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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정환 Sep 04. 2023

넌 나의 마음을 너의 색으로 바꿔버렸다

다른 사람에게 영향력을 발휘하려면 신뢰를 얻어야 한다

                         진나라 문공이 원이라는 곳을 공격하기로 했을 때, 열흘분 식량을 준비하면서 대부들과는 열흘 안으로 함락하기로 기한을 정했다. 그러나 원에 이른 지 열흘이 지났지만 함락하지 못하자 문공은 종을 쳐서 병사를 물러나게 한 뒤 떠나려고 했다. 그때 원나라 병사가 성에서 나와 이렇게 말했다.


  “원은 사흘이면 함락됩니다.” 주위에 있는 신하들이 간언했다. “원은 식량이 떨어지고 힘이 다했습니다. 주군께서는 잠시 기다리십시오.” 

  그러자 문공이 말했다. 

  “나는 대부들과 열흘을 기한으로 정했는데 함락하지 못했다고 해서 떠나지 않는다면 신의를 잃게 될 것이오. 나는 원을 얻으나 신의를 잃는 일은 하지 않겠소.”

  문공은 마침내 병사를 거두어 떠났다. 원나라 사람들은 이 소식을 듣고 말했다. “그와 같이 신의가 있는 군주라면 항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는 문공에게 항복했다.      


  [한비자]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앞에서 증자나 위 문후가 보여준 행동과 같은 모습이다. 진나라 문공 처사는 고지식하다. 애초에 열흘 안에 전쟁을 마무리 짓기로 약속했어도 상황에 따라 며칠 정도 더 걸릴 수 있다. 문공은 융통성보다는 신의를 중히 여겼다. 권력을 가진 왕이라 하더라도 신하들과 한 약속을 철저히 지킨 것이다. 약속에는 사소한 것이 없다. 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않아 신뢰를 잃어버리면 그 사람은 어떤 말을 한다 해도 상대방을 설득하지 못한다. 그릇이 작은 자들은 약속과 이익이 상충할 때 약속을 저버려 신의를 잃는다. 신뢰는 물감과 같은 것이다. 서서히 다른 사람을 내 색으로 물들게 한다. 김정수 시인의 <물감>은 신뢰를 아주 잘 정의해 놓았다. 


  물통 속 번져가는 물감처럼
   아주 서서히 아주 우아하게
   넌 나의 마음을
   너의 색으로 바꿔버렸다.
  
   너의 색으로 변해버린 나는
   다시는 무색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넌 그렇게 나의 마음을
   너의 색으로 바꿔버렸다.

                          -<물감>, 김정수     


  다른 사람한테 신뢰를 얻으면 신뢰가 물감이 되어 상대를 자기 색으로 물들인다. 물론 ‘아주 서서히’ 물들기 때문에 조금은 답답할 수도 있다. 어쩌면 윽박지르고 강제하는 수단이 더 빨리 자기 말을 듣게 만드는 방법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방법으로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어렵다. 조금 더디더라도 신뢰는‘아주 우아하게’ 상대를 설득하는 방법이다.      


  조나라 효성왕 원년, 진(秦)나라가 조나라를 정벌하여 성을 세 개 빼앗았다. 조나라 왕이 새로 즉위하고, 마침 태후(효성왕의 어머니)가 정권을 휘두를 때, 진나라가 조나라를 공격한 것이다. 태후가 제나라에 도움을 요청하자 제나라 왕이 말했다. “반드시 장안군(태후가 총애하는 작은 아들)을 볼모로 삼아야만 구원병을 보내겠습니다.” 


  태후가 받아들이려 하지 않자 대신들이 힘써 간언했다. 태후는 주위 사람들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장안군을 볼모로 삼자는 말을 다시 하는 사람에게는 늙은 내가 반드시 얼굴에 침을 뱉고야 말겠다.”

  좌사 촉룡이 태후를 만나고 싶다고 하자 태후는 노여워하며 기다렸다. 촉룡이 궁에 들어와 작은 걸음으로 빨리 다가와 앉더니 스스로 사죄하여 말했다. “늙은 신하인 제가 발에 병이 있어 빨리 걷지 못하여 오래도록 만나 뵙지 못하였습니다. 제가 제 몸을 스스로 헤아려 보니, 태후의 옥체도 불편하실까 두려워 태후 뵙기를 원하였습니다.”


  “나는 가마에 의지하여 다닐 뿐이오.”

  “식사하는 것을 줄이지 않으셨습니까?”

  “죽에 의지하고 있을 뿐이오.” 

  “저는 최근에 전혀 먹고 싶은 마음이 없어서 일부러 하루에 삼사 리 정도를 걸어 조금씩 식욕을 돋우고 있는데, 이것이 몸에 편안한 것 같습니다.”

  “나는 그렇게 하지 못하오.” 태후의 굳은 안색이 조금 풀렸다.


  “제 비천한 자식 서기가 나이가 가장 어리고 어리석습니다만 신이 늙고 쇠하여 마음속으로 그를 가여워하고 있으니 원하건대 흑의(黑衣, 궁중 시위대가 입는 옷, 곧 궁중 시위대를 말함)의 결원을 보충하여 왕궁을 지키도록 해주시기를 무릅쓰고 아룁니다.” 

  “알았소. 나이가 몇이오?”

  “열다섯 살이 되었습니다. 비록 어리지만 제가 죽어 구덩이로 들어가기 전에 그 아이를 당신께 의탁하고자 합니다.”

  “대장부도 어린 자식을 사랑하고 아끼는가?”

  “부인들보다 심합니다.”

  태후가 웃으며 말했다. “부인들은 유독 심하다오.”

  “제가 스스로 생각하기에 태후께서는 장안군보다 연후(연왕에게 시집간 조태후의 딸)를 훨씬 더 아끼시는 것 같습니다.” 

  “당신이 틀렸소. 장안군 만큼 깊이 사랑하지는 않소.”


  촉룡이 말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려면 자식의 미래를 위하여 길게 보고 계획을 짜야 합니다. 태후께서 연후를 시집보내실 때 연후의 발뒤꿈치를 붙잡고 우셨는데 그토록 멀리 가는 것을 생각하면 슬픈 일이지요. 이미 갔다 해도 그리워하지 않을 수 없으니 제사를 지낼 때 축원하여 말하기를 ‘반드시 연후로 하여금 되돌아오지 말게 하라.’고 하실 것이니, 연후의 먼 미래를 위해 생각하시는 바는 연후 자손이 대를 이어 연나라 왕이 되기를 바라시는 게 아니겠습니까?”

  “맞아요.”

  “지금부터 삼 대 이전에 조나라 군주 자손 가운데 후에 봉해진 자의 후계자 중에서 현재 자리에 있는 자가 있습니까?” 

  “없소.”

  “단지 조나라뿐 아니라 다른 제후들 자손 가운데 지금도 자리에 있는 자가 있습니까?”

  “나는 듣지 못했소.”


  “이는 가까이 있는 화는 자신에게 미치고, 멀리 있는 화는 자손에게 미치기 때문입니다. 어찌 군주 자손으로서 후에 봉해진 자들 모두가 선하지 않겠습니까? 지위는 존귀하면서도 공은 없고, 녹봉은 후하면서도 공이 없습니다. 진귀한 보물만 몸에 많이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태후께서 장안군 지위를 올려 주시고, 그에게 기름진 땅을 봉토로 주시며, 그에게 귀중한 보물을 많이 주셨으나, 지금 장안군이 나라를 위해서 공을 세우게 하지 않으신다면, 태후께서 하루아침에 돌아가시는 경우 장안군이 어떻게 스스로 지위와 재물을 보전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태후께서 장안군을 위한 계책이 짧다고 생각하여 장안군을 아끼는 마음이 연후만 못하다고 한 것입니다.”

 “알았소. 당신 뜻에 따라 그를 보내시오.” 이에 장안군을 위해서 마차 100대를 약조하고, 제나라에 볼모로 보내니 제나라는 병사를 즉시 내주었다.      


  촉룡이라는 신하가 고집을 부리는 태후를 설득하는 장면이다. 촉룡이 태후를 어떻게 자신의 색으로 물들이는지 눈여겨봐야 한다. 촉룡은 다짜고짜 아들을 볼모로 보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먼저 태후의 건강과 안부를 묻고, 태후의 굳은 안색이 조금 풀리자 자식 이야기를 꺼내며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은 남자나 여자나 똑같다며 태후의 마음에 공감한다. 그러고 나서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을 건드리고, 자식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미래를 위하여 길게 보고 계획’을 짜야 한다고 아뢴다. 그다음 장안군을 위하는 길은 나라에 공을 세울 기회를 주는 것이며, 그래야 지위와 재산을 스스로 보전할 수 있다며 태후를 설득한다. 촉룡의 설득 과정은 무엇보다 공감의 승리다. ‘물통 속 번져가는 물감처럼/아주 서서히 아주 우아하게’ 촉룡은 태후의 마음을 자신의 ‘색으로 바꿔버렸다.’    

 

  이야기 하나를 더 보자. 다른 사람을 자신의 색으로 물들이려면 다른 사람을 위해 기꺼이 손해 볼 줄 알아야 한다. 제나라 사람 풍훤(馮諼)은 집이 매우 가난해서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맹상군에게 사람을 보내어 식객으로 들어가고 싶다고 청했다. 맹상군은 두말없이 받아들였다. 


  어느 날 맹상군은 풍훤에게 설읍(薛邑)에 가서 빚을 받아 오라고 했다. 풍훤이 길을 나설 때 맹상군에게 물었다. “빚을 다 받으면 무엇을 사 올까요?” 그러자 맹상군이 답했다. “우리 집에 무엇이 부족한가를 보고, 부족한 것을 사 오게.”


  설읍에 도착한 풍훤은 빚을 진 사람들을 모두 불러 모아서 채무를 하나하나 대조해 보게 했다. 그러고는 맹상군이 빚을 탕감해 주기로 했다고 선포한 다음, 빚 문서를 사람들이 보는 데서 불태워 버렸다. 백성이 맹상군에게 감사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이튿날 풍훤은 도성으로 돌아왔다. 맹상군은 풍훤이 빨리 돌아오자 매우 놀라워하며 이렇게 물었다. 


  “빚은 다 받아왔는가?”

  “네, 다 받았습니다.”

  “그럼 무엇을 사 왔는가?”

  “분부대로 공자님 댁에 없는 것을 사 왔습니다. 소인이 보건대 공자님 댁에는 다른 것은 다 있는데 오직 ‘의(義)’가 부족한 것 같아서 ‘의’를 사서 돌아왔습니다.”


  맹상군이 어리둥절 해하자 풍훤이 말을 보탰다. 

  “소인은 공자님 허락도 없이 사사로이 공자님 결정이라고 꾸며, 그들의 빚을 모두 탕감해 주었습니다. 빚 문서도 전부 다 태워 버렸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은 하나같이 공자님의 은덕을 잊지 않겠다고 소리쳤습니다. 이렇게 소인은 공자님에게 ‘의’를 사 왔습니다.” 


  맹상군은 속으로는 몹시 언짢았지만, 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일 년 후에 제나라 민왕이 맹상군 직위를 파면하자 어쩔 수 없이 봉읍지인 설읍으로 내려가야 했다. 소식을 들은 설읍 백성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백 리 밖까지 나와서 맹상군을 기다렸다. 이 광경을 본 맹상군은 크게 감동하며, 풍훤을 돌아보며 말했다. 

  “오늘에서야 비로소 자네가 사 왔다는 ‘의’를 이 두 눈으로 보게 되었네.”     


  다른 사람에게 영향력을 발휘하려면 신뢰를 얻어야 한다. 신뢰의 물감이 있어야 다른 사람을 나의 색으로 바꿀 수 있다. 진나라 문공은 다른 사람과 한 약속을 철저히 지킴으로서 신뢰를 얻었다. 촉룡은 공감으로 신뢰를 얻었고, 맹상군은 빚을 탕감해 주는 희생으로 신뢰의 물감을 얻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쉽게 약속을 저버리거나 조금도 손해 보지 않으려는 태도는 다른 사람 마음을 결코‘너의 색으로’바꾸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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