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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체리뽀 Dec 18. 2024

귤만 봐도 행복해지는 재주

제주에서는 크리스마스 트리조차도 '귤빛'으로 반짝인다.

 

결국 제주에도 겨울이 찾아왔다.


겨울의 끝 무렵인 2월에 이사와, 여러 계절을 보낸 뒤에 다시 맞게 된 제주의 겨울.

 

제주의 겨울은 육지보다 훨씬 따뜻할 것 같지만 의외로 춥다.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지 않는데도, 해가 나지 않고 바닷바람이 강하게 불어올 때면 뼛속까지 시릴 정도로 춥게 느껴진다.


하지만 제주의 혹독한 겨울 속에서도 따스한 온기를 듬뿍 느낄 수 있는 곳이 있다. 바로 크리스마스 트리에 주황색 전구를 켜둔 듯이, 나무마다 귤이 담뿍 열려 있는 귤밭을 발견할 때가 그렇다.


2024년 12월 초, 귤이 주렁주렁 열린 귤밭 :)




귤을 보고 첫눈에 반해버린 작년 이맘때


제주 일년 살이를 결심하고 남편과 집을 알아보러 작년 가을에 제주를 방문했었다. 제주공항에는 크리스마스 트리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육지에서 봐오던 트리랑은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제주를 상징하는 귤색으로 꾸며져 있었는데, 탐스럽고 따스하고 사랑스러워 보였다.


"와... 제주는 크리스마스 트리도 주황색이야! 너무 예쁘다!"


2023년 11월, 제주 공항에서 만난 트리 :)


남편과 나는 제주시보다도 서귀포시에 살고 싶었다. 제주시에서는 바다를 보려면 북향으로 창이 나 있어야 하는데, 남향으로 해도 들고 바다도 보이는 서귀포시가 훨씬 좋아 보였다.


심지어 서귀포에서는 어딜 가나 귀엽고 앙증맞은 귤을 볼 수 있었다. 귤이 많다는 건 그만큼 기후가 따뜻하다는 ! 결국 우리는 바라던 대로 집을 구하게 됐고, 덕분에 귤나무로 가득한 마을에 살고 있다.


  

2023년 가을, 귤나무를 처음 본 만 35세 어른이^^
2023년 가을, 귤밭 뷰 카페도 갔지요^^


귤림추색이란 말을 아시나요?


예로부터 제주의 가을을 귤림추색(橘林秋色)이라 표현했다. 깊어가는 가을에 주렁주렁 매달린 귤로 금빛 풍광을 이룬다는 뜻이다.


싱그러운 초록잎 사이로 보이는 주황빛 귤들은 한라산 꼭대기의 새하얀 눈과 대조되어 더욱 아름다워 보였다. '귤림추색'이란 말을 절로 실감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한라산을 배경으로 더욱 선명히 빛을 발하던 남원읍 위미리의 귤들 :)


엄마, 제주는 가로수도 귤나무야!


그랬다. 제주에 와서 본격적으로 살아보니 흔하디 흔한 게 귤나무였다. 육지에 살면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귤나무를 여기서는 사시사철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아이들도 어딜 가나 귤나무가 가득한 제주 풍경을 신기해 했다. 귤 상자 안에서만 꺼내 먹던 귤이 나무에 주렁주렁 달린 모습을  건 아이들도 처음이었으니까.


2024년 3월, 산책을 하다가도 귤이 주렁주렁!
2024년 4월, 집 근처 카페에 갔는데도 귤이 주렁주렁!



달콤한 귤꽃 내음으로 뒤덮인 봄


4월 말부터 바람결에 달콤한 냄새가 실려오는 게 느껴졌다. 아카시아 꽃인가 했지만 그보다 더 달큰하고도 청량한 느낌의 향기였다.


어릴 때부터 알레르기 비염이 심했던 나는 꽃향기를 좋아하지 않는 편인데, 이상하게 이 냄새만큼은 괜찮았다. 맡으면 맡을수록 괜시리 기분이 좋아지는 꽃내음이라니!


중독성 강한 향기를 내뿜던 꽃의 정체는 바로 '귤꽃'이었다. 제주에서만 맡아볼 수 있는, 제주에 살아 보지 않았더라면 평생 몰랐을 귤꽃 향기였다.


친정 엄마와 동네를 산책하는 내내 귤꽃 향기에 취했던 봄날 :)


볕은 따스하다가도 과랑과랑, 비는 반갑다가도 곱곱하고, 바람은 살랑살랑 부드럽다가도 팡팡 불었겠지. 겨울이다! 아꼬운 귤 따레 가보카? <김성라, 귤 사람 中>


여름이 다가올 무렵에는 공천포 바다가 보이는 시원한 카페에 앉아, 아이스 카페 라떼를 마시며 <귤 사람>이라는 제주 출신 작가님의 책을 열심히 읽었더랬다.


'아꼽다'는 제주말로 귀엽다, 예쁘다, 사랑스럽다는 뜻을 가진 단어이다. 어쩜 이리도 귤과 찰떡으로 잘 어울릴 수가 있는 건지! 나도 나직히 입 밖으로 내뱉어 보았다.


'아꼽고 아꼬운 귤'


귤 따는 시기의 제주 풍경을 잘 담은 책 <귤 사람>




비도 듬뿍, 해도 듬뿍 맞으며 초록으로 짙어지던 여름


비가 자주 내리던 6월에는 동네를 산책할 때마다 초록으로 영글기 시작한 풋귤이 눈에 들어왔다. 향긋한 내음을 풍기던 귤꽃이 진 자리에 맺힌 열매들이었다.


이 녀석들이 다 자라서 주황빛으로 물들 때쯤이면 우리의 제주 일년 살이도 끝나가고 있겠구나, 이런 생각이 들어 씁쓸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비를 흠뻑 맞은 뒤, 더 짙은 초록을 뿜어내던 귤!




뜨겁디 뜨거운 여름에는 시원한 '감귤 박물관'을 자주 찾았다. 아이들은 감귤 피자도 만들어 보고, 귤과 관련된 다양한 것들을 접하며 귤에 대한 애정을 새록새록 키워 갔다.


아이들과 자주 찾아간 감귤 박물관 모습 :)




여전히 볕은 뜨거웠으나 절기는 가을로 바뀌고 있던 9월, 짙은 초록에서 도통 변하지 않을 것 같던 귤 빛깔이 서서히 옅어지는 게 느껴졌다. 귤이 슬슬 익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2024년 9월 초, 귤 모자를 쓰고 귤밭을 구경해 봅니다.
2024년 9월 중순, 귤 색깔이 노리끼리(?) 해지고 있어요!


귤을 사 먹는다고?


제주 분들 사이에 전해져 내려오는 말이 하나 있다. 제주에 오래 살았는데 귤을 사 먹는다면 인간성이 좋지 않은 사람일 수도 있다고!


그 말인즉슨, 제주에 오래 살다 보면 건너건너 아는 사람은 다 귤밭을 하니 귤을 받을 일이 비일비재 하다는 뜻이다. 슬프게도 제주에 일년 살러 온 우리 가족은 귤을 사먹는 처지였는데...


귤 농사를 하시는 옆집 아버님께서 가끔씩 황금향과 귤을 갖다 주시고는 했다. 우리 집 아이들이 손주 같아 예쁘다고 하시면서...^^


이번 가을에는 앞집 사는 이웃분도 귤을 한 다라이(?) 건네 주셨다. 한동안 귤 부자가 된 우리 가족은 손톱 밑이 노랗게 물들도록 열심히 귤을 까먹었다는 후문이...


2024년 10월, 제주 이웃분들이 나눠주신 귤과 황금향♡




탐스러운 노랑에서 주황으로 익어가는 가을


귤 농사 지으시는 이웃분께 귤을 받고 보니, 귤이 익어가는 가을이 온 게 틀림 없었다. 이제는 서귀포의 어느 곳을 가도 샛노란 귤을 볼 수 있는 시기가 되었다.

 

2024년 10월, 샛노란 귤과 연두색 귤이 섞여 있던 시기!
2024년 11월, 노랑색 혹은 주황색으로 선명히 익은 귤!
창문 밖으로 귤이 가득한 11월의 서귀포 카페들 :)




작년 11월에 제주공항에서 귤빛 트리를 처음 본 이후 딱 년이  올해 11월..


우연히 찾은 카페 <고즈넉이>에서 탐스러운 귤이 가득 달린 트리를 발견했다. 물론 모형 귤이었지만 오랜만에 주황빛 트리를 보니 년 전의 감정이 떠올랐다.


제주에서 일년을 살겠다고 결심은 했지만 제주 살이가 생각보다 녹록치 않다고 느껴지면 어쩌나, 제주에서 보내게 될 날들이 의미 없이 흘러가면 어쩌나, 걱정도 참 많이 됐었다.


다행히, 제주에서의 일년은 미치도록 황홀했고 넘치도록 행복했다. 제주의 귤이 탐스럽게 익어가는 동안, 제주에서의 내 삶도 알차게 무르익어 갔던 것이다.


제주에서 귤빛 트리를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지금!


제주에 사는 동안 귤도 한 번 따봐야지?


가을의 끝물이었던 11월 마지막 주말, 아이들과 귤 따기 체험도 하러 갔다. 제주에 사는 동안 아이들과 꼭 하고 싶은 버킷 리스트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귤로 꾸며진 포토존도 다 예뻤고, 아이들이 손수 따주는 귤을 바로 까먹는 재미도 쏠쏠했다. 아이들 얼굴에도 귤빛 미소가 가득 번진 하루였다.


포토존마저 사랑스러웠던 감귤밭 :)
아이들이 갓 따준 귤을 냠냠 맛있게도 먹었습니다^^




귤과 함께 했던 모든 계절이 지나고, 다시 겨울


어느덧 올해의 마지막 달 12월이 되었다. 겨울은 이제 막 시작했지만, 우리 가족의 제주 일년 살이는 겨울이 끝나기도 전인 2월 어느 날에 끝을 맺게 될 것이었다.


아쉬운 마음에 12월에도 올레길을 걸으며 제주 구석구석을 돌아보고 있다. 여전히 나무마다 달려 있는 귤들은 크리스마스 트리에 장식해 둔 주황빛 전구처럼 보인다.


12월에도 여전히 주황빛 귤들은 탐스럽게 달려 있고^^
귤 트리 덕분에 12월의 제주도 밝고 예쁩니다 :)




얼마 전에 애슐리 부페를 가려고 처음 방문한 켄싱턴 리조트에서는 대왕 귤 트리를 보게 되었다. 이게 바로 제주의 크리스마스 트리지! 이런 느낌이 뿜뿜했던 귤 트리^^*


(귤보다는 오렌지에 가까운 느낌이었지만 그냥 대왕 귤인 걸로~)



다시 육지로 이사 가기 전까지 얼마나 더 많은 귤 트리를 만나게 될지 사뭇 기대가 된다. 제주에서만 볼 수 있는 귤 트리인 만큼, 만날 때마다 눈으로 한 번, 또 사진으로 한 번 잘 담아둘 예정이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중에도 내 입으로는 새콤달콤한 귤이 끊임없이 들어가고 있다. 내 평생 먹은 귤 중에 올해 제주에서 먹은 귤이 제일 맛있었다는 게, 이제는 아쉬울 따름..ㅠㅠ


귤아, 너와 함께 한 제주의 모든 날들이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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