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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이 Sep 03. 2022

우리는 모두 시시포스의 후손들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저 날이 밝으면 침대에서 일어나서 아침 먹고 지하철 타고 직장 가서 일하고, 해가 지면 귀가해서 저녁 먹고 다시 잠자리에 들고, 즉 먹고 일하고 자고……프랑스인들은 이러한 일상의 반복을 비꼬아 메트로(지하철)-불로(일)-도도(잠)라고 표현한다. 이렇듯 우리의 삶은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되풀이해서 돌아가는 하나의 거대한 수레바퀴와도 같다고나 할까. 아무도 그 수레바퀴의 틀 속에서 빠져나올 수 없으며 그것을 멈추게 할 수도 없다. 생명이 붙어있는 한, 우리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어쩔 수 없이 그 수레바퀴 안에서 함께 돌아가도록 운명 지워진 것이다. 마치 시시포스가 언제나처럼 되굴러 떨어지는 커다란 바위 덩어리를 되풀이해서 산꼭대기로 밀어 올리도록 선고받은 것처럼.

신들은 아무 소용도 희망도 없는 일을 하는 것보다 더 가혹한 벌은 없다고 생각하여 시시포스에게 이 벌을 내렸다. 일그러진 얼굴과 후들거리는 팔다리로 안간힘을 쓰며 무거운 돌덩어리를 겨우겨우 산 꼭대기까지 굴러 올리면 그것은 다시 산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만다. 그때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 시시포스의 심정을 상상해보라. 얼마나 비극적인 고통인가를. 그러나 이것이 비극적이고 고통스럽다는 것은 바로 시시포스 그 자신이 이를 의식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굴러 올리고 올려도 또다시 굴러 떨어질게 뻔한 아무 소용도 희망도 없는 작업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그의 선견지명 때문에 그는 괴로운 것이다. 

산을 내려오면서 시시포스는 너무도 고통스럽다. 더욱이 그의 세상살이 추억들과 행복에 대한 욕구가 솟아오를 때는 더욱 슬퍼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 고통과 슬픔이 언제까지나 자신을 지배하고 잠식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어느 한순간 그는 상황을 뒤집어 자신의 고통을 조용히 응시하면서 오히려 기쁨을 맛본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칼 한 역설의 마법인가! 그는 갑자기 신을 경멸하여 몰아내고 자신이 모든 것의 주인이라고 판단한다. 운명도 자기 것이요 바위덩이도 자기 것이요, 자신을 지배하는 어떤 우월한 존재도 없다고 판단한다. 신을 거부함으로써 더 이상 신의 명령에 의해서가 아닌 자신의 의지에 따라 정상을 향해 도전하는 시시포스는 이제 행복한 것이다라고 프랑스 작가 까뮈는 말한다.

우리의 삶은 곧 시시포스의 삶이다. 아침에 말끔히 청소해 놓은 거리가 그다음 날 아침에 가보면 다시 어질러져 있어 또다시 청소를 해야 하는 청소부 아저씨의 삶이나 끊임없이 굴러 떨어지는 바위를 되풀이해 굴러 올려야만 하는 시시포스의 삶은 한치도 다를 바가 없다. 오늘 아무리 어렵고 힘든 문제를 해결했다 하더라도 곧이어 또다시 새로운 문제에 봉착하고야 마는 우리 인간의 삶은 부조리하기 짝이 없다. 이 사실을 의식한다면 처음 시시포스가 그랬듯이 우리의 삶은 결국 비극적이다. 

어쩌면 이 세상은 어떤 희망이나 진리의 출구도 없이 영원히 제자리걸음으로 돌아가도록 운명 지워져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우리가 찾고자 하는 진리는 영원히 우리의 손에 잡히지 않고, 우리가 마침내 오르고자 하는 정상에 도달했을 때 또 하나의 새로운 정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음을 본다. 우리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우리는 이 부조리한 인간 세계를 벗어날 수 없다. 거기에 우리 인간의 비극과 고통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까뮈의 시시포스가 해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이 비극과 고통을 행복으로 바꿀 수만 있다면? 주어진 운명에 복종하지 않고 스스로 주인이 되어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 나갈 수 있다면? 우리에게 늘 따라다니는 비극과 고통까지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영원히 이르지 못할 진리의 출구에 도달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것을 향해 투쟁하고 도전하는 과정 그 자체에 의미를 둘 수 있다면?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굳이 불가능한 신의 세계를 넘보며 비통해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반면, 인간 세계의 부조리함을 받아들이는 선견지명과 함께 우리는 고통과 희망, 슬픔과 기쁨이 교차는 우리 나름의 세계, 즉 너무도 인간적인 세계, 인간적인 삶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이 진리의 깊은 묘미를 알지 못한 채 내 젊은 시절을 살았다. 그러나 깊은 묘미까지는 아니더라도 이 진리의 어렴풋한 싹이 일찍부터 내 안에서 자라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랬기에 나는 지금까지 내 운명에 복종하는 삶이 아닌 내가 주인인 삶을 살아왔지 않았을까. 만약 내가 좀 더 일찍 이 진리의 깊은 묘미를 알았더라면, 순간순간 내가 앓았던 많은 고통과 좌절과 절망은 좀 더 가볍게 지나가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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