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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드니우주인 Oct 06. 2021

남편은 정말 이상하다.

별 볼일 없는 인생을 사는 소통남과 불통녀.

우리의 눈에 아직까지 정상적으로 보이는 사람이 있다면  아직 그 사람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남편은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 제일 이상한 사람이다.


나는 외국인과 결혼을 했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제일 이상한 사람인 그와 결혼을 하고 내가 알게 된 것은, 어릴 적 내가 보던 동화책들은 죄다 틀렸다는 것이다.


"공주님과 왕자님은 혹은 신데렐라와 왕자님은 또는 콩쥐와 원님은 결혼을 해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현실 세계에서라면 결혼을 결심하고 준비를 시작하는 순간 새로운 문제와 갈등이 시작된다. 부부라면 남녀 간의 차이점도 있을 수 있고 사소한 생활 습관이나 사고방식의 차이들이 있다. 나처럼 국제결혼을 한 것이 분명한 한 나라의 공주인 백설공주와 다른 나라에서 백마 타고 온 왕자님... 그들이 맞닿드려야 할 문화 차이에서 생성될 수 있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갈등과 차이점에 대해선, 내가 읽고 자란 동화책에서는 한 글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동화책과 옛날이야기표 결혼 조기교육의 오류로 인하여... 남자에게 특별히 의존하거나 결혼에 목을 맨 적이 없었던 나도 결혼이 마치 인생의 마침표인 것으로 잘못 알고 자랐다.


결혼은 새로운 시작인 것을... 옛날이야기나 동화책에서는 내게 전혀 알려주지 않았다. 현실성이 결여된 동화책과 이야기들은 나처럼 결혼 후에 뒤통수 제대로 맞는 피해자들을 계속 만들어내가고 있다.


인간관계에 아무런 스트레스가 없는 남편은 구김살이 없다. 사소한 일에도 솔직하며 자기의 감정을 지나치게 까발리는 성향이 있다. 외부 자극에 의한 감정을 그래도 받아들이고 이야기하기를 즐긴다.

마음의 찌꺼기를 남기지 않는다. 가지고 있는 감정을 전혀 외면하지 않으니 결핍이나 열등감이 없어 만사가 태평하고 걱정이 없으며 이중적인 면이 거의 없다.


남편은 자주 감정의 롤러코스터에 홀로 승차해서 밑에서 올려다보고 있는 내게 옆에 타라고 손짓한다. 동시에 뚫린 입으로 제 감정을 실감나게 생중계한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시선에서는 꽤 자유로운 영혼인 남편은 인생의 동반자인 아내가 생각하는 자기의 모습에 전혀 자유롭지 못한 반전이 있다.


자신의 정체성이 내게 확실히 각인되길 원하며 마음속에 있는 대부분의 감정들을 끊임없이 말한다. 여기서 치명적인 문제점은 끊임없이 계속 말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끊임없이 나의 감정을 놓치지 않고 듣기를 원한다.


사태의 전말은 이러하다.


말이 겁나게 많은 사람이 별 말이 없는 여자를 만난 것. 본인의 감정에 무척 솔직한 사람이 본인의 감정을 잘 알아채지 못하고 감정 표현 장애가 있는 여자를 만난 것이다.


소통남이 불통녀와 한 지붕 아래서 살게 되었으니 스팩탁큘러한 결혼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길에서도 싸우고 밥 먹다가도 싸우고 미친 듯이 싸웠다. 나는 싸움 지수가 낮아서 반항 없는 약자의 삶을 선택했다.


이런 싸움 고자인 평화주의자인 내가 싸움을 할 수 있게 된 데에는 끊임없이 말하고 끊임없이 듣기를 원하는 남편의 끊임없는 깐죽거림 소통 덕분이었다.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 제일 이상한 사람인 남편에게 내가 배운 것은 제대로 싸우는 법이다.


1. 가짜 평화를 만드는 가짜 감정이 아닌 싫으면 싫다. 좋으면 좋다. 화가 나면 화가 났다. 원인과 감정의 변화의 시점부터 왜 그렇게 느꼈는지 감정을 명확히 이야기 하기.


2. 내 마음대로 상대방의 의도나 생각을 결정하지 않기.


3. 갈등이나 불만이 생겼을 때 대립 상황을 두려워하거나 피하는 것이 아닌 맞서기.


4. 발생한 상황에 대해서 옳고 그름을 따지는 데에 중점을 두는 것이 아닌 내 의사를 확실히 말하기.


5. 내 맘을 정확히 입 밖으로 꺼내서 말하지 못하고 담아두었다가 벌어지는 내 마음속의 일어나는 대 참사의 피해자를 나 자신으로 만들지 않기.


6. 다시 찾아 올 다른 종류의 싸움을 위해 지난 전쟁에서 태어났던 감정들에서 허우적 대지 않고 탈탈 털고 빠져나오기.


7. 사람을 바꿔서 쓰는 법이 아니니 나는 나대로 다른 사람은 다른 사람대로 살게 놔두기.


넘치고 흐르는 사랑을 주고 끊임없이 내게 말해주지만, 본인의 한계와 생각에 확실히 선을 그어주는 그와 미치도록 싸우다 보니 알게 됐다.    


1. 타인을 나보다 덜 배려하는 법.


2. 선을 넘지 않고도 충분히 평화롭게 우정이나 사랑 가득한 관계를 유지하는 법.


3. 모든 관계에 내가 가진 것보다 더 많이 다 주지 않아도 된다는 것.  


4. 누군가를 내 곁에 두기 위해 나를 다 태워버리지 않아도 되는 것을..





35세의 꽉 찬 나이에 결혼을 했다. 결혼 전 그런 얘기 많이 들었었다.


"눈이 너무 높은 거 아니야? 너무 따지는 거 아니야?"


아닌 척 말하고 행동하기는 하였지만..솔직히 마음속으로는 남들 못지않게 따질 만큼 따졌었다. 나는 남들이 알아채지 못하는 이중적인 반전을 간직한 완벽한 허세녀였다.


드라마에서 나오는 백마 탄 왕자님은 평민 태생의 특별한 것 없는 외모, 화려한 스펙 같은 것은 없는 처지인 내 몫이 될 수 없다는 것쯤은... 철이 들고 나선 자연스럽게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름대로 내가 남자를 볼 때 절대 버릴 수 없었던 것이 단 하나 있다면 그것은 바로 패션 스타일이었다.


그렇다 보니 결혼 전 몇 번의 연애는 스타일 좋고 허우대 매력 넘치는 나쁜 남자만 줄기차게 만났었다. 그들로 인해 부서질 때로 부서진 아픈 마음에 다시는 연애 같은 건 하지 않을 거야 라고 생각했었던 적 도 있었다. 연애를 할 때마다 착한 여자 불치병에 날개를 달아 헌신이라 포장한 찌질함을 무기로 삼았다. 내 마음을 상대방에게 정확히 전달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상대방에 감정에 상관없이 내 마음에 모터를 달아 혼자 달리고 달려 연애의 템포 파괴하는 무서운 사이코로 변신한 적도 여러 번 있다.

 

너무나 사랑했던 사람에 의해 산산이 부서져 가루가 되어버린 내 마음에 다가온 남편.


패션 스타일이 밥 먹는 것보다 중요했던 나와, 오래 입어서 종이처럼 얇고 구멍 난 티셔츠만 입는 남자와의 만남은 마이너스 백만 점의 스코어로 시작되었다.


그의 일방적인 구애로 시작되어 그의 변함없는 마음을 받아들인 후 결혼을 했다. 그리고 우리를 반반씩 똑 닮은 아이를 둘이나 낳았다.


남편처럼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자기감정을 그대로 표현하는 아이들을 키우면서 남편과 아이들에게 많은 것들을 배우고 채우며 살고 있다.  


항상 부족하고 완전히 채워지지 않았던 찢어지게 가난했던 내 마음은, 온 가족의 빨래를 하고 햇볕에 보송보송 마른빨래들을 옷장에 넣을 때마다... 온 가족이 먹을 식재료를 냉장고 안에 가득 채울 때마다... 가득 차오른다.


소통남 와 불통녀.  


구멍 난 티셔츠와 허우대만 중요했던 허세녀.   


지금까지 그와의 시간을 되돌려보니


 " 내가 꿈꾸는 이상형과 결혼을 한 것이 아닌가? "


하는 많은 여성들에게 구타를 유발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와 함께 하며 내가 깨닫게 된 것이 있다면... 내가 그 오랫동안 기다렸던 사람은 눈에 띄는 패션 스타일에  폼나는 직업과 근사한 차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 내 맘을 편안하게 해주는 사람, 내가 미쳐 찾지 못했던 내 모습을 찾아서 내 앞에 데려다준  사람, 못난 나의 모습도 변함없는 모습으로 사랑해 주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모두에게 부러움을 사는 별 볼 일 있는 삶을 살고 싶었다. 그런 삶에 어울리는 별난 인간이 되고자 나답지 않은 모습으로 참 피곤하게도 살았다.  트렌디하고 럭셔리한 라이프를 꿈꾸며 남에 눈에 어떻게 보이느냐에 신경 쓰는데 전력질주했었다.


장장 40여 년 동안 착한 척하며 거의 모든 인간관계에서 피해자 연기하느라 지쳐 죽을 뻔 한  적도 있다.


천만다행이다. 이제라도 작은 것에 행복감을 느끼는 나다운 모습으로 사는 것이 제일 맘 편한 삶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매일의 소소한 기쁨들이 모이고 이미 손에 쥐고 있는 것들에 감사하는 마음을 마련해야... 그 긴 시간 동안 그토록 가지고 싶어 안달했지만, 결코 가질 수 없었던 별 것들이 넘쳐나는 인생이 된다는 것을 말이다.


  볼일 없는 나의 인생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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