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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나가다 May 28. 2024

정신과 첫 방문

  긴장되는 마음으로 전화를 걸었다.

“혹시 거기 예약해야만 진료 볼 수 있나요?”

“저희는 따로 예약은 안 받고요. 오셔서 기다리시면 돼요.”

“그럼 15분 뒤쯤 가도 될까요?”

“네 오세요.”     

  

  맘카페에서 적당히 괜찮다는 정신과를 찾았고 그중에서 가까운 곳을 골라 전화를 했다. 아주 일상적이고 친절한 목소리가 들렸기에 조금은 안심하고 찾아갔다. 세상에. 사람이 이렇게 많다니.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학생부터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남녀노소라는 말은 정말 이런 곳에 쓰는 게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들은 모두 뭐가 그렇게 힘들어서 여기까지 왔을까. 그냥.. 누구나 문제는 가지고 있는 것 같아서 괜히 위안이 됐다.


  처음 등록을 하니 진료를 기다리면서 편하게 표시하라는 문진표를 받았다. 문진표에는 최근 2주일 동안의 증상을 주로 묻고 있었다. '잠은 잘 자는지, 체중의 변화는 없는지, 일주일에 술은 몇 번이나 마시는지, 우울하다고 느끼는지, 불안하다고 느끼는지, 자신이 존재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지' 같은 것이었다. 나는 최대한 솔직하게 체크하려고 노력했다. 매일 2시간마다 깨는 것이 사실이었고, 체중은 다이어트를 해서 빠진 거라고 생각했고, 일주일에 술을 주 5회 정도 마시고, 무기력하다는 것을 솔직하게 고백했다. 다행히 내가 그렇게 쓸모없는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직 의사를 대면한 것도 아닌데 아침부터 아이에게 화낸 것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눈물이 줄줄 나왔다.    


  주위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들이다. 마치 익숙하게 목이나 코가 좀 아파서 이비인후과에 온 사람들 같았다. 그 안에서 나만 혼자 정신과 첫 방문을 팍팍 티 내며 눈물을 닦아내고 있었다. 워낙 사람이 많아서 1시간이나 기다리고서야 내 차례가 왔고, 긴장되는 마음으로 진료실 옆 벽에 적혀있는 ‘진료 없이 약만 처방받는 것은 불가합니다’라는 문구를 한없이 바라보았다. 의사는 50대쯤 되어 보이는 남성이었다.      


“자. 어디가 불편해서 오셨을까요?”

“육아 우울증 같아서요.”

“아이가 지금 몇 살이죠?”

“이제 막 9살 되는 남자아이요.”

  

  남자 의사는 너무나 차분했다. 하긴 별의별 사람들을 다 만나봤으니 초면에 말 꺼내기가 무섭게 울음이 터져버린 여자가 신기할 리도 없겠지. 나는 육아를 할 때 무엇이 괴로운지 예를 들어 이야기했다.     

“말을 얼마나 못됐게 하는지 몰라요. 밥도 너무 늦게 먹고요. 보고 있으면 울화통이 터져요. 그래서 소리도 많이 질렀는데 그러고 나면 너무 후회되고, 감정이 주체가 안 돼요. 제가 아이를 미워하는 것 같아요. 하루종일 기분이 안 좋고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입맛이 없어요.”     


  그 후 아이가 어떤 말을 하는지 자세히 얘기하자 의사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어린애가 그런 말도 해요? 말을 잘하나 보네요. 학교에서 문제가 있다거나 적응을 못하거나 하지는 않나요?”

“그렇진 않아요. 7살까지는 괜찮았거든요. 저도 얘가 지금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지금 가장 원하는 게 어떤 거세요? 우울한 마음이 가장 문제인가요? 아니면 감정 조절이 안 되는 게 가장 문제인가요?”

“감정 조절이 잘 안 되는 게 문제 같아요. 저도 모르게 너무 크게 화를 내요.”

“혹시 아이를 때린 적 있으세요?”

“아니요. 때리면 안 되죠. 때리고 싶다고 생각은 해요. 상상으로는 몇 백번도 때렸죠. 하지만 실제로 때리진 않았어요.(가끔 등짝을 때린 적은 있지만) 대신 엄청 크게 소리를 지르고 아예 방으로 들어가 버려서 몇 시간 동안 보지 않은 적도 있어요.”     

  

  그 뒤로도 의사는 아이를 때렸느냐고 몇 번이나 더 물어봤다. 나는 계속 때리지 않았다고 얘기했다. 기분이 묘했다. 내 말이 거짓말 같았을까? 그리고 인상 깊은 말을 들었다. 순간 난 교과서를 읽는 것 같았다.     


“밖에 나가서 사람들을 많이 만나셔야 해요. 만나서 밥도 먹고 수다도 떨고요. 혼자 하는 여행보다 사람을 만나세요.”

  

  이 사람은 육아를 해보지 않은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내 나이 또래의 친구들은 대부분 워킹맘이거나 전업이어도 어린아이를 돌보느라 정신이 없다. 게다가 친한 친구들은 공대 남편들을 따라 멀리 타지에 나가 있고 나 역시 연고도 없는 경기도에 발령받아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편하게 대화할 상대도 없을뿐더러 만나서 식사를 하며 놀 시간도 없다는 사실을 의사는 잘 모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의사와는 초면인 데다가 그 와중에도 내가 스스로 조금은 이미지 관리를 하고 싶었는지 의아한 표정을 접어두고 얌전히 1주일 치의 약을 타서 나왔다. 1주일간 약을 먹으면서 부작용이 없는지 살피고 약의 종류와 양을 계속 조절한다고 했다. 정신과 약은 약국을 들르지 않도록 병원에서 조제해 주어 편했다. 아무래도 약국에 정신과 처방전을 내보이기 싫은 사람들의 부담을 아는 것이겠지. 나는 약을 가슴에 품고 어서 이 약이 마법의 물약처럼 내 감정을 편안하게 해 주길 바랐다. 예전 면접시험에 일시적으로 항불안제를 처방받아먹고 효과를 보았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으므로 마음이 한결 편했다. 그날 나는 남편이 날 어마어마한 환자라고 생각할까 하는 노파심에 감기가 걸렸을 때 병원에 가는 것처럼 마음이 아픈 것을 스스로 인지해서 정신과에 찾아간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얘기했다. 그냥 내가 이만큼 힘들었다는 것만 알고 조금만 나를 이해해 주면 된다고. 다행히 남편은 편안하게 내 얘기를 듣고 약간의 위로의 말을 해주었다. 담담하게 반응해 주어 고마웠다.

 

  일주일 동안 약을 먹었고, 수면 패턴은 좋아지지 않았다. 감정은 조금씩 무뎌졌지만 식욕이 사라졌다. 하루에 한 끼밖에 먹지 못했고 그나마 꾸역꾸역 먹었다. 음주는 최대한 자제하라고 해서 괴로웠다. 평소와 같은 아이에게 똑같이 화가 났지만 화내기 귀찮은 느낌에 화를 내는 빈도는 줄어들었다. 그 뒤로 지금까지 한 달 동안 꾸준히 병원을 다니며 나는 의사의 처방에 따라 조금씩 약을 늘려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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