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생 끝에 낙이 온다 & 전화위복
오랫동안 고생 끝에 낙이 온다 & 전화위복이란 고사성어는 내게 아무런 영향력을 휘두르지 못했었다.
어릴 때는 인간관계에 관련된 일들로 징징거리느라 삶의 다른 분야에 대해서 미쳐 살펴볼 겨를이 없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나는 이런 고생 군 부류에서 철저하게 분류하여 나 자신을 바라봤다. 솔직하게 나는 제대로 철딱서니가 없었기에 이런 옛말들을 권선징악을 현실세계에서 실현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문구, 정정당당한 사회를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주는 위안, 인생의 패배에 굴복하는 이들이 자기 합리화를 위한 변명이라고 단정했었다.
"너 많이 고생했잖아."
어느 날 나를 잘 아는 친구 녀석이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는 문득 깨닫게 되었다.
'아 ~~ 내가 지나온 길이 고생길이었구나.'
불현듯 내가 밟고 걸어온 고생의 길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어졌다.
상인 집안이었던 외갓집의 경제 문화를 배경로 티끌을 모아 태산을 만드는 저축생활과 근검절약이 소비생활이었던 엄마.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높은 지능을 소유했기에 집안의 희망으로 군림하며 형제자매들 사이에서 차별된 대우를 받고 성장한 아빠. 아빠는 성장기에 배려와 겸손을 배우지 못해서 개천에서 난 용의 대우를 받지 못하면 견디지 못했다. 사회생활에 어려움이 많았고 돈에 헤펐다.
돈은 항상 우리 집의 분쟁거리이고 불화의 씨앗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로 돈이 세지 않아서 끊임없이 돈이 샘솟는 검소하고 알찬 상인 집안 외가를 둔 덕택에, 풍족함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걱정은 해보지 않고 자랐다. 오히려 성인이 되고 난 뒤에 세상에 지천으로 널려있는 수많은 돈들을 목격하며 왜 나는 그들만큼 가지지 못했을까? 건강하지 못한 열등감에 사로잡히는 데에 내 소중한 시간들을 허비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주관이 없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던 까닭에 내가 하는 대부분의 일들은 덩달아하는 것들 투성이었다. 대학의 전공마저도 좋아하는 친구가 지원하는 학교에 같은 학과를 똑같이 지원했을 정도였으니까.
주체 상실의 본보기로 채집된 후 박제가 되어 "되면 안 되는 인간상"의 표본으로 박물관에 전시되어도 손색이 없을 지경이었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후엔 이름만 들어도 아는 학교를 졸업한 폼나는 해외파 동료들이 하나둘씩 늘어났다. 그리고 가까운 친구들이나 지인들이 유행처럼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기 시작했다. 뭐가 되었던 따라 해야만 마음이 평온했던 나는 친구들처럼 덩달아 영국 유학 준비했다. 그리고 유학원의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영국 학생비자를 거절당했다.
그 후 내가 어울리던 사람들의 안테나에서 너무나 자연친화적이서 시골로 분류되었기에 내겐 완전히 잊혔던 도시! 시드니에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작용에 의해 사고처럼 오게 되었다.
20대 중반에 집에서의 넉넉한 원조와 함께 시작되었던 유학 생활. 화려한 옷으로 치장을 하고 밤마다 파티를 즐기던 유학생활은 내겐 너무나 달콤했다.
새로운 세상의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 버린 나는 너무나 쉽게도 이민을 결정했다. 아마도 원조받은 돈을 소비하며 누렸던 자유로움을 내가 획득한 자유로움이란 착각에 젖어있었던 것 같다. 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원조가 끝날 것이며 나 혼자만의 힘으로만 살아야만 한다는 현실을 잘 알고 있었다.
단지 우물 밖의 세상이 얼마나 넓은 가를 알게 된 나는, 다시 안전한 곳으로 돌아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들어 앉아있을 만큼 연기력이 대단한 아이가 아니었다.
아마도 그때까진 내 나라는 언제고 돌아갈 수 있는 곳이란 착각을 야무지게도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민 후에 내 나라는 나의 현재나 미래가 아닌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다리쯤이 되리라는 것을… 나는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그런 다리 같은 사람이 되리라는 것을 그때의 나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여유로었던 외갓집의 경제사정과 엄마가 공급해주는 돈으로 채워졌던 유학생활을 언급한 이유는, 내가 이민을 결정하던 그 시절 내게 과연 돈이라는 것이 어떠한 개념이었었는 지를 정확하게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편들어주는 엄마의 은공이 당연하다 생각했던, 배응망덕 했던 그때의 나에 모습을 이야기하고 싶어서이다.
돈을 내지 않고 먹고 잘 곳이 있다는 것, 집에 돌아오면 따뜻한 밥 한 끼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 서로 서툰 감정 언어를 소통하며, 사랑을 표현하는 데는 서툴지만 가족들이 내뿜어주는 힐링 에너지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이야기하고 싶어서이다.
시드니에서의 나의 20대 후반과 30대는 하는 일마다 제대로 되는 일은 정말 단 하나도 없었다.
쉬는 날도 없이 숨차게 뛰어다녔지만 나는 돈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다. 어쩌다 돈이 떨어진 정도가 아니라 항상 돈문제로 쩔쩔맺다. 그전까지 경험해 보지 못했던 이 돈의 실종으로 인하여 내 영혼은 끝을 알 수 없는 블랙홀 같은 깊은 수렁 속에 빠져 있었다.
생필품을 사는 일, 끼니를 걱정하거나, 집세를 못 낼까 봐 걱정하는... 전에는 생각지도 못한 원초적인 일들과 씨름하게 된 것이다.
궁핍함.
궁핍함이 선물하는 종합 선물세트 중에서 최악은 바로 자존감의 상실이다. 나는 나 자신을 믿었지만 전혀 믿지 않게 되어버렸다. 돈이 없다는 것이 인간을 이렇게까지 비굴하고 나약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을 그제야 알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내겐 위로받을 사람이 없었다. 나는 건강한 관계를 지속하는 법을 몰랐기 때문에, 고향을 벗어나 시작한 인간관계에 어려움이 계속되었다.
힘들고 고된 일은 결국 다 지난 일이 될 수도 있고 앞으로 에 삶을 재정비할 수 있는 비옥한 밑거름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위로받을 사람이 없으면 역경을 지나도 사람은 성장할 수가 없으며 같은 일들을 반복하는 선택을 하게 된다.
돈.
물론 행복의 전부는 아니다. 하지만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 건 삼신할머니라도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다른 나라에서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 사이에서 돈을 창조하는 활동은 당연히 내 나라보다 쉽지 않았다. 가슴이 터질 것 같은 절망감도 자존감의 종말도 이 돈을 버는 과정과 이 돈과의 관계에서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이민 생활을 통하여 꽤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다.
남에 나라에 살면서 어디까지 고생을 해봤나 경연대회에서 대상을 놓치지 않을 것은 확신한다. 하지만 구차하게 지난 고생 리스트 보따리를 열어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의 눈물샘을 자극하고 싶지는 않다. 그리고 이민 산업이 앞 뒤 다 자른 뒤 제공하는 이민 천국 스토리들에 흙을 뿌리고 싶지도 않다.
이민생활의 고생 파트는 나의 주관적인 기준으로 장단점이 명확하게 나뉜 뒤, 균형을 맞추어 재구성 되었다. 결국은 내 삶의 유익한 경험 폴더의 하이라이트로 저장되어있다.이민을 결정하고 선물받은 나의 오늘에 만족스럽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공짜가 없는 것이 삶의 진실이다.
평생 끝날 것 같지 않았던... 눈물 없으면 들을 수 없는 개고생을 직접 해보니... 고생 끝에 낙이 온다 & 전화위복의 옛말이 내게 선물한 것은 희망이었다.
그 희망은 나의 현실이 되어 나의 영혼에 존재 조차 하지 않았던 주관과 자존감을 탄생시키고, 세계 최강의 수준으로 끌어올려주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