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왜 무표정이야? 난 엄마 웃는 모습이 좋은데.. 엄마 웃으면 안 돼?”
멍하게 소파에 앉아 핸드폰으로 우울증 극복방법을 검색하는데 아이가 문득 내게 물었다. 그 물음에 또 작게 무너진다. 가슴이 답답해서 크게 숨을 쉬면 아이는 엄마가 한숨을 쉰다고 걱정했다. 그럼 난 서둘러 변명하듯 말한다.
“엄마 필라테스 다니는 거 알지? 이거 필라테스에서 배운 호흡법이야 건강에 좋은 거야.”
반은 진짜고 반은 가짜다. 실은 한숨이지만 그래도 살려고 쉬어보는 복식호흡이다. 아이는 아직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왜 나는 우울해졌나. 예전에는 모든 것이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생각했다. 누구나 살다 보면 겪게 되는 문제들 앞에서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햇빛을 보며 운동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건강한 음식을 먹으면 당연히 몸도 마음도 건강해진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나는 우울한가. 휴직을 했고, 꽤나 열심히 움직이며 나에게 주어진 책임을 다하려고 노력했고, 운동도 하고 햇빛도 보는데, 그런 노력과 의지가 무색하게 좋아지지 않는 상태가 있다는 것도 인정해야만 했다. 그동안 우울함은 나약함에서 온다고 생각했던 내가 얼마나 오만했는지를 알게 되자 낯이 뜨거웠다. 역시 남의 일은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직접 겪기 전까지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 태반이다.
일상의 루틴을 유지하려고 부단히 애쓰는데 그냥 너무너무 싫다. 일어나기 싫고, 아이를 돌보기 싫고, 말하기 싫고, 웃기 싫고, 집안일하기 싫고, 먹기 싫고, 운동하기 싫다. 어떤 일에 집중하는 것이 어렵고 요리를 하려고 사둔 재료는 냉장고에서 썩고 있다. 의사는 사람들을 만나서 수다를 떨라고 했으나 딱히 만나고 싶은 사람도 없다. 자주 보던 사람과의 만남도 귀찮아졌으니까.
열심히 살다가도 큰 계기 없이 갑자기 이럴 수 있나. 육아 하나가 그렇게 굉장한 일인가. 왠지 억울하고 화가 나서 하루종일 어찌할 바를 모르는 내 모습이 낯설었다. 노력해도 나의 계획대로 결과가 나오지 않는 육아는 내게는 정말 큰 스트레스다. 육아로 속상할 때, 남이면 안 보면 그만일 테지만 내 아이를 안 볼 수도 없는 데다가 심지어 잘 컸으면 하는 욕심이 자꾸 화를 부른다. ‘나만 이런 걸까. 설마 아니겠지. 이런 시간도 또 지나가겠지.’하고 스스로 위로해 봐도 잠이 오지 않는다. 벌써 몇 주 째 밤을 새우거나 주말에는 남편을 믿고 종일 자거나 하고 있다. 수면 패턴은 엉망이지만 그래도 아이 밥 해줘야 하고 빨래해야 하고 대충이라도 집 청소를 해야 하니 움직여 볼 수밖에.
“하기 싫어. 하기 싫어. 하기 싫어 죽겠네.” 모든 일상에 연신 입 밖으로 내뱉게 되는 말이다. 누가 듣는 것도 아닌데 하기 싫음의 확신을 확인이라도 하는 것 같다. 입맛이 없어서 밥을 안 먹어도 되는 건 편하다. 밥을 차리지 않아도 되고 치우지 않아도 되니까. 그러다 보니 어느새 몸무게는 42kg을 바라보고 있다. 문제가 있긴 한 것 같다. 자주 어지러움이 느껴졌다. 억지로 나가 조금 걸었다. 흐린 날씨를 뚫고 일본어 선생님인 나츠미를 만났다. 대화 주제도 딱히 없고 해서 어설픈 일본어로 지금의 내 상황을 설명했다. 나츠미는 차분히 내 얘기를 듣고 공감해 주었다. 이상하게도 외국어로 대화를 하니 눈물이 나지 않았다. 유창하지 않은 외국어를 사용하는 것은 감정을 어느 정도 차단해 주는 것 같다. 누구라도 붙잡고 얘기하니 조금 나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나츠미에게 얘기했던 대로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있다. 나는 왜 우울해졌나. 감기처럼 잠깐 뇌가 고장 난 걸까. 긴장의 끈을 놓친 걸까. 더 힘든 일도 많았는데 왜 하필 지금일까. 세로토닌이고 도파민이고 앞에 먹을 수 있는 정제로 되어 있다면 한 움큼 집어 와그작 씹어 삼키고 싶다. 이렇게 가라앉고 가라앉아 누운 채로 바닥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떨어지는 기분은 정말 최악이다. 어디까지 내려가려나. 이럴 때는 위로 올라오려고 발버둥 치는 게 맞을까? 끝까지 내려가 보는 게 맞을까?
1월의 어느 겨울날, 나는 집에서 가출하듯 튀어나왔다. 이상하게 도저히 숨이 막혀 집에 있을 수가 없었다. 육아만 빼고는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게 놓지 못할 한 가지가 육아라는 사실에 현타가 온다. 육아를 오롯이 책임지느니 30일 연속 야근이 당연히 훨씬 더 편할 것이다. 남편에게 제발 나 좀 집에서 나가게 해달라고 메시지를 보낸 뒤 급하게 서울에 2박 호텔을 예약했다. 이틀 동안 무엇을 할지는 생각해보지도 않고 그냥 책 몇 권을 챙겨 나왔다.
살고 싶어서 나온 거리에는 밝고 천진해 보이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다들 행복해 보인다. 실제로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카페에 들어가 아무 생각 없이 책을 읽으니 좀 살 것 같았다. ‘누군가는 금요일 낮에 카페에서 책을 읽고 있는 나를 보고 팔자 좋다고 생각하려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 앞으로는 평일 낮 시간에 여유 있게 커피를 마시는 누군가를 속단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사람들이 마시는 저 쓰디쓴 커피가 교양이나 취향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겨우 이제야 안다. 우울증 약은 한 달 넘게 먹어도 큰 차도가 없는 느낌이다. 다른 병원을 가봐야 하나 생각하면서 드라마틱한 변화를 기대했던 내가 조금 바보같이 느껴졌다. 그래도 증세가 호전되려면 몇 달은 꾸준히 약을 먹어야 한다는 의사의 말을 믿어보려고 한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글을 쓰면 기분이 좀 나아진다는 것이다. 어느 날은 고통스러운 글을 쓰고, 어느 날은 내가 너무 나약하다고 고백하는데 요즘은 끝없이 아래로 떨어지는 것만 같아 겁이 나서 동아줄을 잡는 마음으로 쓴다. 재미는 없지만 조금이라도 기분이 나아지니까. 소통하고 싶지만, 한편으로는 소통을 바라지 않는 마음으로 쓰게 된다. 이렇게 부족한 나를 고백하는 글을 쓰고도 기분이 나아지고 위안이 되는 것을 보면 글쓰기에 치유의 힘이 있다는 내 믿음이 굳건해진다. 쓰는 것이 쓰지 않는 것보다는 낫고, 지금의 어려움을 솔직히 털어놓고서 결국은 모두 지나갈 시간들이라는 생각들을 꾹꾹 눌러쓴다. 유재석의 노래 ‘말하는 대로’처럼 ‘쓰는 대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련다. 말과 글에는 그것들을 실현시키는 신통방통한 힘이 있을 거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