밭에 있었다. 그러니까 이 마음은 똥밭이 아니었다. 잊히었을 뿐.

오, 한쿡 소년!

나는 발을 든다. 처음으로 이 이름이 싫지가 않다. 쿠키를 한 입 맛보려 기다리는 표정이 젊다. 한 잎 한 잎 초대되어 가는 시월의 낙엽처럼, 돌아올 줄 아는 마음이 발을 바닥에 사뿐히 내려놓는다. 돌아올 줄 아는 한 우리는 나아갈 수 있다. 깨소금같이 뿌려진 노란 잎들을 밟으며 다시 한 번 소녀로, 소년으로. 황소가 불을 삼키러 온다. 나는 수연에게로 간다. 수연을 흔들어 깨우러 간다. 아이들이 춘추복을 입고, 민들레 씨앗이 파란 상공을 떠가고, 두 개의 은방울이 비벼지는 소리가 울리면 우리, 귀뚜라미의 길로 가자. 갓 구워낸 과자를 들고 늦가을의 소풍을 가자. 흐린 낮에 불을 켠 듯, 혹은 무성했던 푸르름이 그리운 듯, 황홀히도 타는 은행나무 잎들 아래, 그 화사하고 아늑한 그늘에 서서 나란히 하늘을 바라보자. 비단주름치마폭처럼 펼쳐진 하늘에 은은한 잔광이 쏟아져 내릴 때 너는 외롭지 않을 거야. 태양과 구름이 만나는 그때, 알 수 없는 무늬에서 솟아오른 문장이 너를 부를 때, 나는 다시 너에게로 환귀할 테니, 수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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