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유럽에서 서유럽까지, 태국에서 라오스까지 100대 이상의 차를 얻어 탔지만 그중 정말 위험했던 순간은 단 한 번뿐이었다. 정말 좋았던 순간들은 셀 수 없다. 그래서 위험할 확률은 100분의 1밖에 되지 않고, 행복할 확률은 100퍼센트다.
폴란드에서 독일로 국경을 넘어가려고 할 때였다. 대만 친구인 H와 함께였는데, 그 전날에도, 그날에도 다른 방향으로 가는 차를 타고 엉뚱한 곳에서 내려 슬슬 초조해지고 있었다. 우리는 왼쪽으로는 독일로 가는, 오른쪽으로는 폴란드로 돌아가는 양갈래 길목에 서서 손을 흔들었다. 다정해 보이는 아줌마, 노부부가 차를 멈춰주었지만 다들 오른쪽으로 간다고 했다. 그렇게 많은 차를 보내고 멈춰 선 다른 차가 또 폴란드로 간다고 했을 때, 그제야 오늘은 글렀구나, 큰 도시에서 독일로 가는 차를 잡아야겠다 싶었다.
우리는 근방의 큰 도시인 ‘포즈난’에 가려고 했고 영어를 잘하지 못하는 그 아저씨는 “포즈난, 오케이, 포즈난, 오케이!”라고 호언장담했다. 차는 평범했다. 차 안에 걸려있는 분홍색 방향제는 귀여웠고 운전자가 입은 티셔츠는 내가 좋아하는 노란색이었다. 운전자의 우락부락한 근육이 조금 마음에 걸렸을 뿐이었다. 타기 전에 H에게 "괜찮은 것 같아?" 물어봤는데도, 마음이 완전히 놓이지가 않았다. 타기 전에 느꼈던 짧은 망설임과 그 근육은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을 때 여성 둘이 이 사람을 제압할 수 있을까 하는 상상을 하게 만들었다.
아저씨와 보조석에 앉아있던 나는 짧은 영어로 세큐리티, 세이프 따위의 단어를 주고받으며 보안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이구나 유추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운전자가 방향을 틀어 고속도로를 벗어났다. 포즈난에 가려면 아직 한참 더 가야 하는데 우리가 차를 얻어 탔던 시골 변방보다 더 변방인 곳으로 벗어나고 있었다. 내가 “포즈난? 포즈난?” 묻자 “포즈난, 포즈난, 오케이” 다시 호언장담했다. 그 확신에 찬 대답을 들으며 핸드폰으로 지도를 살펴봤다. 어디 지름길이라도 있나 지도를 확대해 쪽길을 찾아보려고 했지만 포즈난과 우리가 있는 곳은 강으로 막혀있었다. 차는 이미 톨게이트를 나가 인적조차 없을 것 같은 숲으로 들어갔다.
이건 누가 봐도 포즈난으로 가는 길이 아닌데, 여기서 내려야 하나,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수만 가지 생각이 오가는 와중에 차는 숲을 빠져나왔다. ‘다행이다, 살았다’하는 생각을 하는 와중에 다른 숲으로 들어갔다. 아저씨는 길을 잃은 듯 짜증을 내며 폴더폰을 꺼내 들었다. 전화 끝에 도착한 숲 한복판은 그렇게 당황스럽고 걱정스럽고 두려운 상황에서도 참 아름다웠다. 넓은 갈대숲이 잔잔한 호수를 따라 가득 흔들리고 있었다. 아저씨는 보조석에 있는 사물함에서 얼마인지 셀 수조차 없는 현금다발을 한 아름 꺼내 조금 떨어진 나무 아래에 묻었다. 평생 범죄현장을 볼 거라곤 상상도 못 했는데, 휘말려버렸다.
돈을 묻고 돌아온 운전자는 잠깐 기다리는 듯하다 지루한 듯 세컨드폰이 아닌 퍼스트폰인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그러곤 다른 한 손을 바지 앞섶에 넣었다. 뭔 일이 생기면 어떡하나, H에게 미안해서 어떡하나, 엄마, 아빠가 많이 슬퍼할 텐데 미안해서 어떡하나, 그 짧은 순간에 오만가지 생각을 하며 주머니 속에 넣어둔 과도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나 이렇게, 저렇게 시뮬레이션해보며 '망설이지 말자, 망설이지 말자' 하고 다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운전자는 아주 젠틀하게도 야한 사진(감사하게도 소리가 나는 동영상은 아니었다)을 보여주며 “You want? 너 원해?”라고 물어봤다. 질문이 짧고 간결했던 만큼 나도 “노”라고만 대답했다. 뒷좌석에 있는 H에게도 물어봤고 같은 대답을 들은 운전자는 왜 이걸 원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침묵 속에서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여길 어떻게 나가야 하나 지도를 뒤져보았다. 다행히 5km 거리에 휴게소가 있었다. 그 정도는 걸을 수 있다. 나는 호수를 가리키며 “너무 아름다워요. 우린 좀 걷고 싶어요. Very beautiful. we want to walk.”와 같은 맥락에 맞지 않는 말을 지껄였고, 다행히 의미를 이해한 운전자는 우리를 순순히 보내주었다. 차를 탈 때 운전자는 걸리적거리는 우리의 커다란 가방들을 트렁크에 넣어주었는데, 친절하게도 가방도 손수 꺼내 주었다. 아름다운 숲길을 걸어 나가면서 H는 잘했다고, 고생했다고 다독여주었고, 나는 이 모든 상황을 해결한 사람답지 않게 찡찡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