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아지를 한 마리 데리고 오게 되었다.
어려서부터 강아지와 함께 자랐던 남편은 줄곧 강아지를 원했고 (말은 안했지만)
마침 한 달된 강아지를 데리고와서 함께 하게 되었다.
아이들도 너무 기다렸던 일이었지만
그런 아이들의 마음조차 철저하게 외면하며 난 반대를 고집했다.
강아지를 데려오는게 마음의 위안을 위해서만은 안된다.
반드시 해야할 일이 곱절로 늘어나고 평생 아이 하나 데리고 산다는 책임감이 있어야 한다.
내가 해야할 일이 더 늘어나는 것을 난 원치 않는다.
너희도 많이 컸으니 산책과 밥주는 것, 배변치우는 것까지 모두 자신이 있으면 데리고 와라.
나는 강아지에 대해 손하나도 까딱하지 않을 것이다.
선전포고까지 했건만
내 편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데려온 강아지는 예뻤지만
아직 어려서 여기저기 입질을 하고 배변도 엉망일 수 밖에 없었다.
훈련사의 영상을 일주일 가까이 밤새도록 시청을 하고
배변교육과 입질교육을 시킨건 결국 누구였겠는가.
예쁘다고 간식사주고 놀아주는건 남편과 아이들의 몫이었고
훈련시키며 야단치는 건 내 몫이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강아지는 남편을 제일 좋아한다.
산책을 하루에 3번은 나가라는 말에 아이들을 시키고
배변도 다 아이들을 시키고
자신은 가끔 털깎아주고 목욕시켜주며 놀아주면 그만이었다.
그것도 자신의 할 일은 다한거라 말하지만
어디 아이하나 키우는 일이 큰 일로만 키워질 일인가.
얼마되지 않아 강아지의 밥과 물을 제때 챙겨주지 못하는 일들이 생겼고
산책을 나가라 나가라 나가라 몇 번을 말해야 겨우 나가며
똥이며 패드며 말을 할 때까지 치우질 않았다.
내 눈에 강아지가 예뻐보일 수가 없었다.
안그래도 정리가 잘 되지 않는 우리 집에 짐덩이만 자꾸만 늘어났다.
아이들을 키워봤기 때문인지 강아지가 뭘 원하는지 대충 눈에 들어오니까
잔소리만 더 심해졌다.
난 일도 해야했고 세 아이 빨래며 설거지에 아이들 공부봐주기만 해도 하루가 벅찼는데
강아지 일로 잔소리까지 느니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3-4년을 함께 지내다보니 아침에는 내가 아이들 배웅도 할 겸 함께 산책을 다녀오고
막내가 하교하고 온 후에는 한 바퀴 돌고 오고
저녁엔 아이들이 한 번 더 돌고 오거나 못나가거나 했다.
패드와 물을 갈아주는 건 산책을 다녀오지 않은 사람이 치우기로 했지만
늘 남편은 열외였다.
자신은 아이들을 위해 데리고 온 것이며 개는 그저 개처럼 키우면 된다 했다.
책임감이 없는 사람은 아니니 강아지를 위해 해줄 수 있는 큰 책임은 다하겠지만
매일 해야하는 산책과 잡다한 일들은 맡겨진 느낌이다.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는 그의 책임감에 정신적 피로감이 몰려올 때가 있다.
지금이야 나도 아이들과 함께 키우는 강아지는 적극 찬성이긴 하다. 다만 집에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면 정말 심사숙고해야할 문제이니 함께 고민하고 의견을 나누고 역할에 대한 분담이 정확하게 이루어진 상태였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