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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의 파도, 그리고 나의 결심

그 날을 기억하고 그날을 잊지않고..

by 으랏차차 내인생 Mar 20. 2025

제주도의 파도, 그리고 나의 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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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이 몰아치는 파도가 보이는 작은 모텔 방. 창밖으로 넘실대는 바다는 여느 때와 다름없지만, 내 안에서 요동치는 감정은 그 어느 때보다도 깊고 무겁다. 나는 컴퓨터 앞에 앉아 채무 금액을 정리한다. 채권자별로, 금액별로 나열해보니 현실이 더욱 선명해진다. 너무도 큰 숫자.


어떻게 여기까지 온 것일까. 이유는 잘 알고 있다. 거대한 사기 사건. 많은 사람이 나를 도와주었고, 나는 그들의 도움을 외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어진 이자와 상환 압박 속에서 빚은 점점 불어났다. 모든 것이 내 탓이라는 걸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이제 와서 후회한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이 지독한 현실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까.


창밖의 바다를 바라본다. 파도는 끊임없이 밀려오지만, 나를 삼킬 듯한 검푸른 색이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바다는 나를 부르고 있다. 마치 내 모든 것을 버리라고 속삭이는 듯하다. 그러나 그곳에 답이 있을까.


생각을 가다듬고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한다. 가족, 회사, 내 삶. 이 모든 짐을 홀로 짊어지고 해결해야 한다. 두렵고 고요하다. 마치 세상이 멈춘 듯하다. 파도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내 머릿속의 적막이 모든 것을 지배한다.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애써도 깊은 수렁으로 빠져든다. 바닥으로, 더 깊이. 하지만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다.


2021년 1월, 제주도의 한 모텔에서 나는 모든 것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서울로 돌아왔다. 정리는 간단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히 깨달았다. 내가 마음먹지 않으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날의 다짐을 아직도 잊지 않는다. 바다는 여전히 출렁이겠지만, 나는 더 이상 그 파도에 휩쓸리지 않을 것이다.


하나씩 정리를 해나간 덕에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혼자가 된 삶은 외로웠지만, 바닥을 딛고 일어설 수 있었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수면 위로 올라가는 듯했다.


이제 더 어려움은 없을 거라 생각했고, 어떤 어려움이 와도 헤쳐 나갈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세상은 나에게 더 큰 시련들을 주었다. 세무 조사, 화재, 남들에게는 일어나지 않는 일들이 왜 나에게만 반복되는 걸까.


사람은 참 간사하게도, 지나간 아픔보다 현재의 고통이 더 아프게 느껴진다. 다 이겨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모든 일들이 다시금 나를 후벼 판다.


아픔은 결코 적응되지 않는다. 더 깊어지고, 더 선명해진다. 그리고 더 아프다.


그래도 제주도의 그날을, 그 밤을, 나를 집어삼킬 것만 같았던 그 까만 파도를 기억하며 오늘의 아픔을 잠시 잊어본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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