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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체리뽀 Dec 04. 2024

제주의 가을을 누리는 재주

출렁이는 억새의 은빛 물결을 따라 걷는다.


나는 사계절 중에 가을을 가장 좋아한다.


하늘이 시리도록 푸르러서 좋고, 불어오는 바람이 청량해서 좋다. 가을에만 피어나는 예쁜 꽃들과 알록달록 화려하게 물드는 단풍을 보는 것도 좋다.


이토록 좋아하는 가을을, 올해만 특별히 제주에서 보내게 되었다. 어쩌면 내 생애 최고의 가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부지런히 제주의 가을을 만끽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올해는 유난히도 여름이 길었다. 가을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올 듯 말 듯 좀처럼 오지 않는 가을이 야속하기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바로 전날까지만 해도 반팔 옷을 입고 다닌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옷장 속 깊숙이 넣어둔 가디건을 꺼내 입다가 문득, 내 입이 귀에 걸렸다는 걸 깨달았다.


아,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가을이 제주에도 찾아온 것이다!


가을이 왔어요! 자주 가는 표선 바다도 가을 빛깔로 바뀐 듯 했던 :)




가을의 시작을 알려준 핑크뮬리와 코스모스!


가을 바람을 느끼자마자 달려간 곳은 <카페 글렌코>였다. 핑크뮬리와 코스모스 정원이 있다기에 가을 정취를 물씬 느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내 예상은 적중했다. 봉긋한 오름을 배경으로 핑크뮬리와 다채로운 색깔의 코스모스가 가득 피어 있었는데, 어딜 둘러 봐도 가을 그 자체였다.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홀짝홀짝 마시며 정원을 산책하노라니, 제주의 가을 속으로 성큼 들어선 기분이었다.


카페 글렌코의 핑크뮬리 정원 :)
카페 글렌코의 코스모스 밭에서 :)




극적으로 다시 만난 황화 코스모스!


아직 무더위가 기승이던 9월 초의 일이다. 차를 타고 가다가 녹산로를 주황빛으로 물들인 '황화 코스모스'의 물결을 보며 탄성을 질렀던 적이 있다.


당장이라도 차에서 내려 황화 코스모스와 사진을 찍고 싶었지만, 바깥 온도는 30도를 훨씬 웃돌고 있어 엄두가 나지 않았다. 대신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후훗, 날씨가 좀 더 시원해지면 황화 코스모스 보러 와야지!'


가을이 성큼 다가온 뒤, 봐두었던 황화 코스모스를 보려고 다시 녹산로를 찾았다. 헌데, 아무리 둘러봐도 황화 코스모스는 온 데 간 데 없었다.


꽃들이 언제까지고 피어 있을 거라 여긴 내가 어리석었다. 올해 황화 코스모스는 그 때 눈으로나마 볼 수 있었던 걸 다행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다 며칠 후, 화장실을 이용하려고 우연히 들른 성산읍사무소 앞 마당에 주황빛 꽃들이 한 무더기 피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 다신 못 본다고 생각했던 황화 코스모스였다!


네잎 클로버를 발견한 것보다 훨씬 큰 기쁨으로 황화 코스모스를 마주하게 되었다. 아마도 제주를 상징하는 주황색 꽃이라 더욱 반갑고 좋았던 것 같다.


우연히 마주친 황화 코스모스, 반가움에 몸서리가 쳐졌던 순간!




핑크뮬리 언덕에서 즐긴 로맨틱한 가을!


사실, 최근 몇 년간 핑크뮬리를 보러 갈 때마다 마음이 조금 불편했었다. 이유는, 핑크뮬리가 생태계 교란종이라는데 한국 사람이 이걸 즐기는 게 맞나 싶었기 때문이다.


국내 한 연구자가 작성한 생태학 분야 최상위 국제 SCIE 학술지인 Ecosphere에 게재된 연구 논문에 따르면, 17여종의 자생 식물과 1:1 경쟁 실험 결과 핑크뮬리가 자생 식물들의 정착과 성장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 나라의 자연 생태계에 위해한 생태계 교란종이 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나무 위키 백과 '핑크뮬리' 설명 中>


다행히 이런 정보를 얻게 되어 핑크뮬리에 대한 오해를 풀게 되었다. 마음의 짐을 덜어낸 뒤, 올해는 더 제대로 핑크뮬리를 즐기기 위해 <제주 허브 동산>을 찾았다.


제주 허브 동산, 핑크뮬리 언덕에서 느낀 가을!


정말, 이렇게나 예쁜 '벼과 식물'이 또 있을까 싶었다. 은은한 분홍빛으로 살랑이는 핑크뮬리를 보고 있자니 마음까지 부들부들해지는 것 같았다.


야트막한 언덕 전체가 핑크뮬리로 뒤덮여 있는 이 곳은 사잇길만 따라 걸어도 마치 핑크뮬리 속에 푹 파묻혀 있는 듯 사진이 찍힌다.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 속으로 빨려 들어간 것처럼.


그 옆의 평지에도 핑크뮬리가 드넓게 펼쳐져 있다. 중간에 놓인 파란색 돛단배에 오르면 분홍빛 파도가 밀려드는 바다 위를 항해하는 기분을 느낄 수가 있다.


제주의 가을을 로맨틱하게 즐기고 싶다면 허브 동산이 아니더라도, 핑크뮬리가 있는 곳에 꼭 가보시길 추천한다. 여기서 중요한 팁은, 맑은 날에 가야지만 핑크뮬리의 고유한 빛깔을 만나볼 수 있다는 것!


분홍색 바다를 항해하는 기분이 들었던 :)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제주의 가을 하면 억새지!


가을에 피는 꽃들과 핑크뮬리를 실컷 봤으니 제주의 가을을 다 누린 건가 싶을 때쯤, 묵묵히 나를 기다리고 있던 존재가 눈에 띄기 시작했다. 바로, 억새였다!


제주의 가을 하면 억새지! 억새를 보려면 오름에 꼭 가보라던 제주 분들의 말씀이 떠올라, 남은 가을날은 억새를 보는 데만 집중하기로 했다.


가장 먼저 가본 곳은 <용눈이 오름>이었다. 오름 등성이마다 억새가 물결을 이루어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는데, 마치 새하얀 눈이 수북히 쌓여 있는 것처럼 보였다.


화려한 색깔과 아름다운 모양새를 지니지는 않았지만, 한데 어우러진 채로 바람결에 일렁이는 억새는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용눈이 오름, 하얀 눈이 내린 듯 억새로 뒤덮인 모습 :)


같은 날, 용눈이 오름 맞은 편에 우뚝 솟아 있던 <다랑쉬 오름>도 함께 올랐다. 용눈이 오름보다 훨씬 높은 오름이라 그런지 정상에서 바라본 제주 동쪽 바다 뷰가 아주 좋았다.


저 멀리 우도와 성산일출봉이 보이고, 양 옆으로는 은빛 억새가 출렁이는 모습이라니... 이게 바로 제주의 가을을 대표하는 풍경이 아닐까 싶었다.


다랑쉬 오름에 올라서 바라본 제주 동쪽 바다 :)




은빛 억새 물결과 함께 저물어 가던 가을!


가을을 계속 붙들어 두고 싶은 내 마음과 달리, 가을은 점점 멀어져 가고 있었다. 가을이 훌쩍 떠나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곳으로 찜해 둔 <따라비 오름>에 오르기로 했다.


양 옆으로 늘어선 억새들의 환호를 받으며 정상에 오르면, 흔들리는 억새들 사이로 굳건히 서 있는 산 하나가 보인다. 제주에 살게 된 뒤로 매일 보지만 볼 때마다 내 가슴을 뛰게 하는 한라산이다!


따라비 오름에서는 한라산과 억새를 동시에 눈에 담으며 분화구 둘레길을 걷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따라비 오름에서는 한라산과 억새를 한 눈에 담는다.


이 많은 억새들이 봄에는 다 어디에 숨어 있었던 걸까? 같은 곳인데도 계절이 바뀌니 완전히 다른 곳처럼 느껴지는 게 신기했다.


봄에 가본 따라비 오름도 충분히 아름다웠지만, 억새가 넘실대는 따라비 오름은 가을에 꼭 가봐야 할 곳으로 추천하는 바이다.


억새가 만발한 따라비 오름 :)


그리고 이름과 걸맞지 않게(?) 억새가 장관인 곳이 하나 더 있었는데, 바로 <유채꽃 프라자>이다. 봄에는 유채꽃 맛집으로 유명했던 곳인데, 알고 보니 숨겨진 가을 억새 맛집이었다!


사람 키보다 훨씬 큰 억새들 속으로 걷는 재미도 쏠쏠하고, 바람개비 모양의 풍력 발전기도 곳곳에 있어 이국적인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바람개비 모양의 풍력 발전기와 함께 억새를 볼 수 있는 곳
억새가 끝도 없이 이어지는 길 :)
귀여운 포토존 의자에서 억새를 실컷 구경해 봅니다^^




찬란하게 아름다웠던 제주의 가을이여, 안녕!


제주의 가을은 소소하고 단출해서 참 좋았다.


육지에서는 오색찬란한 단풍을 보기 위해 오랜 시간 차를 타고 가거나, 사람으로 가득찬 핑크뮬리 밭에서 사진 한 번 찍어 보겠다고 안간힘을 쓰는 가을이 대부분이었는데...


제주에서는 어딜 가나 한적해서 좋았다. 우연히 걷다가 발견한 곳도, 마음 먹고 찾아간 곳도, 생각보다 사람이 없어서 온전히 풍경에만 집중할 수 있어서 더 좋았다.


화려한 꽃들과 알록달록한 단풍이 있는 가을을 좋아하던 내가, 은빛 억새만 봐도 예쁘다고 물개 박수를 치며 행복해 하던 이번 가을. 슴슴하지만 매력적인 제주의 가을을 누릴 수 있어 넘치게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비양도에서 억새와 함께 바라본 제주 본섬과 한라산 모습 :)


그리고, 그토록 바라고 원했던 제주의 가을은 내 곁을 계속 맴도는 듯 하다가 어느 날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가을이 떠난 자리를 겨울이 채워주고 있지만, 나는 아직 지나간 가을을 몹시 그리워 하는 중이다.


눈을 감으면 억새의 은빛 물결이 일렁이는 듯 하고, 바람에 사정없이 흔들리며 샤샤샥-거리던 억새의 소리도 들리는 듯 하다. 이게 바로 제주의 가을을 찐하게 누린 후폭풍이 아닐까 싶다.


제주 일년 살이 중 벌써 세 번째 계절을 떠나 보내게 되었다. 봄, 여름, 그리고 가을...


마지막으로 맞이하는 계절인 겨울에는 또 어떤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까. 떠나 보낼 때마다 이렇게 아쉬움이 한가득인데, 조금이라도 미련이 덜 남도록 '제주의 겨울'도 따뜻하고 알차게 보내야겠다.


그러니까, 찬란하게 아름다웠던 가을이여, 이제 그만 보내줄게! 덕분에 행복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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