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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변에서

물은 보이지 않지만 강변인 곳에서

by 라면 Dec 25. 2023

강이 흐르는 곳에서 태어났다. 그 강의 이름은 태화(太和)이다. 태어난 동네의 행정구역명 역시 태화동이다.


태어날 당시에 그 강엔 오수가 흘렀다. 공업용수와 생활용수가 버려진 강에서 악취가 나 사람들은 그곳 근처로 잘 가지 않았다. 2000년 대에 들어서 시에서는 그 강을 정화하기 위해 막대한 예산을 쏟아부었다. 그곳은 이제 더 이상 죽음의 강이 아니다. 연어의 귀환과 함께 정화 사업은 더욱더 활기를 띠게 되었다. 강변에 공원을 조성하고, 관광단지를 개발하고, 미술 작품들을 설치하고, 갖가지 꽃을 심었다. 이제 그곳은 국가 정원이다. 


답답하거나 마음이 울적할 때면 강변을 걸었다. 추우면 주머니에 손을 꽂고, 더우면 주머니에서 손을 빼고. 계절마다 달라지는 변천을 바라보며. 나는 기억하지 못하는 죽음의 시절을 상상해 보곤 했다. 그럴 때면 근거 약한 희망을 느끼기도 했다. 제 아무리 몰락한 것이라도, 이처럼 밝게 부활할 수 있을지 몰라. 그 강의 매력은 아름다움뿐 아니다. 그곳이 기적 말곤 감히 상상해 낼 수 없는 부활의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망가져 있다고 믿는 가련한 인간들은 더 매력을 느끼는 건지도 모른다. 


그때의 나는 내가 망가져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 역시 오만한 나르시시즘이다. 나는 무언가 특별한 사람이어야 하기 때문에, 누군가보다 잘난 것이 없으니 누군가보다 차라리 한없이 불행한 사람이라도 되자라는 논리가 그런 생각을 불러냈다. 점점이 부끄럼뿐이다. 과거는 바꿀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망각한다. 서서히 그때의 과오들이 잊히기를. 강바람을 맞으며. 시가 조성한 빛의 다리를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다. 다리를 이은 전구 다발에서 별을 동경하는 인간의 시심(詩心)을 보았다. 어김없이 이어 만개하는 꽃과 물과 소리. 바람과 들개와 대나무. 사람 역시 자연의 일부이므로. 인간이 죽인 강이 인간으로 하여금 부활한 것 역시 자연의 섭리이리라. 


스무 살 때 상경했다. 이십 대 초반에는 낯선 곳에 적응하느라 감상을 떠올릴 여유가 없었다. 적응이 끝나고, 오히려 권태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나는 그 강에 대해 생각하곤 했다. 서울에는 그것보다 더 웅장하고 유명한 강이 있다. 2호선을 타고 강남으로 내려가며 보이던 한강의 풍경 역시 잊지 못할 아름다움이었다. 저녁쯤, 석양이 내려앉은 주홍빛 한강의 풍경은 아직도 기억난다. 


그것만으로도 서울에 가볼 만한 이유는 충분히 될지 모른다. 한강에서 친구들과 먹던 치킨이나 피자 같은 것들도 생각난다. 그것 역시 울적한 날에 꺼내볼 수 있는 추억 중 하나로 남아 있다. 하지만, 한강은 그 강이 될 수 없었다. 내가 자취하던 곳에서 한강은 언제든 걸어서 갈 만한 거리는 아니었다. 그리고 한강은 너무 거대하고, 너무 유명했으며, 무엇보다도 너무 사람이 많았다. 강의 물결보다 사람의 파도가 치는 곳. 물과 물과 물. 소리와 소리와 소리. 사람과 사람과 사람. 그리고 지하철 창문 너머. 낙조가 빚어낸 주홍의 은하수.


고향으로 다시 내려왔을 때 우리 집은 그곳에서 좀 떨어진 곳으로 이사한 상태였다. 태어나서 상경할 때까지 쭉 살아 온 동네가 아닌 다른 곳에서 살면서 불편함을 느끼지는 않았지만, 아쉬움을 느꼈다면 그건 역시 그 강변을 더 이상 마음 편히 오가지 못한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래도 버스를 타고 십 분 정도면 언제든 그곳에 갈 수 있었다. 


오랜만에 그 강변을 가게 되었다. 산책을 위해선 아니었고, 대규모 관광 명소가 된 그곳 카페에서 약속이 있어서였다. 약속 시각보다 조금 더 일찍 나와 이제는 국가정원이 된 강변 벤치에 앉아 나날이 변해 가는 그 강이 흘러왔던 물길을 떠올린다. 겨울이라 바람은 차지만, 사람들이 많이 나와 있었다. 대부분 아이들과 함께 산책을 나온 젊은 부모들이었다. 나와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앳돼 보이는 남녀가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뒤뚱거리는 아이들을 데리고 다녔다.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싯누렇게 새어 버린 풀잎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황금빛 춤을 추고, 크리스마스이브를 맞아 광장에 세워놓은 거대한 트리엔 메리 크리스마스를 기원하는 축사가 걸려 있다. 빛과 소리와 금. 이어 만개하는 사람과 길과 성탄.


음악 없이도 선율을 듣는다. 나, 돌아왔다. 2000년 대 초반 신문 기사 제목대로. 이 강에 '무언가'가 돌아왔다. 마음이 쌓이고 녹고, 물이 된다.  녹은 마음이 흘러 강이 된다. 그러니 연어처럼 너도 돌아오기를. 이 마음의 부활의 징조가 되어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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