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로잉 왕초보 성장일기
오늘은 태어나 처음으로 해보는 시도, 생애 첫 '드로잉'수업 날입니다. 어린 시절 꽉 눌러 둔 옛 트라우마를 깨는 날이기도 합니다. 초등시절은 아예 기억에도 없고, 중학교 미술시간에 연필만 들고 아무것도 못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망설이다 수업시간이 끝나버린 개운치 않은 그런 기억입니다.
스스로 안된다고 지레 포기했던 그 시간, 수줍고 자신감 부족하고 집중 못했던 그 시간, 선생님이 다가오면 그리는 척하다가, 멀어지면 엉뚱한 장난질하는 그런 재미없고 지겨운 시공간의 기억입니다.
동네 친구 중에 그림 잘 그리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만화책 보다가 쓱싹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따라 그려대는 그 친구가 신기하고 부러웠습니다. "나하고는 거리가 먼 다른 나라 DNA를 갖고 있나 보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따라 흉내 내 봤지만 넘사벽이었습니다. "다 같은 손인데 나는 왜 안 되는 걸까? 저렇게 금방 잘 그릴 수 있다니! 난 아닌가 보네"라고 쉽게 그림을 포기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가난한 어린 시절이었으니 요즈음처럼 학원에서 배운 재주도 아닌데 금방 뚝딱 똑같이 그렸습니다. 딱 봐도 기죽는 거죠. 다리 다쳐 휠체어에 앉아, 친구들 재미나게 축구하는 거 구경하는 그런 기분 같은 거랄까. 그래도 신기하고 다행이었던 것은 당시 그 친구가 부럽긴 했어도 한낱 구경거리, 흥밋거리만으로 그쳤습니다. 그렇게 50년의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경이로운 넘사벽으로 각인된 50년 동안 묵혀온 '드로잉'의 꿈을 꺼내봤습니다. 동네 문화센터 홍보 팸플릿을 보다가 문득 '그림 한번 그려볼까?'라는 생각이 든 거죠. 마침 시간도 있고 나이도 들어 지금 등록하고 배우지 않으면 영영 놓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환갑 넘은 사람들이 흔히 느끼는 세월의 절박함 같은 거였습니다. 그래서 용기 내어 등록하고 혹시 중간에 그만둘까 가족들에게 미리 공표도 했습니다."나 그림 시작했어"라고. 한편으로는 "그래! 못 그리면 어때, 그냥 질러보자" 이런 다짐으로 편안하게 두근거림을 눌렀습니다.
마스크를 쓰고 눈만 빼꼼히 내민 6명의 아주머니 학생들 사이에, 저도 눈만 내밀고 조용히 한 자리 잡았습니다. 품세를 보아하니 다들 나보다 한 수 위 고수들 같고 괜히 말 걸면 실력 들통날 거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갑자기 "오늘 처음 오셨죠? 그림 그려본 적 있으세요?" 마스크 위 얹힌 초롱초롱한 눈에 청아한 목소리의 선생님이 다가와 물었습니다.
"처음인데요..."
그러자, 한 장의 그림을 내밀었습니다.
"눈과 입, 이거 보고 똑같이 한 번 그려보세요"
순간 저는 당황했습니다. 이게 아닌데...
"저... 어떻게 하는 거죠? 시작을 못하겠어요..."
"자! 먼저 그림 크기를 정하세요"
"전체 크기를 어느 만큼 할 건지"
"위아래 사이즈, 좌우 길이를 살짝 표시하고 시작해 보세요"
선생님이 연필을 집더니 상하좌우를 희미하게 그어주셨습니다.
"아 십자가 모양부터 시작하는구나!" 나의 첫 드로잉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음... 잘 그리시는데요 괜찮아요"
"진한 부분 옅은 부분, 어디가 밝고 어두운지도 한 번 살펴보세요"
그리고 30분 정도의 시간이 또 흘렀습니다. 어느덧 끝마칠 시간입니다.
신경을 써서 그런 걸까? 힘을 줘서 그런 걸까?
시간은 빨리 갔는데, 온몸 특히 어깨가 내려앉는 것 같았습니다. 50년의 해묵은 트라우마의 힘을 온통 다 쏟아부은 첫 시간이었습니다.
내가 그린 내 그림을 보고 스스로 깜짝 놀랐습니다.
생애 첫 드로잉, 내가 드로잉을 하다니!
오! 내가 그린, 나의 그림
'신기하다!' 저는 속으로 외쳤습니다.
선생님 시키는 대로만 했을 뿐인데, 너무 잘 그린 것 같았습니다. '큰일을 해냈구나'
내 손이 이런 걸 그려내다니! 대견하게 그려낸 나의 손을 바라보았습니다. 손은 말이 없었지만, 참으로 경이로운 날입니다.
선생님이 날짜와 사인을 해두라고 하시네요. 이런 사인, 처음이라 쑥스럽네요. 당황하여 오늘이 9.14일인데 날짜도 9.13일로 썼네요. 예명도 별도로 준비한 게 없어서 그냥 우리 강아지 이름 '보드리'를 영문으로 썼습니다. 저의 생애 최초 드로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