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다닐 때 내가 제일 하고 싶었던 게 뭐였는지 알아? 사계절을 온전히 몸으로 느끼고 즐기는 거
며칠 전 벚꽃이 만개한 제주대학교 앞 벚꽃길을 남편과 함께 걷던 중, 남편에게 듣게 된 말이다. 바람에 흩날리는 연분홍빛 꽃잎들을 아련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남편은 자신의 오랜 소망을 나에게 고백해 왔다.
나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남편이 꽃 구경을 좋아한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육지에 살 때만 해도 꽃 피는 봄이 오면 호들갑을 떨며 꽃 구경 가자고 난리법석인 건 오직 나뿐이었다. 남편은 마누라의 등살에 못 이긴 척 함께 가주는 사람이었지만, 꽃 구경을 즐거워 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꽃 구경에 억지로 따라 나선 남편은 가는 길엔 차가 막혀서 몹시 힘들어 했고, 가서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불만인 얼굴이었다. '본디 이 사람은 꽃 구경을 싫어하는구만…' 이렇게 판단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표정이 굳어 있던, 꽃 구경 때마다의 남편이 확실히 기억난다.
그래서 나는 남편과 꽃, 이 두 단어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런 내가 제주의 아름다운 벚꽃길을 걸으며, 남편과 꽃을 동시에 눈에 담고 있었다.남편과 꽃! 의외로 잘 어우러지는 둘의 신선한 조합에 놀라워 하며, 행여 그 장면이 날아갈까 싶어 사진으로 담기에 바빴다.
이런 말은 좀 낯간지러울 수 있는데, 꽃을 진지하게 바라보는 남편 모습이 예뻐 보일 정도였다. 수많은 꽃망울을 올려다 보는 남편의 따스한 눈망울이라니! 더할 나위 없이 보기 좋았다.
여기 제주에 와서야 나는 남편과 꽃의 관계성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내리게 되었다.
1. 남편은 꽃이 예쁘다는 걸 아는 사람이었다. 2. 남편은 꽃을 바라보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3. 남편은 사실 ‘꽃’과 아주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꽃길을 느긋하게 걸으며, 온몸으로 봄을 느끼는 중인 남편^^
하… 너무 좋네. 꽃이 참 예쁘다!
남편은 평소에 리액션이 거의 없거나, 하더라도 크게 하지 않는 편이다. 같이 맛있는 걸 먹을 때도 “와~ 대박 맛있어! 여보는 어때?”라고 계속 떠들어 대는 나와는 달리 “괜찮네…” 정도로만 표현하는 사람이 바로 우리 남편이다!
아내 번역기 작동 : 남편의 ‘괜찮네… 먹을만 하네…’ 정도의 맛 표현은 사실 ‘엄청 맛있다’는 뜻!!!
그런데 그런 남편의 입에서 꽃길을 걸을 때마다 “하… 좋다…”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오고 있었다. 나는 꽃 구경보다도 오랜만에 마구 터져 나오는 남편의 찐 리액션을 보는 게 더 반갑고 좋았다. 봄꽃의 아름다움이 잠자고 있던 남편의 감성 세포도 건드려준 듯 했다.
이제와 생각하니 남편은 꽃 구경을 싫어한 게 아니었다. 맞벌이 부부이다 보니 꽃 구경은 당연히 주말에만 갈 수 있었는데, 그러자면 극심한 교통 체증과 엄청난 인파를 감내할 체력이 필요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남편이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게 ‘차 막힘’과 ‘사람 많음’이다. 그러니 꽃 구경도 덩달아 싫었을 수밖에^^;
여기 제주에 와서는 평일 중 사람들이 거의 없는 시간에, 사람들이 잘 모르는 곳으로 꽃 구경을 다니고 있다. 어차피 제주는 수도권에서 경험했던 교통 체증도 거의 없어서, 차를 몰고 어디를 가더라도 전혀 부담이 안 된다. 그러니 제주에서의 꽃 구경은 남편도 나도 그저 신날 수밖에!
전혀 유명하지 않은, 한적한 공원에서 우연히 마주친 아름다운 벚꽃길^^
남편은 14년동안 회사 사무실에서 대부분의 하루를 보냈던 사람이다.
겨울에 자꾸 얇게 입고 나가는 남편에게 “추운데 따뜻하게 껴 입고 가!” 하면, “사무실 가면 난방 때문에 엄청 더워~”라고 했었고. 여름에 자꾸 도톰하게 입고 나가는 남편에게 “무슨 한 여름에 긴팔이야?” 하면, “사무실에 에어컨 바람이 세서 추워~”라고 했었다.
겨울엔 춥고 여름엔 더운 게 맞는데, 너무나도 당연한 자연의 이치조차 남편은 잊고 사는 듯 했다. 그 계절에만 느낄 수 있는 공기와 습도, 햇빛과 바람 등을 못 누리고 사는 남편을 보고 있자면 어쩐지 좀 마음 아팠다.
그러니 여기 제주에서의 1년 동안은 본인이 오랫동안 바라온 대로, 온전히 사계절을 만끽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지금은 찐하게 봄을 누리는 중이고, 곧 다가올 다른 계절도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면서 말이다.
추우면 추운 대로, 더우면 더운 대로, 맑으면 맑은 대로, 흐리면 흐린 대로, 계절과 날씨에 맞게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사계절을 온전히 누리고 싶다던 남편의 바람 덕분에, 함께 꽃길을 걷는 기쁨을 누리게 된 건 다름 아닌 나다! 나는 요즘 새해 덕담으로 많이 건네는 말인 ‘꽃길만 걸으세요’의 주인공이 된 듯 살고 있다.
가족과 함께 걷는 꽃길도 참 좋아요 :)
제주에서 아름다운 꽃길을 걷다 보면, 문득 내가 육지에서 자주 다니던 길이 떠오른다.
그 때도 여전히 꽃길만 걷고 싶은 열망은 가득했는데, 나는 어쩐지 매일을진흙탕길이나 가시밭길로만 다니는 기분이 들고는 했다.
육지에 살 때, 내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던 길은 바로 '출퇴근길'이었다. 심지어 그 길을 걸어 다니지는 못하고 늘 차로만 다녀야 했는데, 출퇴근길은 내가 그토록 원하던 꽃길과는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매일 새벽 6시에 일어나 급하게 출근 준비를 하고, 아이들 아침밥만 차려주고 정작 나는 끼니를 거른 채 부랴부랴 차에 올라 출발해도, 언제나 길 위에서 기본 1시간 이상을 보내야 했던 아침 출근길.
내가 출근하는 그 시간에 마주한 길은 늘 ‘차들로 꽉 막힌 답답한 길’이었다. 실제로 바퀴가 빠진 것은 아니었지만, 마치 바퀴가 진흙탕 속에 빠져 있어 겨우 조금씩 굴러가는 것만 같았던‘진흙탕길’ 그 자체였다고나 할까…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퇴근길은 또 어땠나. 하루 종일 쌓인 고단함이 가시로 변해 온몸을 쑤시는 것 같은 기분이 들던 퇴근길은 그야말로 ‘가시밭길’로만 느껴졌다.
하루에 두 번씩은 차 안에 1시간 이상 갇힌 채로 ‘진흙탕길’과 ‘가시밭길’을 견뎌내야 했던 그 시절. 내 두 발로 꽃길을 걷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던 때가 아닌가 싶다. 빡빡하게만 느껴지던 매일의 길 위에서 ‘내 인생의 꽃길’은 언제 펼쳐질까, 몹시 바라고 바랐는데…
제주로 와서 살면서부터는, 이상하리만치 내가 걷는 길은 모두 ‘꽃길’이었다. 이름난 꽃길을 검색해서 일부러 찾아갈 때도 있었지만, 보통은 생각없이 걷다 보면 어느새 다양한 꽃들에 둘러 싸인 나를 발견하고는 했다. 정신 차려 보면 꽃길 위에 서 있는 나라니! 내가 걷는 모든 길이 꽃길이 되는 행복한 마법에 걸린 것만 같았다.
제주에 집을 알아보러 오던 11월과 이사를 오던 2월에는 빨간 동백꽃이 수줍게 나를 반겨주었고, 이른 봄을 알리는 샛노란 유채꽃 역시 발길 닿는 어느 곳에서나 양탄자처럼 예쁘게 깔려 있었다.
얼마 전 3월 말부터는 연분홍 벚꽃이 만개하며 제주에 봄이 왔음을 알려주었고, 연보라 빛깔의 무꽃도 동네 돌담 사이마다 얼굴을 내밀며 존재감을 마구 뽐내고 있었다.
집 앞 바닷길을 산책할 때에도 이름 모를 수많은 들꽃들을 만나고 있다. 어찌 이리 모진 바람에도 꺾이지 않고 온몸이 흔들리는 와중에도 꽃을 피워낸 건지, 그저 기특한 꽃들이 사방 천지였다.
그러니 제주에선 어디를 걸어도 ‘꽃길’을 걷게 될 수밖에!
부디 제주에서는 꽃길만 걸어요, 내 사랑...^^
1년 뒤에 다시 육지로 돌아가면 나는 복직을 하고, 또 지긋지긋한 출퇴근길을 운전해서 다니게 되겠지… 남편 역시 나처럼 복직을 하고, 하루 중 많은 시간을 회사 사무실에서만 보내게 될 것이다.
그 때는 올해 제주에서 걸었던 수많은 꽃길들을 떠올려야겠다. 내 인생에 이토록 많은 꽃길이 펼쳐진 적이 있었나 싶게, 황홀한 시간을 선물해 준 제주에서의 봄을 특히 많이 꺼내어 볼 것이다! 눈으로 또 마음으로 가득 담아 둔 꽃송이들을 마음 한 켠에 피워둔 채, 묵묵히 일상을 견디고 살아 내야지.
인생이란 게 참 희한하게도 꽃길만 주구장창 걸으면 얼마나 재미가 없을까 싶기도 하다. 제주에서는 1년간 예쁜 꽃길만 걸었으니, 돌아간 육지에서는 궂은진흙탕길과 가시밭길도 공평하게 좀 걸어줘야지. 무수히 많은 꽃길을 걷느라 발바닥에 굳은 살이 단단히 박혔을테니, 어쩐지 예전보다는 좀 덜 넘어지며 꿋꿋이 잘 걸어 나갈 수 있을 것만 같다.
먹어 본 놈이 맛을 더 잘 안다는 옛말이 있던가! 제주에 와서 우리 부부는 꽃길을 걷는 맛을 알게 되었다. 우리 부부는 육지로 돌아가서 다시금 일상의 빡빡한 길을 걷게 되더라도, 틈만 나면 기어코 꽃길을 찾아가 걷고 있을 게 분명하다.
제주로 떠나오기 전처럼, 내 인생에 꽃길이 알아서 펼쳐지기만을 얌전히 기다리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내 앞에 놓인 길이 진흙탕길 같고 가시밭길 같이 느껴진다면, 당장에라도 발걸음을 부지런히 옮겨 꽃길을 어떻게든 찾아내서 걸어야지!
내 두 발로 직접 꽃길을 찾아가 걷는 만큼, 내 인생에도 꽃길이 펼쳐질 확률이 더 높아질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