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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펜타멀스 Mar 19. 2022

25년 만의 등산

택배로 배낭을 받았다. 그가 보낸 문자를 받고 인터넷으로 구매한 것이다.


‘그동안 인도와 네팔을 여행하면서 보고 느끼고 배운 것들을 한 권의 책으로 정리하고 있다. 잠시 머리 좀 식힐 겸 오랜만에 너하고 등산이나 같이 하고 싶은데, 속리산 어때? 이번 주 토요일에 서대전역에서 만날까? 필요한 것은 내가 다 준비할 테니 너는 배낭만 메고 와라.’


오랜만이라고는 하지만 배낭을 메고 그와 함께 산에 간 것은 수십 년 전이었다. 가끔씩 그를 만날 때도 산에 가자는 말은 없었던 그가 웬일로 이런 문자를 보냈을까. 갑자기 이상한 느낌이 들어 그에게 전화를 해볼까 생각하고 있는데 또 하나의 문자가 왔다. 

‘근데, 내 옆집에 살고 있는 의사 부부가 나를 보더니만 글쎄 내가 앞으로 살아갈 날이 1년밖에 남아 있지 않다고 하더라. 췌장암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너만 알고 있어라. 너에게 처음으로 말한 거야.’


“이 자식, 무슨 뚱딴지같이 난데없는 소리야.”

믿기지 않는 그의 문자를 코웃음 치며 무시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불길한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는 결코 이런 장난 문자를 보낼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1년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니. 갑자기 정신이 멍해지고 ‘췌장암 ’, ‘속리산 등산’, ‘서대전역’ 등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돌아다녔다. 머리를 흔들며 정신을 가다듬고 문자를 다시 읽었다. 문자 끝에 ‘너에게 처음으로 말한 거야’가 까닭 없이 가슴을 짓누르고, 그가 속리산을 등산하자고 하는 이유를 조금씩 느끼기 시작하면서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이 몰려왔다.


우리가 배낭을 메고 처음으로 산에 오른 것은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였다. 모든 것을 그가 계획하고 추진한 속리산 등산은 조금 무모한 결정이었지만 그 후로 우리 추억담에 빠지지 않은 소재였다. 뒷동산도 아니고 속리산을 고등학생 둘이서만 등산했다는 것이 우리들에게 많은 이야깃거리를 남겨 준 것이다.


그 해 여름방학이 시작하기 전부터 그는 등산 준비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였다. 저녁마다 우리는 그가 준비한 내용을 꼼꼼히 살펴보며 등산 미리 보기를 되풀이했다. 그는 들떠 있었고 나는 그의 열정에 빠져들었다. 지리부도를 펼쳐 놓고 등산 일정을 시간대별로 정리해 나가는 그의 진지함은 아직도 내 기억 속에 가장 멋진 모습으로 남아있다. 대부분의 등산장비도 그가 마련했는데 나는 처음 본 것들이 많았고 이름도 생소했다. 그가 어떤 장비를 들고 그 사용법을 설명할 때는 마치 전문 산악인처럼 보이기도 했다.


집을 떠난다는 약간의 불안과 큰 설렘을 안고 마침내 우리는 속리산 등산길에 올랐다. 형이 빌려준 배낭과 등산조끼가 전부였던 나는 촌놈 서울 초행길 나서는 심정이었지만, 그는 준비된 경험 많은 장수가 전쟁터에 나가는 것처럼 위풍당당했다. 서대전역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옆자리에 앉아있던 어떤 중년 남자가 우리를 보고 귀엽다는 듯 말을 걸어왔다.

“너희들 둘만 가는 거니? 용감하네!” 

용감한 것은 분명한데 우리는 상당히 긴장하고 있었다. ‘좋은 경험이 될 거야’라면서 이러저러한 얘기를 해준 그 아저씨를 우리는 삼촌이라 생각했고, 그 삼촌은 우리가 나중에 추억담을 나눌 때 어김없이 등장했다.


많은 등산객들로 초만원이었던 버스를 타고 속리산으로 들어가면서 긴장감은 경외감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속리산에 발을 내딛으면서 우리의 등산 일기장에 써야 할 내용은 넘쳐나기 시작했다. 어리숙한 등산 초보자 두 명이 산속에서 마주치는 일들은 어느 것 하나 익숙하지 않았고 생경할 뿐이었다. 우리는 경험 대신 생각과 느낌으로 하나씩 헤쳐 나아가야 했다. 하다가 안 되면 어색한 웃음과 함께 “처음에는 다 그런 거야”라며 서로를 위로했지만, 도전에 대한 성취감을 맛보며 거만한 웃음을 주고받는 일도 많았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 우리가 겪은 일들을 그는 생생한 현장감을 살려 풀어내기도 한다. 특히 어느 조그마한 다리 밑에서 텐트를 치고 있을 때 지나가던 스님이 장난기 섞인 어투로 우리에게 했던 말을 그는 곧잘 흉내 냈다. 

“어허, 거기서 자다가 밤새 큰비라도 오면 부처님도 못 만나고 저승으로 간다네!” 

어떤 때는 나는 기억도 못하는 여행담을 쏟아 내며 그는 혼자 즐거워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우리는 지역이 다른 대학으로 각기 진학하면서 만남이 뜸해졌다. 어찌어찌하여 서로 시간을 조율하고 네댓 번 등산을 하긴 했지만 등산에 대한 나의 적극성 부족으로 길게 이어지지는 못했다. 각자 가정을 꾸리고 나는 직장생활을, 그는 자영업을 하며 우리가 만나는 것도 일 년에 고작 한두 번이었고 건너뛰는 해도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내가 근무하는 학교로 엽서 한 장이 배달되었다. 

‘너에게 고백하는데, 나 지금 인도에 와 있다. 먼 길 날아와 홀로 걷는 여행길, 가끔 발걸음이 무거울 때 니가 생각나는구나.’  


배낭 메고 떠나는 것을 좋아한 그가 혼자서도 산행을 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인도까지 갈 줄은 몰랐다. 해외여행이 쉽지 않은 시절이었고 배낭여행은 모험심 강한 용기 있는 젊은이들이나 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나는 엽서를 들고 한참이나 그의 아우라에 젖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해마다 가족 외에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혼자 인도와 네팔로 배낭여행을 하고 있었다. 나에게 보낸 그 엽서 고백이 가족 말고는 다른 사람에게 말한 처음이었다.

“너에게 처음으로 말한 거야. 진즉 말하려고 했지만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괜히 자랑이나 한 것 같아 참아 뒀지.” 

“혼자 배낭 메고 인도에 가는 것이 별것이 아니라고? 대단한 친구 나셨네! 그렇다고 설마 인도에 가서 다리 밑에 텐트 치는 일은 없는 거지?”


몇 년간의 여행을 통해 그는 이미 자기 나름의 인도 네팔 전문가가 되어 있었다. 그러면서 우리가 만나게 되면 고등학교 2학년 때의 속리산 등산 얘기보다 그의 인도 네팔 여행담이 더 많아졌다. 나는 그가 카메라에 담아온 사진들을 보며 경탄을 연발했고, 신기롭기까지 한 그의 이야기에 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나는 그에게 말이 아닌 글로 여행담을 써보라고 권했다. 그는 글을 써본 적이 없고 괜히 창피당하는 것 아니냐며 머뭇거렸지만, 나는 더 강하게 밀어붙였다.


다음 해 그는 나에게 원고 하나를 보냈다. 어느 지방신문에 기고할 것이라며 손을 좀 보라는 것이었다. 

“니가 시킨 것이니 니가 책임져라.”

그의 글에는 많은 사유와 성찰이 담겨있었다. 그와 오랜 친구이고 많은 이야기를 나눴는데도 그동안 보지 못한 그의 깊은 내면을 볼 수 있었다. 글을 마무리하는 부분에서 나는 그의 또 다른 고백을 듣기도 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배낭을 처음 멨고 그것이 나의 인생의 이정표가 되었다. 그때 함께 배낭을 멨던 친구는 나의 자신감과 에너지의 원천이고 나를 나답게 만들어준 스승이다.’

인도에서 띄운 엽서 한 장으로 나를 놀라게 하더니 이제는 그의 말을 들어준 것밖에 없는 나를 스승이라 하며 감동시켰다. 그 후로도 그는 계속 배낭여행을 했고 몇 편의 기행문을 더 썼다. 그의 여행담은 갈수록 깊이를 더했다. 어느 부분에서는 신비주의 흐름도 느낄 수 있었다. 


택배 박스에서 배낭을 꺼내 놓고도 여전히 그의 문자를 믿고 싶지 않았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1년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니. 제발 장난친 거라고 말해 주라. ‘놀랐지? 거짓말이야!’라는 문자가 다시 오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무거운 침묵만이 나를 누르고 있었고, 그와 함께했던 시간들이 순간순간 떠오르며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배낭에 얼굴을 파묻고 한없이 울기만 했다.


토요일 아침 나는 배낭을 메고 서대전역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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