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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리원 Apr 02. 2024

내가 그린 그림

내가 그린 그림 #08

[아이와 나의 그림]

우리가 묵는 발리 숙소에는 유료/무료의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요리, 하이킹, 요가, 낚시, 바이크, 트레킹, 그림, 전통공예 등등. 평소와 같이 잠시 묵고 떠나는 급히 떠나야 하는 여행이었다면 이런 프로그램까지 둘러볼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모두가 하는 주변 관광지에 가서 증거용 사진을 남겨두기 위한 노력으로 하루가 바쁠 테니 말이다. 이곳 리조트에 지낸 지도 일주일 정도 지나고, 꼭 해볼 관광도 다 둘러본 터라 리조트 내에서 뭔가 할 것들에 대해 찾아볼 여유가 생겼다. 지난 일주일까지는 단기 여행객 마인드였으나 이맘때부터 조금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리조트에서 나누어준 안내문을 뒤적이니 QR코드가 뭔가 많다. 요즘은 모든 프로그램 세부 안내 및 예약도 다 QR 코드로 가능하니 내향형 나에게 이 얼마나 행복한 변화인지. 아이도 수영을 너무 좋아하지만 일주일 내내 수영은 슬슬 지겨운가 보다. 여러 프로그램 중에 아이가 함께 하면서 그래도 재미를 느낄만한 것을 찾으니 Canvas Acrylic Painting  수업이 보인다. 물론 소질은 없지만 그림 그리는 것에 대한 로망이랄까? 그것도 외국에 나와서 그림 한점 그리는 내 모습이라! 그리고 결과물이 있다는 것에 아주 만족스러운 체험이 될 것 같았다. 아이도 퀄리티와 상관없이 직접 뭔가를 혼자 해볼 수 있으니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았다.  


프로그램은 정했는데 이제 남은 것은 그들이 이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방법론적인 고민이다.


큰 남자나, 작은 남자 모두 새로운 것, 안 해본 것을 스스로 해보자고 나서는 성향이 아니다. 안정되고 익숙한 것을 선호하는 경향으로 이들에게 '처음=New=first=....' 이것을 Start 하게 하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사실 나 역시 그렇게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사람이 못돼서(앞에도 말했지 않은가! 난 내향형 I++라고) 가만히를 좋아하지만 이러다가는 우리 가족은 리조트 방에만 앉았다, 누웠다 하고 돌아올 상황이라 조금이라도 아쉬운 사람이 나설 수밖에 없다.


마음속으로 몇 번 시뮬레이션해보고, 침대 위와 소파 위 각각 비싼 쿠션처럼 올려져 있는 이들을 번갈아 보았다. 각자의 시간을 보내는 이들에게(게임/e-book) 불편한 말을 꺼내는 순간 자체가 어렵다. (가족이라고 늘 편한 것은 아니다. 누구든 공감하리라 본다.)


"여보"

 (최대한 나긋하게 부른다. 이 대화 사이 아이는 여전히 헤드폰을 끼고 게임 중이다. 고로 내용을 미리 듣지 못한다. 미리 들으면 분명 "싫어"라고 할 것이다. 차단 필수)


일단 큰 남자는 그래도 설득하기 쉽다. 리조트 내 판매하는 비싼 맥주와 체험 자체에서는 제외해주겠다는 약속을 제안했다. 다만 아이와 내가 체험하는 동안 옆에서 사진과 짐을 맡아 달라는 협의였다. 체험이고 뭐고 일단 이 평화로운 상태를 두고 나가야 한다는 사실에 이맛살이 찡끗하는 것이 직관적으로 보인다. 잠시 고민하다 1차 방어가 들어온다.


 " 길리 들어갈 때 인당 캐리어 한 개밖에 안 실어줘서 가져온 캐리어 하나도 버리고 가야 하는데 그거 하면 그림 어디다가 넣어가려고? 짐 되지 않을까?"


1차 방어가 생각보다 구체적으로 훅 치고 들어와서 조금 놀랐다. 본인이 싫다는 게 아니고 상황을 가져오는 이 치밀함. 잠시 고민에 빠졌다. 맞는 말이긴 하다. 그래도 나는 이미 마음먹은 것은 어떻게든 되는 방법을 찾는 사람이다.(잠시 잊고 있었지만 난 그랬다.)

 

 " 그럼 캐리어 한 개가 사라져도 짐 싸는데 문제가 없다면 괜찮다는 거지? 그건 걱정 마! 내가 짐 하나는 기똥차게 잘 싸!! 그런 걱정일랑 넣어둬! 나만 믿어. "


걱정스러운 상황에 너무 믿음형 답변을 던지는 나로 인해 조금 당황한 눈치다. 2차 방어를 고민하는 그에게 시간차 공격을 날리는 나!


" 어차피 여행 올 때 저 짐들도 내가 다 쌌잖아. 혼자 얼마나 이리저리 고민하며 쌓겠어. 3개로 만드는 것도 내가 해결할게!"


KO.

(약간 치사하지만 혼자 여행 가방을 준비했다는 수고스러움을 슬쩍 흘리면서 그의 미안함을 끄집어냈다. 그리고 큰 남자 역시 이미 알고 있다. 말린다고 내가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란 것을)


"그래, 그런데 아마 저 녀석이 안 한다고 할걸!(회심의 미소)"


본인은 졌지만 작은 남자아이가 이겨주기 바라며 슬쩍 바통을 넘기는 그의 모습에 웃음이 났다. 우리 집 남자들은 참 귀엽다고 느끼는 찰나 작은 남자는 이상한 공기를 눈치챈 것인지 머리를 들어 우리를 본다. 엄마가 잠시 헤드셋을 벗어달라고 하니 벗고 나를 쳐다본다.


" 오늘 뭐 하고 싶은 계획 있어?"

아이는 지난 경험으로 엄마의 이 질문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잘 안다.


"아~ 나는 그냥 유튜브보고 게임하고 싶은데! 하루종일 방에서 있으면 안 돼?"


다음 질문 자체를 차단해 버리는 고단수 방어가 들어왔다, 질문을 질문으로 받아치는 이 아이.

(아빠의 관전 모드는 세상 재밌는 경기 보듯 웃고 있다. 누구를 응원하는지도 안다. 풋!)


" 엄마는...... 아니야. (시무룩)


나의 생각보다 빠른 말 줄임에 아이가 조금 당황한다. 한참을 엄마 보더니


" 엄마는 뭐!  말해봐!"


못 이기는 척 고개 푹 숙이고 이야기해본다.


" 엄마는 사실 그림을 엄청 그려보고 싶었거든! 근데, 한국에서는 너무 바쁘고 또 잘 그리지도 못하는데 하고 싶다고 부끄러워서 말도 못 하고 그랬거든. 그런데 여기서 그림 그리는 체험이 있대. 누구나 신청하면 할 수 있다는데 같이 해보면 안 될까?"


아이는 시무룩한 엄마를 보며  이 상황을 벗어나고픈 마음이 간절하다. 조심스레 꺼낸 말은,

"그럼, 엄마 혼자 해보면 안 될까? "


내 속으로는 조금 부글 거리지만 항상 그렇듯 강제적으로 아이를 끌고 가고 싶지는 않다. 뭐든 스스로 하겠다 마음을 먹어야 1이라도 배우고 경험하는 게 있는 법이다. 어떻게든 아이가 가겠다고 마음을 먹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한 번 더 엄마는 소심하고 초라해져 본다.


" 너는 그림 잘 그리잖아. 엄마는 그림 잘 못 그린단 말이야. 사람들이 지나가다 엄마 그림 보고 놀리면 어떻게 해. 부끄럽단 말이야. 네가 엄마 옆에서 살짝 살짝 가르쳐주면서 같이 해주면 안 될까? 부탁해."


아이는 한숨을 내뱉더니,

" 그거 그냥 그리면 되는데. 알았어 그럼. 그거 하고 와서 나 게임해도 돼?"


" 당연하지!! 그럼 신청하게! 고마워~~~ 아들~~"


(큰 남자의 한숨이 저 멀리서 아주 선명하게 들려온다.)


그렇게 예정된 시간에 수업 장소에 도착했다. 리조트 수영장 옆 야자수 아래에 선생님이 그렸을 것으로 예상되는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고, 물감이며 자리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다행히 이 타임 신청한 사람이 우리 가족뿐이라 소박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그려볼 그림을 선택하라고 했더니 아이는 한 그림을 가리켰다.

 " 엄마! 난 물도 있고, 나무도 있고, 하늘도 있으면 좋겠는데 이 그림이 좋아"


아이는 해수욕장에 부서지는 파도와 작은 언덕, 그리고 하늘이 있는 발리풍경 그림을 선택했다. 나 역시 우선순위는 다르지만 나무와 꽃 풍경이 좋아서 한 그림을 선택했다. 화가처럼 아크릴물감이 덕지덕지 뭍은 앞치마를 하나씩 입고 자리를 잡고 앉으니 선생님이 캔버스를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밑그림 구도 스케치를 각각 잡아 주시고는 각 부분 부분을 어떤 스킬로 칠해야 하는지 알려주셨다. 여러 색을 섞어서 색을 만들어 주시는데 물감 냄새가 더운 공기를 타고 훅 올라왔다. 이 상황 자체가 뭔가 전지적 작가 시점화 된 느낌이랄까!

카메라로 어느 드라마나 다큐처럼 한 편의 중요한 장면처럼 저장되는 느낌이 들었다.


선생님이 알려주신 대로 붓으로 열심히 공간을 메우고 있다가 고개를 들어 아이를 봤다. 싫다고 할 때는 언제고 붓질 하나하나에 정성이 가득하다. 말도 안 통하고 붓질이 서툴면서도 그 진지함에 안심이 되었다. 잘 달래서 체험하자곤 했지만 아이가 체험하면서도 싫어하면 서로 마음 상하게 된다는 것을 아이 키우는 부모는 잘 안다. 그럼에도 뭐든 해보자고 자꾸 아이를 물가에 데리고 가보는 것은 100번 실패하더라도 혹 1번 아이가 진정 좋아할 것들을 찾을 수 있을까라는 기대 때문일 것이다.


선생님이 어린아이에게 조금 더 밀착 케어하며 그림을 도와주시는 덕에 아이 그림은 생각보다 빨리 완성되어 갔다. 아크릴화가 좋은 점이 잘 못해도 실수해도 어찌어찌 수정해 가며 완성하면 뭔가 서툴러 보여도 그게 또 그 나름의 맛이 나서 초보들에게도 도전 장벽이 낮은 부분이다. 아이의 그림은 아이가 원하는 대로 완성이 되었고 생각보다 너무 멋진 그림이 되었다. 아이가 그림을 완성해 가는 동안에 나 역시 붓 터치 하나하나에 정성을 쏟으며 그림을 마무리해나갔다. 초록초록의 산과 나무들을 그리면서 힐링되는 기분이 들었다.


아이는 그림에 서명까지 남기고는 뿌듯한 얼굴로 엄마를 바라본다, 아마 생각보다 결과물이 너무 근사했으리라. 아직 마무리 못한 엄마가 혹 잘 못 그려서 헤매고 있나 싶은 생각이 들었는지, 아주 당당하게 물어본다.

 " 엄마 내가 도와줄까? 난 다했어!"


" 응, 엄마도 이제 거의 다하긴 했는데 뭔가 좀 이상하지?"

괜한 관심받고 싶은 엄마의 말에 아이는 선배처럼 이야기한다.


" 아니야. 그 정도면 처음인데 잘한 거야. 거기 옆에 까만색으로 다 칠해야 해. 그리고 엄마 이름도 아래 해 줘야 해!"


먼저 선생님께 배운 대로 엄마에게 다시 설명해 주는 아이는 체험 전보다 경험치 +100 추가되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림 그리는 동안 글로벌적인 숙박객들이 지나다니며 아이의 도전을 칭찬했다. 그런 칭찬에 머쓱했는지 더 그림에 집중하던 아이는 뭔가 자신감을 장착한 모습이었다.

(우리 가족이 오픈 행사처럼 체험을 해준 덕에 해당 수업은 그 자리에서 여러 사람의 신청 문의가 들어왔다. 선생님 얼굴도 많이 밝으시다!)


서명을 마지막으로 아이와 내가 함께 그림을 들고 사진을 찍어 남겼다. 아이는 자신감을 나는 성취라는 것을 얻었다. 이 나이가 되면 뭘 하나 해도 단시간 내 결과물이 나오는 게 없다. 성공보다는 실패가 많고, 성과는 장기전이고 체력은 바닥이고, 새로운 시작이 너무나 두렵다. 그런데 짧으나마 해보고 싶은 그림을 그려보고, 그 결과물을 손에 잡고 있다는 생각에 스스로 대견했다. 늘 너무 멀리 있는 목표에만 의미를 두고 달려온 것 같다. 그래야만 그게 대단하고 힘들고 인정받을 만하다고 여긴 듯하다. 너무 사회화되어 나를 그렇게 내 몰고 있었나 보다. 시작에 큰 시작과 작은 시작을 구분하지 말자. 무엇이든 시작해 보고 그 결과 역시 작든 크든 나를 칭찬해 줘야겠다.


생각하면 할수록 나는 나에게 너무 야박했다.  괘씸하다. 이런 나를 좀 고쳐놔야겠다.


우리의 그림은 집으로 돌아와서 복도 좋은 장소에 나란히 잘 걸었다. 걸어두고 보니 그림이 연결되어 보이는 이상한 경험을 했다. 가끔 큰 남자는 그 그림 앞에서 한참 서 있다가 말한다.


" 자기 말 듣기를 잘한 것 같아. 뭐 늘 그랬지만. 처음 시작하는 게 힘들어서 그렇지 하면 또 이렇게 좋은데."


우리의 그림 그리기는 혼자만 좋은 게 아닌 모두가 좋은 시간이었던 것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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