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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정환 Sep 21. 2023

늘 음지에 서 있었던 것 같다

                       정치에 몸을 담은 후배가 있었다. 그렇다고 자신이 공직 선거에 출마한 적은 한 번도 없다. 20년가량 선거에 출마한 후보를 도왔는데, 도와준 사람은 정작 한 번도 당선을 못했다. 많은 사람이 당선을 위해 이 당 저 당으로 옮겨 다니고, 이 사람 저 사람 유력한 후보에게 선을 대려고 할 때도 오직 한 사람만 위하여 일했다. 후배는 신경림 시인처럼 안타깝고 아쉬웠지만/나는 불행하다고 생각한 일이 없다’고 했다. 이유는 뭘까? 그냥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당당히 했기 때문이다. 


  양지에 서는 일은 모두 희망하는 일이고 모양새 나는 일이다. 부귀도 따르고, 영화도 따르고 일신이 편하다. 음지에 서는 일은 불편한 일이다. 용기가 필요하다. 자기희생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신경림 시인의 <쓰러진 것들을 위하여> 시구처럼, ‘그러면서 행복’ 하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아무래도 나는 늘 음지에 서 있었던 것 같다

  개선하는 씨름꾼을 따라가며 환호하는 대신

  패배한 장사 편에 서서 주먹을 부르쥐었고

  몇십만이 모이는 유세장을 마다하고

  코흘리개만 모아놓은 초라한 후보 앞에서 갈채했다

  그래서 나는 늘 슬프고 안타깝고 아쉬웠지만

  나는 불행하다고 생각한 일이 없다

  나는 그러면서 행복했고

  사람 사는 게 다 그러려니 여겼다     

  쓰러진 것들의 조각난 꿈을 이어주는

  큰 손이 있다고 결코 믿지 않으면서도

                             -<쓰러진 것들을 위하여>, 신경림     

     

  조나라 평원군을 보자. 평원군 조승(趙勝) 이야기는 위에서 한 차례 했다. 평원군은 조나라의 공자(公子)들 가운데 가장 똑똑했으며, 빈객을 좋아하여 찾아온 빈객이 수천 명에 이르렀다. 평원군은 조나라 혜문왕과 효성왕에 걸쳐 재상을 지냈다. 평원군 이야기를 보면 음지에 선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은 일이고, 어떤 희생이 따르는지 잘 보여준다.      

  평원군 저택 누각은 민가를 내려다보는 곳에 있는데 한 민가에는 허리가 굽고 다리를 저는 장애인이 살았다. 장애인은 불편한 몸으로 손수 물을 길어다 먹었다. 어느 날 평원군 애첩이 그 모습이 우습다고 깔깔거리며 소리 내어 웃었다. 이튿날 장애인은 평원군 저택으로 찾아와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는 공자께서 선비들을 아주 잘 대접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또 선비들 역시 천 리를 멀다 여기지 않고 공자를 찾아오는 이유는, 공자께서 선비들을 소중히 여기고 첩을 하찮게 여긴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공자의 첩은 제가 다리를 절뚝거리고 곱사등인 것을 보고 비웃었습니다. 저를 비웃은 애첩의 목을 베어 주십시오.” 


  평원군은 웃으며 대답하였다. “알았소.” 

 그러나 장애인이 물러가자 평원군은 이렇게 말하였다. 

  “이 녀석 좀 보게. 한 번 웃었다는 이유로 내 애첩을 죽이라니 너무 심하지 않은가?” 

  평원군은 끝내 애첩을 죽이지 않았다. 보통 이렇게 일을 처리할 것이다. 상식적으로 장애인 편에 서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때부터 빈객들이 하나둘씩 떠나가더니 일 년이 채 못 되어 절반이 줄어들었다. 평원군은 까닭을 몰라 빈객들에게 물어보았다. 


  “내가 여러분을 대우하는 데 조금도 소홀함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떠나는 식객이 이렇게 많으니 어찌 된 일이오?”

  그러자 문인 중 하나가 앞으로 나서며 대답하였다. 

  “공자께서 지난번 장애인을 비웃은 첩을 죽이지 않았기 때문에 여색을 좋아하고 선비쯤은 하찮게 여기는 분으로 여기고는 모두 떠나는 겁니다.” 

  그제야 평원군은 장애인을 비웃은 애첩의 목을 배어들고 몸소 찾아가 사과하였다. 이 일이 세상에 알려지자 다시 빈객들이 모여들었다.


  희생하지 않는 리더는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다. 영향력 없는 리더는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한다. 왕의 아들로 태어나 나라의 재상을 지낸 지체 높은 사람이 애첩의 목을 들고 장애인을 찾아가서 사과했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평원군의 인물됨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다른 사람이라면 오히려 건방지다며 장애인의 목을 베었을 것이다. 평원군은 음지에 섬으로써 희생과 겸손으로 사람들에게서 신뢰를 회복하였다.    

      

채우고 비우기 위해서 돈을 버는 사람

  음지를 향하는 사람은 어떤 기분일까. 신경림은 ‘늘 슬프고 안타깝고 아쉬웠지만’ 행복했다고 한다. 평생 낮은 곳을 선택한 김장하 선생 이야기를 따라가 보자. 


  경남 사천에서 태어난 김장하 선생은 한약방에서 머슴살이하다가 18살에 국가에서 시행한 한약사 자격시험에 합격했다. 미성년자 신분이라 한약방을 개원하지 못하다가 이듬해인 1963년 경남 사천에 처음 한약방을 열었다. 10년 뒤 경남 진주로 옮겨‘남성당한약방’을 50년간 운영하다 2022년 5월에 문을 닫았다. 


  다른 약국보다 싸면서도 좋은 약재를 써 효험이 좋은 약은 전국에 소문이 나서 첫차가 다닐 때부터 앞에 긴 줄이 섰다. 하도 많은 사람이 찾아와 마이크로 순서를 호명할 정도였고, 기다리는 사람이 많아 점심시간에는 빵을 나눠주기도 했다. 많을 때는 직원 스무 명과 매일 새벽까지 약을 지어 팔았다. 덕분에 큰돈을 벌었다. 전국 한약방 가운데 세금을 가장 많이 내기도 했는데 이는 그만큼 성실납세를 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선생은 평소 "똥은 쌓아두면 구린내가 나지만 흩뿌려 버리면 거름이 돼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맺는다. 돈도 이와 같아서 주변에 나눠야 사회에 꽃이 핀다." 는 생각으로 여러 시민사회단체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주변에서 경남도문화상이나 진주시문화상, 경남교육대상을 추천하려고 해도 안 받는다고 하거나 '본인이 싫다는데 왜 하려느냐' 며 극구 사양하였다. 주변 사람들은 선생을 ‘채우고 비우기 위해서 돈을 버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처음 한약방을 열 때 옆집에 살던 이웃은 선생을 이렇게 기억한다.


  “이 동네 사람들 다 김 약국 없으면 못 살았지. 돈 없을 때마다 금고처럼 갖다 썼으니까”

  선생이 준 장학금으로 공부를 한 문형배 헌법재판소 재판관은 선생의 생일잔치에서 “받은 돈을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이 사회에 갚아라.” 고 말하던 선생을 회고하다 끝내 목이 메었다.

   고등학교 시절 선생의 집에서 숙식하며 장학금으로 대학을 가 학생운동에 투신했던 조해정 부산대 교수는 “큰 지원을 받고도 공부는 안 하고 데모만 하여 죄송함을 피력하자 선생님은 ‘그것도 사회를 위해 기여하는 길이다.’고 하시면서 존중해주셨다. 살면서 그런 지지를 받아본 적은 없다.”며 눈물을 흘렸다.


  문형배 헌법재판소 재판관에게 한 말이나 조해정 부산대 교수한테 한 말을 보라. 당신이 그랬던 것처럼 다른 사람들에게도 음지에 서기를 부탁한 사람, 음지에 서 있는 사람을 지지한 사람이다.     

‘쓰러진 것들의 조각난 꿈을 이어주는’ 큰 손은 정말 없는 것일까? 그럼 이들의 꿈은 어떻게 되는가? 김장하 선생은 큰 손이 없다고 생각하였기에 스스로 큰 손이 되기로 했는지 모른다. 부족하지만 당신이라도 큰손이 되려고 했을 것이다. 큰 손이 있다고 절대 믿지 않았기 때문에.    


 

  공의휴(公儀休)는 노(魯)나라 박사였다. 공의휴는 뛰어난 재능과 학문을 인정받아 노나라 재상이 되었다. 법을 바로 지키고, 이치를 따르며, 함부로 고치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관청의 모든 일이 저절로 바르게 되었다. 공의휴가 음지에 서는 방법은 좀 남다르다. 나라의 녹을 먹는 사람이 일반 백성과 이익을 놓고 다투는 일이 없도록 하였고, 많은 녹봉을 받는 사람이 사소한 것을 받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어느 빈객이 공의휴에게 생선을 보내왔으나 그는 받지 않았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물었다. 


  “재상께서 생선을 좋아하신다는 말을 듣고 보내온 것일 겁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받지 않습니까?”

  공의휴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생선을 좋아하기 때문에 받지 않는 것이오. 지금 나는 재상으로 있으니 내 돈으로 생선을 살 수 있소. 그런데 생선을 받고 벼슬에서 쫓겨나면 누가 내게 생선을 보내 주겠소? 이 때문에 받지 않는 것이오.”

  자기 집 채소밭에서 자라는 채소를 먹어 보았더니 맛이 대단히 좋았다. 그러자 채소밭 푸성귀를 모두 뽑아 버렸다. 또 자기 집에서 짜는 베가 좋은 것을 알게 되자, 당장 베 짜는 여자를 돌려보내고 베틀을 불태워 버린 다음 이렇게 말하였다. 

  “사서 입어야 할 사람이 사 주지 않으면, 농사짓는 백성이나 베 짜는 여인들은 그들이 만든 것을 팔 수 없게 되지 않겠는가?”     


  쓰러진 것들을 위해 음지에 서기는커녕, 관리소장 갑질을 견디지 못하고 아파트 경비원이 자살했다는 뉴스, 보육시설이나 장애인 시설의 폭력행위 뉴스, 대기업 회장이 운전기사를 폭행했다는 뉴스, 공무원이나 정치인이 부동산을 특혜 분양 받았다는 뉴스, 법관이나 검사가 각종 편의를 봐주고 거액의 뇌물을 받았다는 뉴스가 하루가 멀게 나온다. 그렇다 하더라도 세상이 살만한 이유는 선거에 매번 낙선하는 정치인을 돕는 후배와 같은 사람, 어렵고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 편에 서면서도 드러낼 생각이 없는 김장하 선생 같은 사람, 평원군처럼 사회적 약자 편에 서는 사람, 공의휴처럼 정직하고 청렴한 공무원이 아직은 더 많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쓰러진 것들의 조각난 꿈을 이어주는’ 진정한 ‘큰 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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