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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체리뽀 Sep 05. 2024

딱 한 번만 더 걷는 게 어때?

14-1코스, 여름 오기 전에 마지막으로 걸은 길


얘들아, 올레길 딱 한 코스만 더 걷는 게 어때?


5월 마지막 주말이었다. 여름이 코 앞까지 다가온 느낌! 제주는 6월부터 장마와 무더위가 시작될 예정이었다. 우리 가족은 올레길을 겨우 일곱 코스만 완주했으니, 스물 개의 코스가 남은 상황.


"얘들아, 여름 오기 전에 딱 한 번만 더 걷자~ 안 그럼 가을부터 정말 부지런히 걸어야 해!"


"엄마, 더울 때 걸으면 힘들단 말이야~ 오늘 날씨 보니까 해도 쨍쨍 나잖아! 안 가고 싶어~"


"6월부터 8월까지는 절대 올레길 안 걸을 거야! 그니까 오늘이 여름 오기 전 진짜 마지막 올레길! 약속~"


"아... 집에서 그냥 쉬고 싶은데... 알았어, 그럼 몇 코스로 갈 거야?"


"엄마가 미리 봐뒀지! 더우니까 숲이 많다는 14-1코스 어때? 길도 엄청 짧아~"


올레길을 걸을 때마다 아이들의 의사가 제일 중요했다. 아이들이 걷겠다고 해야 걸을 수 있는 길이었다. 그래서 아이들이 걷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잘 설득하는 사전 작업이 꼭 필요했다.


다행히 아이들은 오늘이 상반기에 마지막으로 걷는 올레길이라는 말에, OK 싸인을 보내 주었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집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14-1코스가 있는 제주 서쪽 지역으로 향했다.

  

14-1코스 시작 스탬프 찍던 곳^^ 저지 예술 정보화 마을!


차로 1시간 30분 정도를 달려 목적지인 저지 마을에 도착했다. 이미 태양은 높이 떠 있었고, 올레길을 걷는 우리에게는 매우 치명적일 듯한 열기가 느껴졌다.


시작 지점에서 스탬프를 찍고 기념 사진을 찍으려는데, 올레 안내소 직원 분께서 다가오며 말을 건네셨다.


"올레길 걸으러 오셨어요? 오늘 날이 좀 더울텐데, 애들이랑 괜찮으시겠어요?"


"네, 저희는 벌써 일곱 코스나 올레길 완주했어요!"


"더울 것 같아서 오늘은 짧게 걸으려고 14-1코스로 온 거예요!"


"아이구, 너희들 대단하네! 제가 가족 사진 찍어 드릴게요~ 다같이 서 보세요!"


"감사합니다!!"


친절하신 올레 안내소 직원 분 덕에 가족 사진도 예쁘게 남길 수 있었다. 올레길 잘 걸으라는 응원까지 듬뿍 받으며 출발하니 기운이 더 나는 듯 했다. 14-1코스, 가즈아~!!


올레 안내소 직원 분께서 친히 나오셔서, 가족 사진도 찍어 주시고 응원도 가득 해주셨던^^



엄마, 숲은 대체 언제 나와? 왜 계속 땡볕에 아스팔트 길만 걸어?


출발한 지 30분은 된 것 같은데, 길은 좀처럼 숲으로 들지 않았다. 첫째의 말대로 강렬한 땡볕을 온몸으로 맞으며 뜨겁게 달궈진 길을 하염없이 걷는 중이었다.


가뜩이나 더운 게 싫어서 안 걸으려고 했던 아이들인데, 오늘은 시작부터 땀으로 샤워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아이들을 어르고 달래서 걷게 된 길인 만큼, 나는 힘든 내색을 할 처지가 아니었다.


저지 마을을 통과해서 걷는 땡볕의 아스팔트 길.. 가끔 나무 그늘이 나오면 그저 감사ㅠㅠ


첫째가 유난히 힘들어 했다. 남편과 둘째가 저만치 앞서 걷는데도, 첫째만 좀처럼 속도를 내지 못하고 제자리 걸음이었다. 그리고는 연거푸 '더워서 힘들다'는 말만 반복했다.


메밀꽃 본다고 가만히 서 있거나, 어쩌다 그늘을 발견하면 그 아래 들어가 움직이지 않기를 여러 번... 첫째의 걸음 속도에 맞추어 걷던 내가 오히려 더 지쳐가고 있었다.


"가자... 덥다고 서 있으면 더 힘들어... 숲 나올 때까지만 부지런히 걷자..."


아이만 두고 갈 수는 없기에 내가 자연스레 첫째의 짝꿍이 된 거였는데, 첫째가 덥다고 투정만 부리며 걷지를 않으니 슬슬 내 속도 끓어 오르기 시작했다.


"안 되겠다, 엄마 먼저 갈게! 엄마는 더운 길 위에서 오래 있고 싶지 않아~ 그냥 알아서 따라와!"


첫째를 기다리다 지쳐 결국 폭발 직전이 된 나는, 첫째를 내버려 두고 속도를 내서 걷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아이에게 더위와 짜증이 버무려진 화를 낼 것만 같아서 거리를 좀 둘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내가 먼저 멀찌감치 가버려야 아이가 억지로라도 속도를 내서 따라오지 싶었다. 숨막히게 뜨거운 길을 얼른 벗어나고 싶다면, 빨리 걷는 것만이 답이었다.


뜨거운 땡볕 아래, 자꾸만 걷지 않고 멈춰서던 첫째...



엄마! 같이 가~ 먼저 가면 어떡해? 나 힘들어서 죽을 것 같아!


아이는 뒤에서 나를 따라오며 연신 '힘들어서 죽을 것 같다'는 말을 했다. 진짜일지도 몰라서 놀란 얼굴로 돌아보면, 꼭 그렇지는 않아 보였다. (첫째는 조금 엄살이 있는 편^^;)


"힘들면 물 좀 마시고! 저기 나무 아래 벤치 보이지? 딱 저기까지만 가서 쉬자!"


저 멀리 남편과 둘째가 이미 도착해서 쉬고 있는 벤치가 보였다. 나는 첫째에게 벤치까지만 가자고 일러두고 부지런히 걸어서 먼저 도착했다. 그런데 그 벤치 옆으로 한창 도로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여기 공사하시는 분들이 우리 지나가라고 잠깐 작업을 멈추셨어! 우리가 다같이 빨리 가줘야 돼~"


큰 중장비들이 길 한복판을 꽉 채운 채 멈춰 있었고, 우리가 지나갈 수 있도록 틈새를 만들어 둔 채 기다리고 계셨다. 이건 더운 날 고생하시는 분들을 위해서라도, 우리 가족이 얼른 지나가야만 하는 곳이었다.


"ㅇㅇ아! 빨리 와! 지금 여기 지나가야 돼~"


한참이나 멀리 떨어진 곳에서 느릿느릿 걷고 있는 첫째를 큰 소리로 부르며 재촉했다. 아이는 헉헉-대며 영문도 모른 채 벤치까지 왔고, 벤치에 털썩 주저앉아 쉬려는 아이를 나는 곧장 일으켜 세웠다.


"공사하시는 분들이 우리 지나가라고 한참이나 기다리셨어! 벤치에서는 못 쉬게 됐으니까 얼른 일어나~"


그러자 아이는 왈칵 울음을 터뜨리며, 분노에 가득차 고래고래 소리 지르기 시작했다.


"엄마가 벤치까지만 오면 쉬자고 했잖아! 나 힘들게 여기까지 왔는데 왜 못 쉬어? 아아아악~"


공사 작업자 분들이 흥미진진한 얼굴로 우리 아이만 쳐다보고 계시는 게 느껴졌다. 내 얼굴은 가뜩이나 더위를 먹어 시뻘건 상태였는데, 창피함으로 인해 더더욱 불타오르는 기분이었다.


"여기 먼저 지나간 다음에 쉬자고! 엄마도 공사 중인지 몰라서 그렇게 말한 거잖아! 울지 말고 따라와!"


아이는 다그치는 듯한 내 말투에 소리를 더 높여 울기 시작했고, 나는 그 상황이 너무 창피해서 아이를 두고 그 곳을 먼저 벗어났다. 아이는 엉엉 울면서 나를 따라왔다.


"아이고~ 울기는 왜 우냐? 저쪽 돌담 아래 가서 쉬면 되지~"


공사 작업자 한 분이 아이에게 왜 우냐며 놀리듯이 말씀하시는 바람에 아이는 더 서럽게 울어제꼈다. 한 번 터진 울음은 멈출 줄을 몰랐고, 아이는 원망 가득한 눈으로 나를 쳐다볼 뿐이었다.


벤치에 앉자마자 못 쉬고 걸어야 해서 울기 시작한 딸 / 그녀의 울음은 오랫동안 그치지 않았다...




누구의 마음 속에나 '불안이'가 산다.


초등학교 4학년인 첫째는 또래에 비해 많이 우는 편이다. 특히 오늘 올레길에서처럼 '무얼 하기로 했는데, 갑자기 상황이 바뀌어 못하게 되었을 때' 울고는 한다.


< 아까의 예시로 보는 아이의 눈물 회로 작동 원리 >

벤치까지 걷고 나서 쉬기로 함 → 공사 중이라 얼른 지나가야 하는 돌발 상황 발생 → 갑자기 못 쉬게 된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듦 → 주변 사람이나 상황을 탓함 → 계획대로 안 되면 울음보가 터짐


아기 때부터 불안이 많은 아이였던 것 같다. 본인 스스로도 '걱정병이 좀 있어'라고 말할 정도니까. 불안 덕분에 자기 할 일을 미리 잘 챙기고, 시간 약속을 칼같이 지키는 등의 장점도 가지고 있긴 하다.


그런데 상황이 여의치 않아 계획이 바뀌거나, 약속 시간에 조금 늦을 것 같거나, 중요한 물건을 까먹고 못 챙겼을 때, 옆 사람 탓을 하거나 울면서 분풀이를 하는데... 그 대상이 보통 엄마인 내가 된다.


벌써 10년째, 아이와 이 문제로 이야기를 나누는 중!


감정을 표현하는 건 좋지만, 너무 자주 울지는 말려무나. 틀려도 괜찮고 늦어도 괜찮고 못해도 괜찮다. 대부분 큰 일 아니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하지 마라. 이제는 스스로 감정 조절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근데 또 막상 진짜 큰 일 앞에서는 의외로 담대해지는 게 바로 우리 첫째이다. 이토록 울음 많고 겁 많은 첫째가 큰 수술을 두 번이나, 그것도 의연하게 잘 받은 걸 보면 아직도 신기할 따름!


아무튼 눈물 많고 화도 많고 걱정도 많은 우리 큰 딸! 얼마 전에 영화 <인사이드 아웃 2>를 같이 보면서 자기 안에도 '불안이'가 살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는데...




사실 누구의 마음 속에나 '불안이' 한 명쯤은 살고 있지 않을까.


다만 '불안이'로 인해 스스로가 너무 힘들지 않도록, 불안의 크기를 줄여 나갈 필요는 있을 것 같다. 나의 사랑스런 아이가 불안에 잠식 당해 울음보를 터뜨릴 때마다 엄마인 나도 불안에 사로 잡히기 때문에..^^


곧 큰 나무 그늘을 만나게 되어, 그 아래에서 첫째의 눈물을 닦아주고 꼬옥 안아 주었습니다♡



엄마, 저기 가서 말 좀 보고 올게!


시원한 나무 그늘에 앉아, 아이들에게 간식과 물을 꺼내 먹이며 충분한 휴식을 취하게 했다. 그래야 뙤약볕을 견디며 남은 길을 걸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런데 우리 딸들, 저 멀리 말들이 보이자 급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겨우 그늘 찾아내서 잘 쉬게 했더니만, 그늘 없는 곳으로 가서 말을 보겠다고?


"너무 더워 보이는데... 저기 갔다오면 다시 걸을 때 또 덥다고 할 거잖아!"


"아니, 걸을 때 덥다고 안 할게! 잘 쉬었더니 이제 안 더워~ 나 말 보러 간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걷다가 진심으로 죽을 것 같았다'고 몇 번을 말하던 그 아이는 어디로 간 지... 그녀는 아까 올레길을 걸을 때와는 달리 매우 빠른 속도로 달려 나갔다.


'흠... 더워 죽을 것 같다는 말도, 이젠 흘려 들어야겠군!'


말 구경하러 간 아이들
주변의 풀을 뜯어와서 주니, 잘 받아먹던 말들^^




올레 14-1코스는 유난히 '말'이 많았다.


문도지 오름으로 가는 길목에도 풀을 뜯어 먹는 말 한 마리가 있었다. 행여나 묶여 있지 않은 말일까 싶어 겁을 먹었는데, 다행히 밧줄에 묶여 있는 말이었다.


나는 지난 봄에 승마를 배운 뒤로 말이랑 제법 가까워졌다고 느꼈는데도 오랜만에 보니 좀 무서웠다. 아이들은 최근에서야 승마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말에 대한 호감이 급격히 상승한 상태였다.


"엄마, 오늘 올레길에는 말이 진짜 많다! 그치?"


"그러게~ 너희들 말 안 무서워?"


"그럼! 나는 말도 타는데~ 당연히 안 무섭지!"


"엄마, 말이 사람을 더 무서워 한대~ 그래서 뒤에 누가 오면 겁이 나서 뒷발로 뻥 차는 거래~"


아이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말에 대한 지식을 늘어 놓으며, 말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하긴 도시 한복판에 살면서는 절대 보기 힘든 동물이 말이었는데, 제주에 온 뒤로는 심심하면 보고 있으니 반가울 만도 하지^^


풀 뜯어먹는 말 구경 중인 모녀들 :)




드디어 나무들이 줄지어 있는 오솔길로 접어 들었다. 그토록 기다리던 그늘이었다! 그러나 머리 정수리 위쪽에 뜬 태양은 나무와 나무 틈 사이로도 끊임없이 자신의 강렬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우리는 최대한 그늘만 밟으려고 노력하며 걸어야 했다. 갑자기 큰 나무가 사라져 다시 땡볕 가득한 길이 나온다? 그럼 키 큰 아빠의 그림자라도 그늘로 삼기 위해, 어떻게든 아빠 등 뒤에 바짝 붙어 가던 아이들이었다.


올레길에서의 그늘은 너무 소중해!


듬성듬성 생긴 나무 그림자를 밟거나, 아빠 그림자라도 밟거나 ㅋㅋㅋ
문도지 오름으로 가는 길, 여전히 그늘이 적어서 힘들었다...




말과의 추격전을 벌인 '문도지 오름'


앞서 가던 올레꾼들이 죄다 한 곳에 멈춰 서 있는 게 보였다. 말 열댓 마리가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한 중간을 지나가야 하는 길이었다. 이 곳은 원래 목장 사유지인데, 올레길을 위해 일부 개방된 곳이라고 쓰여 있었다.


멈춰 계신 분들의 이야기를 얼핏 들으니, 말이 무서워서 발조차 들이지 못하고 돌아갈까 말까 망설이는 중이셨다. 우리의 용감한 아이들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들 사이로 돌진하고 있었고!


얘..얘들아 조심해! 말 뒤로 갈 때는 최대한 조용히 지나가야 돼!


성큼성큼 말들이 있는 한 중간으로 걸어가던 아이들! 내 딸들인데 멋있어ㅠㅠ



아이들은 말들 사이를 요리조리 조심해서 잘 지나가고 있었다. 문제는 나였다. 나는 말들이 달려 들까봐, 혹은 뒷발 차기라도 할까봐 잔뜩 쫄아서는 한 걸음도 내딛지를 못하고 있었다.


"아... 무서워... 막상 지나 가려니까 너무 무서운데?"


이미 말들 사이를 다 지나간 남편과 아이들은 강 건너 불 구경 하듯 나를 보고 있었다. 얘들아, 엄마 지금 떨고 있니?


"엄마, 말 쳐다 보지 말고 앞만 보면서 와!"


"엄마, 말 뒤쪽으로 너무 가까이 가지마~"


아이들의 코치를 받으며, 마(馬)의 구간을 겨우 탈출할 수 있었다.


자유로운 말들 사이를 겁 먹지 않고 지나가는 건 꽤 어려워요ㅠㅠ



내 뒤로 여전히 말들 사이로 입장하지 못하신 분들이 수두룩했다. 오름 오르는 길에 뒤를 힐끔 돌아보니, 한 커플은 말 세 마리에게 둘러싸인 채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어 있었다.


'흐엉!!!! 보기만 해도 무섭잖아!!!!'


나는 빠른 걸음으로 오름을 올랐다. 말들이랑 얼른 거리두기라도 해야 마음이 안정될 것만 같았다.


말 세 마리에게 둘러싸인 한 커플이 보이나요? 구해주지 못해서 미안해요 그대들ㅜㅜ




문도지 오름 정상까지는 금방 오를 수 있었다. 정상에서 내려다 본 제주 서쪽 지역 풍경은 역시나 예술이었다. 제주 동쪽에 사느라 서쪽으로는 자주 올 수가 없어서 더 귀한 장면을 목격한 기분!


다만 햇빛을 피할 곳이 전혀 없어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조금만 덜 더웠으면 사진도 많이 찍고 여유롭게 풍경을 감상했을 텐데, 당장은 하산이 시급했다.


심지어 어디선가 사람들의 꺅-하는 비명이 들려 우리가 걸어온 길을 내려다 보니, 으악!!! 아까 봤던 말들이 다른 올레꾼들과 함께 힘차게 오름을 올라오고 있는 게 아닌가! 속도도 겁나 빨라! 덜덜...


엄마! 말이 엄청난 속도로 올라오고 있어! 우리 빨리 도망 가자~


문도지 오름 정상에서, 야호!
저 멀리 한라산도 보이고, 너무 더워서 별도 좀 보이고...ㅋㅋ
오름을 올라오고 있는 저건... 말?
엄마 아빠! 우리 얼른 내려가자! 말들이 쫓아오고 있어!


말들이 오름을 올라올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기에 더욱 당혹스러웠다. 말들은 오르막 경사도 아랑곳 않고 질주하듯 맹렬히 달려오고 있었다. 우리 집 아이들도 말들이 쫓아오는 모습에 기겁해서 도망치기 시작!


걸음아, 나 살려라~ 말 무리들에게 둘러싸이고 싶지 않아!

 


사람 한 명지나갈 수 있고, 말은 지나갈 수 없도록 만들어 둔 미로식 게이트를 통과한 뒤에야 말과의 숨막히는 추격전이 겨우 일단락 되었다.


"엄마... 여기까진 말도 못 쫓아 오겠지?"


"막 여기 위로 점프해서 넘어 오고 그러는 거 아니겠지?"


거친 숨을 몰아쉬며, 행여나 말들이 쫓아오고 있을까봐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 아이들이었다. 덕분에 문도지 오름은 단숨에 내려갈 수 있었으니, 우리를 채찍질(?) 해준 말들에게 오히려 고마워 해야 되나 싶었다.


방목된 말을 가까이에서 보고 싶으신 분은 문도지 오름에 올라 보기를 강추합니다!!! 생각보다 몸집이 말이 거침없이 달려오더라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다면요^^


애들이 너무 덥다고 화내서, 나혼자 찍은 중간 스탬프 인증샷!




아빠와 딸이 나란히 걷는 모습을 바라볼 때면...


나의 남편과 나의 아이, 그러니까 아빠와 딸 관계인 두 사람이 나란히 걷는 뒷모습을 볼 때면 괜시리 마음 한 켠이 울컥해질 때가 있다. 평소보다 올레길을 걸을 때 특히 더 그렇다.


힘든 길을 함께 걸어주는 아빠가 내 곁에 있다는 게, 이 세상에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게, 너무나 당연했던 시절의 내가 떠올라서 그럴 것이다.


아빠가 돌아가신 지도 벌써 15년이나 되었다. 아빠가 세상을 떠나신 뒤에 나는 남편을 만났고, 결혼을 했고, 아이도 둘이나 낳았다.


나는 어릴 때부터 아빠 팔짱을 끼면서 결혼하는 신부 흉내를 내고는 했다. "딴~딴따다~" 결혼 행진곡도 직접 입으로 부르면서. 그리고는 야무지게 이렇게 얘기하고는 했었지.


나는 아빠랑 결혼하고 싶은데, 안 되나? 세상에 아빠보다 좋은 사람은 못 만날 거 같은데, 우짜지? 그냥 시집 가지 말고 아빠 옆에서 평생 살아뿌까?


아빠는 주접 떠는 나를 허허 웃으시며 보다가, 내 볼을 다정히 쓰다듬어 주시고는 했다. 그 때의 아빠 표정과 손길과 웃음 소리가 여전히 생생한데, 나는 그를 다시는 만나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런 슬픈 마음이 들 때면, 남편과 아이들의 모습을 두 눈 가득 담아 본다. 나의 아이들에게 최고의 아빠가 되어준 남편에게 감사하며, 아이들이 쉴새 없이 불러대는 "아빠~" 소리에 대리만족하며.


아빠와 함께 걷는 내내 종알종알 떠드는 둘째, 과거의 나를 닮았다.
세상에서 가장 든든하게 나를 지켜줄 거라고 믿었던 존재, 아빠!



아빠, 하늘에서 둘째 딸 잘 내려다 보고 계신가요? 미안하지만 아빠보다 조금 더 멋진 사람을 만나는 바람에 결혼도 했고, 날 닮은 딸도 둘이나 낳았어요! 아빠와 나란히 걷던 모든 순간들을 추억하며, 저는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어요!

아빠... 언젠가 다시 만나면, 그 때 꼭 다시 팔짱 껴 드릴게요! 오래 못 봤던 만큼 아빠 옆에 꼭 붙어서 나란히 걷고 또 걷고 싶어요 :)
  



긴급 상황 발생! 화장실이 없다!

 

앞서 걷던 첫째가 갑자기 곤란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며 내게 말했다.


"엄마, 나 배 아파... 화장실..."


딸의 요청에 당장 휴대폰 속 지도를 검색해 보았다. 그런데 우리가 위치한 곳은 초록으로 뒤덮인 어느 숲 한 가운데였다. 아무리 검색해 봐도 주변에는 화장실이 전혀 없다고 나왔다.


남편도 긴급 상황임을 감지하고 화장실을 폭풍 검색하기 시작... 그나마 가장 가까워 보이는 화장실이 도착 지점인 '오설록 뮤지엄' 안의 화장실이었다.


"딸... 아직 참을만한 정도야, 아님 못 참겠어?"


"음... 아직은 참을만 해, 아빠!"


"그래, 그러면 서둘러서 도착 지점까지 가자! 오설록 뮤지엄까지 가야 화장실이 있거든!"


"아... 진짜? 도착 지점까지는 얼마나 걸려?"


"아빠 생각으로는 한 30분? 어때, 그 정도면 참고 걸을 수 있겠어?"


"응, 참고 걸어 볼게! 빨리 가자~"


걸음이 빠른 남편이 첫째의 손을 덥썩 잡았다. 그 순간부터 남편은 첫째를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도착 지점까지 끌고 가야 하는 중요한 임무를 맡게 되었다.


끌고 가는 남편도, 잘 참으면서 가는 첫째도, 둘다 파이팅!


남편은 막중한 임무를 띠고, 첫째와 짝을 이뤄 걷는 중!




아주 빠르게 통과해야만 했던 '곶자왈'


곶자왈은 그토록 원하고 바라던 그늘로만 이뤄진 우거진 숲이었다. 이 곳을 걷기 위해 14-1코스를 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신비로운 느낌이 가득한 날것의 숲이었다.


곶자왈 : 숲을 의미하는 '곶'과 나무와 덩굴, 암석이 뒤섞인 덤불을 의미하는 '자왈'이 합쳐진 제주 말로 제주에서만 볼 수 있는 특정한 숲 지대를 일컫는다. 돌이 많아서 지형이 울퉁불퉁하고, 나무와 덩굴들 그리고 양치류 식물 등이 우거져서 마치 정글처럼 빽빽한 모습이다.


곶자왈 입구 / 이 곶자왈을 다 걸어야만 도착 지점이 나온다!


곶자왈 안으로 들어서니 코로 들어오는 공기마저 달랐다. 한낮인데도 어둡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숲은 우거져 있었고, 덕분에 한결 시원해진 느낌으로 수월하게 걸을 수 있었다.


하지만 한가하게 곶자왈을 즐기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우리에겐 첫째의 '화장실 이슈'를 해결하는 게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한시라도 빨리 이 곶자왈을 빠져 나가는 것만이 중요했다.


초록색 곶자왈과 너무 잘 어울리던 올레 리본 :)
안간힘을 다해 인내하며 걷고 있는 첫째! 장하다 우리 딸!
속도를 올려서 걸으니 매우 힘들어 했지만, 쉬다 갈 여유조차 없었다!




아주 빠르게 도착한 '오설록 녹차밭'


화장실 이슈가 생긴 이후로 발에 모터를 단 듯, 아주 빠른 속도로 잘 걸어준 첫째! 덕분에 별탈 없이 오설록 녹차밭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곶자왈을 빠져 나와, 드넓은 녹차밭과 마주하다!


그녀는 얼른 화장실로 뛰어 가고 싶어 했지만, 같이 완주하게 된 중년의 부부께서 가족 사진을 찍어 주겠다고 하시는 바람에 인증샷부터 찍어야 했다.


가족 사진을 찍자 마자, 그녀는 아빠와 함께 화장실이 있는 '오설록 뮤지엄' 안으로 급히 뛰어 갔다. 그녀는 그 곳에서 이윽고 평온을 얻었으리라..^^


같이 완주한 중년의 부부께서 찍어주신 가족 사진^^




이 더운 날, 여러 이슈가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잘 걸어준 어린이들에게 특별한 포상을 해주기로 했다. 바로 오설록 뮤지엄에서 시원한 음료 사주기!


나는 녹차 아이스크림, 첫째는 우도 땅콩 스무디, 둘째는 한라봉 스무디, 이렇게 자기 취향껏 골라서 먹게 되었다. 머릿속까지 얼어 버릴 것 같은 시원하고도 달콤한 맛이었다.


오설록에서 시원한 거 먹으며 마무리! 날씨가 얼마나 더웠으면 스탬프도 녹은 채로 찍힘ㅠㅠ



"얘들아, 14-1코스는 어땠어?"


"말이 많아도 너무 많았어~!!"


"또?"


"엄청 더운 끝에 먹는 달달이가 최고다?"


"역시 마지막에 사준 음료가 제일 기억에 남는구나~"


"아, 한 가지 더 있어! 다시는 더울 때 걷지 않겠다!"


"엄마, 약속 꼭 지켜야 돼~ 6월부터 8월까지는 절대 올레길 안 걷는다던 그 약속!"



얘들아, 어쩌지? 엄마는 그 약속 잘 지키기는 했는데, 벌써 9월이 되었네? 우리, 가을 바람이 조금씩 선선하게 불어오면 또 올레길 걸으러 가보자꾸나! 이번에는 어떤 코스로 걸을까? 벌써부터 엄마는 너무 기대가 돼~ 상반기에 걸었던 것처럼 하반기에도 열심히 걸을 수 있겠지? 우리 딸들, 파이팅이야!



★올 가을부터 올레길 걷기를 다시 시작하게 되면 또 열심히 쓰러 오겠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걸어나갈 모든 길을 응원해 주세요~ 시즌 2로 찾아 뵐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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