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너다
계절의 변화는 경이롭다. 아무것도 없을 것 같은, 저기에 뭐가 있겠냐 싶은,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산과 들에 봄이 오면 꽃과 신록으로 가득 찬 광경은 무엇보다 놀랍다. 산과 들은 저절로 몸을 데워 꽃과 초록을 밀어 올렸을까? 자연 현상이니 저절로 그렇게 됐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인간의 손을 타지 않은 건 맞다. 그런데 산과 들에 태양 없다면 눈과 얼음을 녹이며 봄을 맞이할 수 있을까.
얼음새꽃도 마찬가지다. 얼음새꽃은 이름대로 ‘눈과 얼음의 틈새를 뚫고’ 나온다. 사람들이 얼음새꽃을 보고 환호하는 까닭은 혹한을 이기고 피어났기 때문이다. 얼음새꽃은 햇볕이 날 때 활짝 핀다. 노란 꽃잎 표면에 빛이 반사되면 약간의 열을 발생한다. 이때 꽃 윗부분에 있는 눈을 녹인다고 한다. 자연 현상이지만 감탄스럽다. 그런데 햇볕의 조력이 없다면 노란 꽃잎에 빛이 반사되는 일도, 눈을 녹이는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스스로 이룬 것 같지만 스스로 이룬 게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가 스스로 뭔가 큰일을 이루었을 때 감사해야 하는 이유다. 곽효환의 시 <얼음새꽃>을 감상해보자.
아직 잔설 그득한 겨울 골짜기
다시금 삭풍 불고 나무들 울다
꽁꽁 얼었던 샛강도 누군가 그리워
바닥부터 조금씩 물길을 열어 흐르고
눈과 얼음의 틈새를 뚫고
가장 먼저 밀어 올리는 생명의 경이
차디찬 계절의 끝을 온몸으로 지탱하는 가녀린 새순
마침내 노오란 꽃망울 머금어 터뜨리는
겨울 샛강, 절벽, 골짜기 바위틈의
들꽃, 들꽃들
저만치서 홀로 환하게 빛나는
그게 너였으면 좋겠다
아니 너다
-<얼음새꽃>, 곽효환
우리는 얼음새꽃 같은 사람을 자주 본다. 올림픽 경기에서 메달을 딴 선수의 가정 형편이 어렵다느니, 국가고시에 합격했는데 소년 가장이라느니, 불리한 여건에서 기업을 일으켜 세웠다는 기사 같은 것 말이다. ‘차디찬 계절의 끝을 온몸으로 지탱하는’ 사람들이 ‘마침내 노오란 꽃망울 머금어 터뜨리는’ 순간에 우리는 손뼉 치고 눈물을 흘린다.
계포(季布)는 전국시대 말기 초(楚)나라 사람이다. 초나라에서 계포는 씩씩하고 의리 있는 사람으로 유명했다. 유방과 항우가 건곤일척 천하 패권을 놓고 다툴 때 항우가 이끄는 군대의 장군이 되어 여러 차례 유방을 궁지에 몰았다. 초한전(楚漢戰)에서 항우가 패하고 멸망하자 한고조(高祖) 유방은 현상금을 내걸어 계포를 수배했다. 숨겨주는 자에게는 죄가 삼족에 미칠 것이라고 엄령까지 내렸다. 계포에게 겨울이 시작된 것이다. 계포에게 봄은 어떻게 다가올까? 계포를 도운 조력자에 관심을 기울여 보자.
계포는 복양의 주씨(周氏) 집에 숨어들었다. 주씨가 계포에게 말했다.
“한나라에서 현상금을 걸어 장군을 급히 찾고 있으니 행방을 쫓아 곧 제집에 들이닥칠 것입니다. 장군께서 제 말을 들어 주신다면 제가 감히 계책을 말씀드리겠지만 따르지 못하겠으면 먼저 자결하여 주십시오.”
계포가 동의했다. 주씨는 계포의 머리를 깎고 목에 칼을 채우고 허름한 베옷을 입힌 뒤 수레에 실어 하인 수십 명과 함께 노땅에 이르러 주가(朱家)에게 팔았다. 주가가 어떤 사람인지 알면 주씨가 계포를 왜 주가에게 팔았는지 알 수 있다. [사기] <유협열전>에는 주가를 이렇게 평해 놓았다.
숨겨준 호걸들이 100여 명이었고 나머지 보통 사람은 말하지 못할 정도로 많았다. 그러나 끝까지 자신의 능력을 떠벌리지 않고 자신의 덕을 내세우지 않으며, 베푼 사람들과 만나는 것을 꺼렸다. 넉넉지 못한 사람을 구제할 때는 가난하고 천한 사람부터 시작했다. 집에 남아도는 재물은 없었다. 옷은 무늬가 보이지 않을 정도까지 입었다. 음식은 두 가지 이상을 먹지 않았다. 타는 것도 소달구지가 전부였다. 오로지 남이 급할 때 달려가는데 자신 일보다 더 심각하게 여겼다. 일찍이 곤경에 빠진 계포 장군을 몰래 구해주었는데, 계포가 나중에 귀한 몸이 되었지만 죽을 때까지 계포를 만나지 않았다.
이 정도 명성이라면 주씨도 주가의 명성을 들었을 테고 이미 말을 맞췄을 가능성이 크다. 주가는 마음속으로 그가 계포인 줄 알면서도 사들여 논밭을 경작토록 하고 자기 아들에게 엄하게 말했다. “밭일은 이 하인의 말을 따르고, 반드시 그와 같이 식사하도록 해라”
주가는 가벼운 수레를 타고 낙양으로 가서 여음후 등공을 만났다. 등공은 유방과 친구 사이로 처음 패 현에서 봉기할 때부터 함께 했고 황제로 즉위하는 데 이바지한 실세였다. 주가에게는 등공정도라면 어쩌면 계포를 살려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다. 등공은 주가를 집에 머물게 하고 여러 날 함께 술을 마셨다. 주가는 기회를 보다가 등공에게 물었다.
“계포가 무슨 큰 죄를 지었기에 황제께서 그렇게 급하게 잡아들이라 하십니까?”
등공이 대답했다.
“계포는 여러 차례 항우를 위해 황제를 곤경에 빠뜨렸습니다. 황제께서 그 일에 원한을 품고 계셔서 반드시 그를 잡으려 하시는 것이오.”
주가가 물었다.
“등공께서는 계포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등공이 대답했다. “어질고 총명한 사람이오.”
주가가 말했다.
“신하는 각자 자기 군주가 임명한 것이니 계포는 자기 직분을 다했을 뿐입니다. 그렇다고 항우의 신하를 모두 죽여야 한다는 말입니까? 지금 황제께서는 천하를 얻으신 지 얼마 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단지 사사로운 원한으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어째서 황제의 도량이 좁다는 것을 천하에 보이려 하십니까! 또한 계포와 같은 현명한 사람을 한나라가 현상금을 걸어 이렇게 급하게 찾고 있으니, 이는 계포를 북쪽의 흉노로 도주하게 하지 않으면 남월로 도주하게 할 것입니다. 무릇 장사가 미워서 적국을 이롭게 하는 것은 바로 오자서가 초 평왕 묘를 파내어 그 시신에 채찍질한 것과 같은 원인을 만드는 것입니다. 등공께서는 왜 조용히 황제께 말씀들이지 않으십니까?”
등공은 허락하며 대답했다. “그렇게 하겠소.”
‘꽁꽁 얼었던 샛강’이‘바닥부터 조금씩 물길을 열어 흐르’기 시작했다. 여음후 등공은 주가가 영웅호걸을 많이 숨겨주었다는 사실을 알았으므로 계포가 주가의 집에 숨어 있으려니 짐작했다.
등공은 기회를 기다리다 주가의 의도대로 황제에게 진언했다. 황제는 이에 계포를 용서하였다. 후에 황제를 알현하여 사죄하자 계포를 낭중에 임명했다. ‘마침내 노오란 꽃망울 머금어 터뜨리는’ 순간이다.
계포는 겨울과 같은 시련을 견뎌냈다. 머리를 깎고 목에 칼을 차고 허름한 베옷을 입은 뒤 노예로 팔렸다. 이렇게 인내하며 때를 기다리는 이유는 자기 능력을 믿기 때문이다. 살다 보면 봄날 꽃길만 걷지 못한다. 계포와 같은 수모를 당할 때도 있고, 이보다 더한 일도 겪을 수 있다. 이때 버텨야 한다.
계포는 욕을 당했지만 부끄러워하지 않고 아직 제대로 펼쳐보지 못한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여 끝내 한나라의 명장이 되었다. 현명한 사람은 진실로 자기 죽음을 중히 여긴다. 무릇 노비나 천한 자가 분개해 자살하는 것은 진정한 용기라고 할 수 없다. 자신을 믿고 참고 견뎌낸 계포가 훌륭한 이유다. 하지만 주가나 주씨, 등공 같은 조력자가 없다면 가능했을까. 얼음새꽃에게 햇볕의 조력이 있듯이 계포에게도 많은 조력자가 있었다. 감사한 일이다.
겨울 길섶이나 들판에 얼음새꽃만 있지 않다. ‘겨울 샛강, 절벽, 골짜기 바위틈’에는 수많은 들꽃이 자신의 꽃을 피우려고, 자신의 꿈을 키우려고 준비하고 있다. 결국엔‘저만치서 홀로 환하게 빛나는/그게 너였으면 좋겠다/아니 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