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게는 민원이지만 다른 국민들에게는 특혜일 뿐
국회의원실에 있다 보면 정말로 갖가지 민원들이 쏟아져 들어옵니다. 개인이 넣는 민원부터 협회 등 이익단체들이 넣는 민원, 기업이나 기관들의 민원 등 종류도 다양합니다.
*민원(民願) : 국민이 행정 기관 등에 처분 등 특정한 행위를 요구하는 것.
이게 정말로 불편하고 부당하고 억울한 일에 대한 민원이면 이해가 되는데 그런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 본인의 이익·이득과 관련이 되어 있고 그것도 일반적 절차나 규정을 넘어서는 특별한 요구인 경우가 많습니다. 사실 이미 정부의 각 부처나 지자체에는 민원 접수창구가 마련되어 있고 그 외에도 국민권익위원회의 국민신문고, 국가인권위원회의 인권e, 금융감독원의 e-금융민원센터 등 여러 공식 민원 접수창구들이 있는데, 이들을 이용하지 않고 국회의원실로 노크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일반적인 민원 절차로는 해결이 잘 안 되니 국회의원이 힘 좀 써달라는 것이죠. 그만큼 무리한 요구가 상당히 많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무리한 민원이라고 해도 거절하거나 무시하기가 참으로 어려운 것이 국회의원의 처지입니다. 충실히 응해주지 않으면 국회의원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다는 불만과 함께 그 민원인이 주위에 온갖 욕을 하고 다닐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말도 안 되는 민원이라도 '들어주는 척' 이라도 해야 합니다. 국회의원이라고 고충이 없는 건 아닙니다.
(* 국회의원회관은 원래 관계자만 출입할 수 있는 'Members Building' 인데다가 최고 등급의 국가보안시설(국가보안시설 가급)입니다만, 여러 민원인들이 정말로 많이 찾아오는 곳입니다.)
정말로 부당하고 불편한 것에 대한 정당한 민원이라도 해당 관청에서는 핑곗거리를 충분히 늘어놓습니다. 하물며 무리한 민원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담당자의 거절 논리가 확실하게 잡혀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 법률이나 규정 등을 초월해서 '특별 대우' 를 해 달라?
신도시 조성 사업 등에서 본인의 토지가 너무 헐값에 수용되었다는 민원을 예로 들어봅니다. 이러한 토지 수용에 대해서는 「토지보상법(공익사업을 위한 토지 등의 취득 및 보상에 관한 법률)」등에서 명확한 절차와 산정 기준 등이 정해져 있습니다. 그 산정의 기초가 되는 공시지가 등도 누가 자의적으로 계산하기 어렵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토지수용 :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공공기관 등이 공익사업을 위하여 강제적으로 토지의 소유권을 취득하는 것. 일부 주민들이 이를 반대하고 버틸 경우 사업 전체가 표류할 가능성이 있어 정해진 절차를 거친 이후에는 어느 정도 강제력을 부여한 것임.
*공시지가 : 국토교통부 장관이 조사·평가하여 공시한 토지의 단위면적당 가격. 각종 세금과 부담금, 보상금 등을 산정할 때 기준이 됨. 2020년 기준으로 전국의 평균 시세반영률은 토지가 65.5%, 단독주택이 53.6%, 아파트 등 공동주택이 69.0% 임.
그런데 헐값에 수용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인근 실 거래시세에 비해 너무 싼 공시지가 등으로 계산했다는 주장입니다. 하지만 공시지가가 실거래 시세에 크게 미달한다는 것은 전국적으로 그러한 것이고, 특히 어디가 개발된다고 알려지면 갑자기 주변 시세가 급등하게 되어 그 차이가 더 벌어지는 게 일반적인 현상입니다. 따라서 이 부분이 문제라면 공시지가와 토지 수용에 관련된 전반적인 법률과 제도의 기본부터 바꿔야 할 것입니다.
(* 만약 공시지가를 실 거래시세와 거의 같은 수준으로 한다면 전국의 토지·주택에 대한 재산세와 종부세 부담이 어마어마하게 늘어날 것을 감수해야 할 것입니다. 어찌 보면 국민들의 조세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 국가가 '봐주고' 있는 셈입니다.)
이러한 제도 개선 없이 그 민원인에게만 특별한 규정이나 산식을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설령 바꾸더라도 그 민원인은 해당 사항이 없습니다. 법률 개정 전의 일이니까요. 따라서 이런 종류의 민원의 경우 대부분 다시 한번 산정해보더라도 금액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 경우가 보통입니다.
내가 운영하는 업체에 정책자금 지원을 더 해 달라, 산정된 한도보다 더 많은 금액을 대출해 달라, 내가 거주하고 있는 임대아파트를 싼 값에 우선 매수할 수 있게 해 달라 등의 민원도 이렇게 뭔가 규정이나 절차를 넘어선 '특별한 대우' 를 요구하는 민원들입니다.
ⓑ 막대한 예산을 나를 위해 쏟아부어라?
우리 동네에 GTX 역을 신설해 달라는 민원을 예로 들어봅니다. 현재 논의 중인 GTX 광화문역의 경우 사업비가 3천억 원 이상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같은 수준으로 비용이 들어간다고 가정하면 5천만 국민이 인당 6,000원씩, 4인 가족이 24,000원씩 비용을 부담하여야 하는 셈이 됩니다.
*GTX(Great Train eXpress) : 수도권 광역급행철도. 서울과 수도권 주요 지점을 연결하는 광역급행철도 사업.
(예산에 대해서 쓴) 앞선 글에서 언급했듯이, 내 집 앞에 지하철 역도 아니고 다른 동네에 지하철 역을 세우는데 이만큼 돈을 낼 국민은 거의 없습니다. 막대한 예산을 '우리를 위해' 써달라고 하려면 충분한 타당성, 즉 사업성(경제성)과 정책성이 있다고 평가받아야 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예비타당성조사' 라는 이름으로 제도화되어 있습니다.
*예비타당성조사 : 대규모의 재정이 투입되는 사업의 정책적·경제적 타당성을 사전에 검증·평가하는 제도. 총사업비가 500억 원 이상이고 그중 국비 지원이 300억 원 이상인 경우 실시함.
그런데 이러한 사업적 타당성이 충분하다면 보통 국회의원실로 오지도 않습니다. 잘 안 되니까 '의원 나리' 께서 힘 좀 써달라고 하는 것이죠. 만약 이 민원이 받아들여져 역이 생긴다면? 전국의 온갖 동네에서 자기 동네에도 역을 만들어 달라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요구는 더더욱 거절하기 어려워집니다. 이미 타당성이 없어도 역을 만들어준 선례가 있으니까요.
우리 동네에 도서관이나 수영장을 지어 달라, 공연장을 지어 달라 등의 민원들도 역사 신설보다는 덜하지만 막대한 예산이 들어가는 것은 다르지 않습니다.
ⓒ 선후·인과 관계를 따지지 말고 무조건 해 달라?
평온히 잘 살고 있는 동네에 갑자기 기찻길이나 고속도로가 놓입니다. 그럼 당연히 소음 문제가 크게 발생할 것이고, 우리 동네에 방음벽이나 방음 터널을 설치해달라고 당연히 요구할 수 있겠습니다.
문제는 이미 있던 철도나 도로 주변에 나중에 아파트가 세워졌는데 그 방음벽 등을 세워달라는 경우입니다. 이미 그 아파트의 건설 전부터 철도·도로가 있었다면 주변에 소음이 있을 것을 입주 전에 충분히 '미리 알 수' 있었을 것이고, 따라서 그 아파트 건설 때 자기 부담으로 방음벽을 세우는 게 맞습니다. 그런데 자기 돈은 안 들이고 나중에 예산 등으로 방음벽을 세워달라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내 돈을 안 쓰고 다른 사람의 돈으로 혜택을 보겠다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농지를 농업이 아닌 다른 용도로 쓰려면 농림부 장관 등에게 농지전용허가를 받아야 하는 농지전용 제도가 있습니다. 이 제도는 1973년부터 시행됐는데, 이미 그 이전부터 종교 시설 등 다른 용도로 쓰고 있었다면 그 용도로 그대로 쓸 수 있게 해달라고 주장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제도가 시행된 이후에 농지에 시설을 설치해 놓고 그대로 쓸 수 있게 해 달라는 민원이 종종 있습니다. 당연히 농림부에서 절대로 안 된다고 했을 것이고, 그래서 '의원 나리' 께 찾아가는 것이죠.
*농지전용 : 농지를 농업이 아닌 주택이나 공장 부지 등으로 사용하기 위해 용도를 바꾸는 것.
(* 특이민원(a.k.a. 악성민원)에 대한 행동 매뉴얼이 이렇게 있기는 합니다만, 국회는 민원인도 표(?)다 보니 이렇게 '사무적으로' 민원을 처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 출처 : 공직자 민원응대 매뉴얼(행정안전부)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국회의원실로 찾아오는 민원은 상당수가 명분이 부족한 내용이 대부분입니다. 그렇다면 '말씀하신 내용은 이러이러한 이유로 해결이 어려워 보인다' 라고 명확하게 회신을 하는 게 맞겠습니다만, 국회의원실은 그렇게 답을 하기가 쉽지만은 않습니다.
일단 국회의원실까지 끌고 온 민원인이 보통(?)이 아닙니다. 일반인들이 국회의원실까지 직접 찾아가 민원 넣는 경우는 드뭅니다. 소위 전투력(?)이 상당하죠. '내가 유권자' 라면서 국회의원이 마음대로 물리치지 못한다는 약점도 하나 잡고 들어옵니다. 그리고 일반 부처나 지자체 등에서 이미 민원을 넣었다가 거절당하고 결국 의원실까지 찾아온 터라 민원인 입장에서는 물러설 데가 없습니다. 굉장히 강경하게 들어옵니다.
만약 이러한 민원을 듣는 체 마는 체하거나 '말도 안 되는 소리' 라고 일언지하에 거절하면 어떻게 될까요? 이 경우 일부 민원인은 주위에 그 의원에 대해 온갖 욕을 하고 다닐 수 있습니다. 본인이 무리한 요구를 한 내용은 쏙 빼고 '민원 넣었더니 쳐다도 안 보더라', 'X가지 없다' 등의 말만 퍼뜨리고 다닙니다. 이 얘기를 들은 주변 사람들은 전후 사정도 모르고 의원에 대한 '안티 메시지' 를 듣게 됩니다. 이런 게 쌓이면 지역에서의 평판이 전반적으로 안 좋아지는 것이죠. 참으로 골치 아픈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불편한 진실이 두 가지 있는데, △'업적' 은 빨리 잊혀지고 '실책' 은 오래 기억에 남는다는 것, 그리고 △보편적인 '다수' 보다 특정한 '소수' 의 목소리가 세다라는 것입니다. 절대다수의 국민이 찬성하더라도 일부 이익단체의 극렬한 반대로 정책이 가로막히는 경우가 자주 있는 것이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특히나 이렇게 정책 등을 이유로 누가 분명하게 손해를 입었다면? 아마 그 사람은 물론 가족들까지 '평생 안티' 가 됩니다. 남북한을 통일시키는 업적을 남겨도 이 사람은 반대표를 던질 겁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적지 않은 민원들이 '자기에 대한 수익적 처분' 을 요구합니다. 민원이 해결되면 민원인이 이익이나 이득을 본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법적·제도적·절차적 정당성도 부족한 경우가 많으니, 만약 이게 해결이 된다면 명백한 '특혜' 입니다. 민원인에게야 '일 잘하는 정치인' 이겠지만 다른 국민들 입장에서는 특정인에게 특혜를 몰아주는 '나쁜 정치인' 인 것이죠.
그럼 해결 방법은 무엇일까요? 우선 소위 '민원실' 같은 전문 민원 창구의 설치와 이용이 필요합니다. 이미 정부 등에 전문적 민원 채널이 있는데 그래도 굳이 국회를 노크를 하겠다면, 예컨대 300명 국회의원 전체를 대표하는 '국회 (통합) 민원실' 에 민원을 접수토록 하는 것입니다. 그게 아니면 특정 지역을 대표하는 'OO 지역구 지역위원회 민원실' 을 설치해서 이용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민원 처리를 약간 '사무적으로' 할 수 있어져서 좋습니다. 거절의 이유도 (표 눈치 보지 않고) 그대로 전달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지금처럼 개별 정치인들이 민원을 하나하나 받게 되면 '유권자' 어쩌고 하면서 온갖 유·무형의 압박을 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귀찮게 해서 그게 싫어서라도 의원실에서 백기투항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 평소에 가까운 관계이거나 지역의 유지들의 민원은 잘 들어주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경시해버리는 '선택적 처리' 의 가능성도 있습니다.
민원 처리의 투명한 공개도 중요합니다. 만약 내가 넣는 민원의 내용과 처리 결과가 홈페이지 게시판에 그대로 게시된다면 민원인들이 소위 '악성 민원' 을 넣기가 어려워집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보니까요. 반대로 이는 국회의원실이 민원에 대해 무시를 하지 못하게 하는 효과도 있습니다. 민원이 접수됐는데 답변이 없다는 게 그대로 노출되니 말입니다.
무엇보다 정치인들이 무조건 민원을 해결해 주어야 한다는 인식부터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최근에 국민들의 정치의식이 크게 높아져 정부나 정치인이 국민들의 요구에 더 적극적으로 응대해야 마땅하다는 인식이 많이 퍼졌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이렇게 부당한 민원을 해결해주는 것이 올바른 정치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무리한 민원을 해결했다고 자랑하는 정치인들이 있다면 욕을 해줘야 합니다. 누군가에게 특혜를 준 것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