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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금알 Oct 28. 2022

10. 취약점을 받아들이는 담담함

나를 향한 타인의 시선

얼마 전 2학기가 되어 학부모 상담을 했다. 학부모 상담 기간엔  상담을 꼭 신청한다.

내가  볼 수 없는 아이의 학교 생활에 대한 이야기 흥미롭기도 하고 꼭 필요하다.


나는 선생님들을 대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주로 학교에서 상담을 하기에 선생님들 접촉이 많은 직업적 특성 때문일 것이다.


학교든 학원이든  선생님들은 크게 문제 될 일이 아닌 이상 아이의 취약점을 부모님께 전달하는 것을 꺼린다.

그것은 아이의 취약점이야기했을 때 그것을 받아들이는 부모의 태도 때문이다.

그것을 잘 받아들이는 부모들도 있지만 히려 선생님의 자질 부족을 논하며 분노하는 부모들도 적지 않다.

선생님들도 , 간접적으로 이런 트라우마들을 가지고 있고, 이런 경험이 쌓일수록 더욱 조심하게 된다.

 

나도 아이들을 상담할 때,

들을 준비가 된  부모님들에게 더 많고 솔직한 이야기를 하게 되고, 그것 최고 수혜자는 바로 내담자인 아이들이 된다.


1학기 상담 기간에 아이의 장점만 이야기해주시는 조이 담임 선생님께 넌지시 묻는다.

'선생님 조이 단점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어머니 조이는 너무 잘하고 있어요. 단점은 없어요.'

마음속으로 단점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 생각하며 다시 한번 권유한다.

'선생님, 저에게는 아이에 대한 단점을 이야기해 주는 사람이 없어요. 그래서 아이를 지도해주시는 선생님의 이야기가 너무 도움이 될 거 같아요.'

그제야 말씀하신다.

'정 그러시다면 단점 까지는 아니지만... '

이렇게 어렵게 아이의 취약점을 들을 수 있었다.


2학기 때에는 선생님이 알아서 강점취약점을 세세하게 말씀해주신다.

내가 선생님의 이야기를 맞장구치며 경청하면 선생님도 방어 없이 편하게 말씀신다

부모는 자식을 객관적으로 보기 어렵다. 누군가의 객관적인 관찰은 유의미하며 필요하다.

물론 누군가의 의견이 다 옳은 것은 아니다. 무조건적인 수용보다는 분별하는 것 필요하다.

아이의  강점을 계속 키워주고  취약점은 보완하며 어떠한 점이 한쪽으로 극단적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늘  예의 주시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나는 문득 나의 변화를 감지한다.

나는 누군가의 평가가 두려웠다.

좀 더 정확히 칭찬받지 못하는 것이 늘 두려웠다.

나와 아직 온전히 분리되지 않은  아들 조이에 대한 비판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를 향한 못마땅한 시선을 직면하기 어려워 감히 내 아이의 취약점을 누군가에게 묻지 못했고 가끔 듣더라도 받아들이지 못했다.


어린 시절  칭찬에 인색했던 아버지로 인해

FM 부모님 아래서 자유로운 영혼을 가지고 태어난 내가 그 자체로 용납받지 못했던 어린 시절로 인해

나는 용납 받음에 간절함이 생겼고 칭찬에 목말랐으며 비판에 몸져누웠다.


내가 치료되는 과정에서

아빠는 칭찬에 쑥스러우셨다는 것을

엄마는 삼 남매 독박 육아를  감당해하느라 누군가를 온전히 이해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부모님은 그 시절 각자의 최선으로 나를 양육하셨다.

나의 결핍은 부모님의 탓이 아니라 최선이었으며 단지 그 최선 안에 부모님의 쓴 뿌리가 녹아 있었기에 생긴 것이었다.


그 후로 나는 타인의 비판에 좀 덜 아프다.

나와 가장 가까운 조이와도 더 분리가 되며, 나의 아들이지만 나와 다른 사람임을 인정하며 그에 대한 비판은 그의 몫으로 받아들인다. 물론 조이가 아직 미성년자이기에 조이에 취약점엔 나의 지분이 상담함을 인정한다.

 

오늘도 아이를 키우며 나를 더 알아가고 나의 쓴 뿌리를 발견한다.

그 후에야 나는 나와 타인을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다르다는 것이 틀린 것이 아니라는 인지는 나에 대해 충분히 직면한 후에야 가능하다.

아이를 통해 나를 직면해가는 것은 무거운 나의 짐을 덜어주고 세상에 대한 나의 분노를 잠재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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