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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나가다 May 31. 2024

내 아이를 귀한 손님처럼

  얼마 전 카톡 프로필에 ‘내 아이를 귀한 손님처럼 여겨라’라고 적었다. 유퀴즈에 나왔던 이름도 특이한 김붕년 선생님이 했던 말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박수를 치며 크게 공감하고 평소에 실천하겠다는 의지로 프로필로 해 놓았었다. 하지만 실제로 내 아이를 귀한 손님처럼 여기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오늘 아침에는 초등학교 1학년인 동동이에게 책가방을 싸라고 잔소리하다가 그림일기장을 가방에 넣지 않은 것을 보고도 못 본 척했다. ‘자기가 준비물을 못 챙긴 것의 결과도 겪어봐야 하는 거지..’하는 마음이었지만 엄마 마음속에서는 열불이 난다. 빤히 앞에 보이는 공책도 못 챙기니 말이다.     


“너 다 챙긴 거 맞아? 잊어버린 거 없지?”

“네! 다 쌌어요! 전부 챙겼어요. 물통도 넣었고, 핸드폰도 넣었고 하나도 잊어버린 거 없다구요~!”

  그 당당한 자신감에 더 화가 났다. 월요일에 검사하는 일기장이 떡하니 거실 테이블 위에 있는 데도 천하태평이다. 학교에 다녀와서는 다짜고짜 영어숙제가 이해가 안 된다고 아이가 짜증을 낸다.     


“어떤 영어 공책에 쓰라는 거죠? 영어 공책이 어디 있어요?

“그걸 나한테 물어보면 어떡하니? 영어 공책이 없으면 학원에 가서 선생님한테 직접 물어봐야지!”

“오늘 숙제는 정말 이해가 안 돼요!”

“어떤 부분이 이해가 안 되는지, 숙제 알림장을 펴놓고 짚으면서 말해야 엄마가 알지. 니가 그렇게 말하면 엄마도 알 수가 없잖아! 앞으로 모든 선생님한테도 그렇게 질문하지 마. 니가 어떤 부분이 이해가 안 되는지 정확히 짚어서 질문하란 말이야!”


  괜히 너무 짜증이 났다. 엄마 없이는 아무것도 못하는 8살이라니. 뭔가를 잘 못 하는 것보다 혼자 해보려는 의지가 없는 것 같아서 속상했다. 동동이는 잘 안 되는 일 앞에서 아직 차분하지 못했고, 엄청나게 짜증을 내는 것으로 반응하고 있었다. 문득 나의 8살 시절이 떠올랐다. 학교에 데려다준 사람도 없었고, 숙제 검사를 해 준 사람도 없었다. 지금 시대를 나의 시대와 비교하면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괜스레 약이 오르고 서글퍼졌다. 아이가 짜증부터 내자 나 역시 짜증으로 되받아쳤다. 소리소리 지르고 나자 후회와 죄책감이 밀려왔다.

  

  귀한 손님이란 무엇일까. 귀한 손님이란 우리 집에 있는 동안 정말 좋은 기억만 가져가 주기를 바라는 대상일 것이다. 그 대상을 위해 나는 맛있는 음식을 준비하고, 취향에 맞는 놀거리를 마련하고, 화장실을 비롯해서 깨끗하게 집안을 청소할 것이다. 또 항상 웃는 얼굴로 맞이하는 것도 잊지 않을 것이다. 사람의 표정은 상대의 기분에 큰 영향을 미칠 테니까. 그리고 상대가 관심 있을 만한 주제를 끊임없이 생각하며 화제를 전환하고 상대의 이야기를 경청할 것이다. 이런 태도에 상대는 자신이 존중받고 있다고 느낄 테니까.


  그런데, 내 아이를 그렇게 대할 수 있을까? 집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아이가 좋아하는 음식을 차리고, 아이가 요즘 관심이 있는 포켓몬스터에 대해 공부하고 대화하며 아이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 주면 된다. 말은 참 쉽다. 실수를 하더라도 웃으면서 이해해 주면 된다. 그게 왜 아이에게는 잘 되지 않을까? 나도 모르게 아이에게 기대하는 것들이 있나 보다. 생활태도, 학습태도, 예의범절, 성실성 등 어른인 나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들이다. 그럼에도 아이에게 기대치가 높다 보니 그 기대치에 미치지 못할 때 나의 짜증 나는 표정을 아이에게 감출 수가 없다. 몇 마디 말로 쉽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이것도 못 풀면 너는 수학은 틀렸다느니, 타고난 머리가 없으니 노력밖에는 길이 없다느니, 아이의 시무룩한 표정은 아랑곳하지 않는 날도 많다. ‘좀 엄하게 해야 정신을 차리지.’ 같은 생각으로 내 언행을 합리화하기도 한다.      

  

  그러다 오늘 문득 머릿속에 물음표 하나가 떠다녔다. 내가 아이를 키우는 목적은 무엇인가. 결국 아이가 홀로 서서 나 같은 보호자가 없이도 독립해서 행복한 삶을 살게 하는 것이 목적인데, 많은 날에 나는 자주 그것을 잊고 내 아이가 나보다 더 좋은 대학을 나와서 나보다 더 많은 것들을 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가득하다. 또 어떤 날은 우리보다 훨씬 벌이가 좋은 아주버님네가 자식들에게 쏟아붓는 사교육비를 들으며 그것에 반도 못 해주는 우리 형편일지라도 내 아이가 더 좋은 대학에 들어가면 어떨까 하는 상상도 한다. 유별나게 하지 않아도 그냥 아이가 잘하는 상상. 말이 안 되는 상상을 하면서 조금 웃는다. 그럴 가능성은 낮다고 생각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이다. 그래서 손님에게처럼 너그럽게 대하지 못한다.


  독립해서 행복하게 사는 데에 좋은 대학과 좋은 직장도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만을 목적으로 살면 얼마나 각박할까. 나는 어떤가. 엄청 좋은 대학을 나오지는 못했어도, 직업을 가지고 경제적으로 독립해서 살고 있다. 행복하다고 느끼고 싶을 때마다 어릴 때 부모님과 좋은 추억도 만들지 못했고, 지독하게 외로웠던 기억으로 넘쳐나는 유년기가 계속 내 발목을 붙잡고 있다. 마치 그 기억들이 내게 “행복해지지 마, 넌 행복할 수 없어.”라고 속삭이는 듯하다.


  매일매일 사소하게 나와 싸우고 있다. 내 아이를 귀한 손님처럼 대해야 한다면서 아이에게 집착하느라 종속적인 존재처럼 대하는 현실을 보며 이건 아니라고 자꾸 놓고 또 놓는다.      

  

  월요일 아침 몸이 좋지 않아 아이를 깨우고 다시 침대에 눕자 아이가 대뜸 말한다.     

“엄마! 저는 이렇게 힘들게 밥 먹고 가방 싸고 일하고 있는데 엄마는 이렇게 누워서 노는 거예요?”


  아이의 말이 내게 정신 차리라며 뒤통수를 후려친다. 벌써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된 건가? 이렇게 생각이 자란 건가? 나는 유치하게도 엄마는 할 일이 많으니 잠시 쉬는 거고, 내일부턴 바쁘니 너를 깨우지 않겠다며 직접 일어나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고는 뜨끔했다. 아이의 눈에는 내가 어떻게 보이는 걸까? 이제 아이도 주위 돌아가는 흐름을 눈치껏 다 알아 가는데 나는 왜 아직도 내 아이가 미성숙하다고만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행동은 어른처럼 하길 기대하면서 말이다. 참 모순적인 마음이다. 정작 나는 아이에게 어른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나. 부끄러웠다. 나부터 조금 더 어른이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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