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당 정치' 관행과 '사천(私薦) 같은 공천(公薦)' 이 정치를 망친다
정치인들을 가리켜 이런 말 많이 합니다. '제대로 된 X이 없다'... 공감 오천 프로라고 하실 분 많겠지요.
만약 이러하다면 결론이 이렇게도 흘러갈 수도 있겠습니다. '우리 국민들이 제대로 된 정치인 하나 뽑지를 못할 정도로 안목이 없다' 또는 '우리 정치의 후보자가 하나 같이 모두 함량 미달이다'... 이건 공감이 가십니까? 그렇지 않겠지요.
결국 제가 내린 결론은 이렇습니다. '정말 훌륭한 사람도 정치판에만 가면 이상해진다', 이게 결론입니다. 왜 그럴까요? 거기에는 우리나라 정치의 잘못된 정당 정치의 관행과 공천 문제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제 일화를 하나 소개합니다. 상당히 극단적이고 때로는 과격하기까지 한 언사나 주장을 곧잘 하는 정치인(이하 'A 정치인')을 직접 만나본 적이 있습니다. 상대 쪽 진영(?)에서는 정말로 싫어하는 정치인 중 하나입니다.
제가 금융권에 있으면서 이 A 정치인으로부터 요청을 하나 받은 적이 있습니다. 자기 지역구에 있는 은행 지점장들을 한번 만나보고 싶다는 요청이었습니다. 그래서 각 은행들에 협조 요청하고 지점장들을 섭외하여 해당 정치인의 사무실을 직접 방문을 했습니다. 어차피 이 정치인은 지역 주민이면서 지역에 상당한 영향력이 있는 지점장들을 만나고 싶어한 것이었으니, 그들만 면담을 시켜주고 저는 밖에서 끝날 때까지 기다리고만 있었습니다.
면담이 끝나고 모두가 밖으로 나오는데 A 정치인이 저에게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지점장들을 모시고 온 금융권 관계자다라고 말을 했는데, 이 정치인의 반응이 정말로 놀라웠습니다.
'아이고, 그럼 같이 들어오시질 그러셨어요.'
이런 의례적인 말이야 누구나 할 수 있었겠지만 중요한 건 이 정치인의 표정이었습니다. 밖에서는 과격한 언사와 표정으로 이름난 그가 너무나도 선한 표정을 짓고 있더랬습니다. 제가 보좌관 생활을 하면서 많은 정치인들을 만나고 지나쳐 본 중에 손에 꼽을 만큼 선한 표정이었습니다. 아직도 그 표정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참고로 이 정치인은 자기 보좌관들에게도 굉장히 잘 대해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보좌관들에게도 존칭을 꼬박꼬박 쓸 정도이고 보좌관들의 근무 만족도도 상당히 높은 편이라고 합니다. 밖에서는 최고의 젠틀맨인 것처럼 행동하면서도 자기 보좌관들에게는 거친 욕설을 수도 없이 뱉는 정치인들이 적지 않은데 말이죠.
(* 보좌관 생활을 해본 제가 항상 주장하는 것 중의 하나가, 내부 보좌관들을 잘 대해주고 존경을 받는 자가 훌륭한 정치인이라는 것입니다. '수신제가 치국평천하(修身齊家 治國平天下)'라 하지 않습니까.)
이 날 돌아오는 길에 계속 머릿속을 맴도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왜 우리 정치는 이런 선한 사람을 괴물로 만들었을까...
제가 겪었던 또 하나의 일화를 하나 소개합니다. 이것은 국회의 공식 회의여서 현재 회의록까지 다 공개된 상태이니 회의록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 말 그대로를 기록한 회의록이다 보니 문법적으로는 비문임을 감안하여 봐 주시기 바랍니다.)
*A 의원 : 그러니까 롯데는 왜 합의를 안 합니까? 도대체 롯데가 다 합의됐다는데 왜 증인으로 안 오는가를 제가 듣고 싶다는 겁니다.
*B 의원(위원장) : 지금 여당 위원들의 일반적 생각은 뭐였느냐 하면, 이분이 직접 처음에 나오는 것보다는 이것을 잘 아는 롯데의 사장이나 최고책임자가 우선 나와서 얘기를 들어 보자...
*A 의원 : 그게 말이 됩니까. 위원장님? 그것을 변명이라고 하세요!
*B 의원(위원장) : 이 사람, 어디다 소리를 지르고 그래! 어디다 소리를 질러!
*A 의원 : 그것을 지금 말이라고... 위원장이 말이야, 의석에 앉아서 그것을 말이라고 하고 있어! 여당 위원장님이십니까? 그런 게 아니잖아요? 위원장이 좋아하는 증인은 다 채택하고 말이야!
*B 의원(위원장) : 여당 위원들 왜 가만히 있어, 이거! 가만히 듣고 있어, 이런 소리를! 야당 위원이 이런 소리를 하는데 가만히 듣고 있어...
2015년 국회 정무위원회에서 있었던 이야기인데, 당시 롯데의 신동빈 회장의 증인 출석을 두고 당시 야당 소속의 A 의원과 여당 소속의 B 의원(정무위원장)이 고성과 함께 설전을 벌였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하게 보실 부분이 B 위원장의 마지막 발언입니다. A 의원이 자기에게 고성을 지르고 있는데 왜 같은 당(여당) 위원들이 가만히 있느냐는 질책성 발언입니다.
통상적인 우리나라의 정서라면 옆에 두 사람이 갑자기 언성을 높이며 말싸움을 하고 있을 때 일단 주위 사람들은 침묵하는 게 보통입니다. 끼어들다가 말싸움이 더 커지고 때로는 자기까지도 싸움에 말리는 경우가 적지 않아서입니다. 끼어든다고 해도 말로 끼어드는 게 아니라 몸으로만 막아서서 두 사람을 떼어놓는 게 보통입니다. 그런데 이 B 위원장은 같은 당 의원들에게 '적극적인 참전(?)'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팀 플레이'와는 다릅니다. 국회 공식 회의에서 이렇게 여야가 설전을 벌일 일이 있으면 초선 의원들이 '총대'를 메어야 한다는 이상한 관행(?)이 있습니다. 전투력(?)이 좋은 초선 위원들이 고성과 함께 선봉에 서고, 그다음에 전선이 여의치 않으면 경험 많은(?) 재선 위원이 나서서 협공을 펼치며, 이마저도 여의치 않으면 3선 이상 위원들이 '점잖게(!)' 발언하며 힘을 보태는 것입니다. 선수가 많을수록 지켜야 할 체면이 많아서인가요? B 위원장은 같은 당 위원들에게 '이게 위원장님에게 뭐하는 짓입니까!' 라고 지원사격을 하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사실 국회의원 하나하나가 헌법 기관인데 제 아무리 선배가 시킨다고 해서 꼭 할 필요가 있을까요? 특히나 이런 예라면 더더욱 안 하는 게 정상입니다. 싸움판에 껴들 이유는 없죠.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단순히 선배가 사적으로 시키는 게 아니라 정당이 요구하는 롤(role)이기 때문입니다. 공천을 받았으면 정당이라는 틀 안에서 짜여진 역할을 하여야 한다는 것이죠.
(* 따지고 보면 A 의원의 공격(?)도 정당이 원하는 역할을 총대메고 수행한 것에 가깝습니다.)
최근 국정감사에서 많이 등장했던 '화천대유' 사건만 해도 그렇습니다. 야당 소속이라면 당.연.히.. 화천대유 사건을 1번으로 해서 국정감사에 임해야 합니다. 국정감사 역할에 충실하겠다고 정책 질의를 이어갔다가는 당에서 미운털만 박힐 것입니다. 반대로 여당 소속이라면 야당의 공격에 대해 방어하는 논리로 질의를 구성해야겠지요.
*화천대유 사건 : 경기도 성남시 대장동 개발에서 (주)화천대유자산관리가 폭리를 취했다는 논란으로, 야권에서는 이것이 당시 경기도지사인 이재명과 관련이 있다고 주장함.
여당이라면 정부·여당의 정책이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면 안 되고, 야당이라면 아무리 작은 허점이라도 찾아서 최대한 침소봉대(針小棒大)하여 정부의 실정(失政)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정당이 정권 재창출, 또는 정권 교체를 할 수 있을 테니 말이지요. 그러려면 국회의원 개인의 생각이나 소신은 버려야 할 수도 있습니다.
(* 요즘 속어로 소위 '뻥카'도 상관 없습니다. 우리를 홍보할 수 있다면, 그리고 상대를 흠집낼 수 있다면.)
* 출처 : Hucklebarry / Pixabay
정권 재창출이나 정권 교체야 정당의 입장인 것이고, 왜 개별 정치인이 굳이 정당이 요구하는 역할에 따라야 하는지는 공천(公薦) 으로 설명됩니다. ① 정당에서 공천을 받았으니 그에 따른 역할을 하여야 한다는 것은 '도의적인' 이유가 되고, ② 정당의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다음번에 공천받기 어려울 것이라는 것이 '실질적인' 이유가 됩니다.
*공천(公薦) : 총선 등 선거에서 정당이 후보자를 추천하는 것.
정당에서 어떤 지역구에 후보자를 낼 때 인지도나 인품·실력 등에서 가장 경쟁력이 있는 사람, 그보다 먼저 경선에서 당원들이 민주적으로 선출한 사람을 후보자로 내야 되는 게 정상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경쟁력이 있는 사람이라도 '눈 밖에 나면' 후보자에서 '아웃' 시킬 수 있습니다.
*경선(競選) : 둘 이상의 후보자가 선거 방식으로 경합하여 1명을 뽑는 일. 한 정당 내에서 여러 명의 후보자가 출마할 경우 경선을 통해 1명의 후보를 선출하는 것. 일본에서는 '예비 선거'라고 부름.
우선 후보자로 단 한 명만을 추천하는 '단수공천', 또는 아예 외부에서 영입한 인사 1인을 추천하는 '전략공천' 을 통해 희망자들을 인위적으로 배제하는 게 가능합니다. 이럴 경우 민주적 정당성 문제에서 문제가 될 여지가 다소 있습니다만, 지역에서 '계속 해먹는' 오래된 정치인 또는 비리 연루 등 문제가 있는 정치인들의 배제, 또는 상대 정당의 거물급 후보에 맞설 수 있는 강한 후보를 내세운다는 명분 등으로 강행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경선을 하더라도 '게임의 룰' 을 통해 얼마든지 방향성을 줄 수도 있습니다. 예컨대 지역에서 여러 차례 선거를 하면서 당원들을 장악한 '옛 정치인' 을 배제하고 싶다면 경선 방식에서 당원이 뽑는 선거 비율을 줄이고 지역 주민 전체를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 등의 비율을 높입니다. 반대로 외부에서 온 '굴러온 돌' 을 몰아내고 싶다면 당원 선거 비율을 높이면 됩니다.
이런 디자인(?)을 하는 사람은 당 대표와 소수의 유력 정치인입니다. 정당 안에 '선거관리위원회' 와 '공천관리위원회', '전략공천위원회', '후보자검증위원회' 등이 따로 설치되어 거기에서 분산 결정을 하고 단수공천의 기준 등도 당규에 미리 정해져 있는 등 명목 상으로는 상당히 민주적인 절차를 따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소수의 입김에 좌지우지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공천이 아니라 사천(私薦)', 또는 '공천 배제', '공천 학살' 이라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정당에서 공천 안 받아도 나 스스로 극복이 가능하면 상관이 없겠지만(가끔 그래서 공천 탈락자가 무소속 출마를 강행하기도 합니다), 정당에서 공천을 받지 못하면 선거에서 이기기가 정말로 어렵습니다. 후보가 아니라 정당을 보고 찍는 국민들의 선거 행태 때문입니다. 특히 우리나라 같이 실질적으로 양당제나 다름없는 국가에서는 기호 1이나 2가 아니면 당선 가능성이 극악에 가깝습니다. 정치인들이 공천을 받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 선거 때마다 격전지로 꼽히는 <서울 종로구>의 제18대(파란 그래프)와 제20대(주황 그래프) 국회의원 선거 결과입니다. 두 선거 모두 제3지대를 표방하는 제3당이 있었지만 전혀 힘을 못 쓰고 말았습니다.)
* 출처 :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선거 결과를 그래프화함.
앞에서 국회의원 한명 한명을 헌법기관이라고 하였습니다. 외부에서 그러든 말든 공천을 받든 말든 정치인이 본인의 소신과 철학을 지키며 헌법 기관으로서의 역할을 다하면 좋겠습니다만 실제로는 그런 정치인은 정말로 드뭅니다. 기득권을 놓으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국회의원이라는 게 의도한 바를 구체적으로 실현시키는 데에 있어서는 한계가 많으나 외형적으로는 사실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부와 공공기관에 대한 감사권과 자료요구권, 발언에 대한 면책특권, 법률 발의권 및 예산 심사권 등 법적 권한은 물론이고, 9인의 보좌관 임면권 및 지방의원에 대한 공천권, 대 언론 브리핑 및 보도자료 배포, 독립 사무실 운영에 대한 지원, 장관급 예우 등 부수적인 권한까지 정말로 대단한 권한을 가집니다.
*면책특권 : 국회의원이 국회에서 직무상 행한 발언과 표결에 관하여 국회 밖에서 책임을 지지 아니하는 특권(헌법 제45조)
문제는 이렇게 레드카펫을 밟고 나면 그 맛(?)을 포기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는 연예인과 유사한 부분이 있는데, 전 국민적인 인기 연예인이었다가 나중에 듣보잡으로 추락했을 때의 그 상실감, 사실 '뱃지가 떨어진' 정치인들의 신세는 그보다 더하면 더하지 덜하지 않습니다. 이 지위를 계속해서 누려야겠다고 욕심을 부릴 때 정치인들의 철학은 실종되고 권력에 대한 추악한 추종이 시작됩니다. '이 지위는 국민에게서 잠시 빌려 쓰는 것이다' 라고 생각하지 않고 '(당연히) 내 것' 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이러한 심리를 지탄할 수만은 없습니다. 인지상정입니다. 정치인이라고 무조건 철인이고 무료 봉사해야 하라는 것은 무리한 요구입니다. 다만 그러더라도 지킬 것은 지켜야 되겠습니다. 소위 장사에도 '상도덕(?)' 이 있는 것처럼 국민으로부터 권력을 부여받았다면 국민을 위해 그 칼을 써야지 자기 밥그릇 지키는데 칼을 써서는 안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