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기를 더듬는 방식으로
문 앞에 섰을 때, 나는 이미 도착해 있었다. 검은 정장의 소매 끝엔 먼지가 말없이 내려앉았고, 팔을 털어내기도 전에 기억이 먼저, 허공에 피어올랐다. 바람도, 소리도 없었는데, 그 순간만큼은 모든 게 움직였다. 아무도 보지 못한 방식으로.
문은 열렸다. 열리기 위해 오래 닫혀 있던 것처럼. 자물쇠는 녹슬지 않았고, 유리문 손잡이엔 손때가 어지럽게 남아 있었다. 먼지보다 빠르게 코를 찌른 건 냄새였다. 책의 냄새. 종이 안에 오래 머문 말들의 잔향. 그 냄새는 이름이 없었고, 나는 그것을 안다고 믿었다. 아니, 그 냄새 속에서 나는 자랐고, 지금도 어쩌면 그 안에서 숨 쉬고 있는지도 몰랐다.
책장은 약간 비틀려 서 있었다. 왼쪽 다리가 내려앉은 듯 기울었고, 그래서인지 전체가 앞쪽으로 조용히 숙여 있었다. 마치 무릎을 꿇고 졸고 있는 사람처럼. 오래도록 무게를 견뎌온 목재가, 그제야 피곤하다고 말하는 모양이었다.
그 곁에 앉았다. 어릴 적엔 책장이 거대했는데, 지금은 내가 더 커져 있었다. 그런데도 작아진 건 책장이 아니라, 나였다. 나는 나를 작게 접었다. 책장이 받아줄 수 있도록.
책장 옆면에 손을 얹었다. 거칠게 일어난 나뭇결 사이로, 손끝이 옛 자국들을 따라 미끄러졌다. 숫자 하나하나가 움푹 패인 골짜기처럼 손끝에 걸렸고, 나는 마치 점자를 읽듯, 그 여름들을 더듬었다. ‘7살’, ‘9살’, ‘10살 반’ 그중 어떤 건 내가, 어떤 건 할아버지가 새긴 자국이었다. 여전히 따뜻한 것처럼 느껴지는 홈들이었다.
책을 펼치자, 공기 속에 오래 묵은 냄새가 스며들었다. 잉크와 먼지, 눅눅한 종이, 말없이 머문 시간. 그것들은 바람 없이 흐르고, 빛 없이 눌려 있었다. 말은 없었지만, 종이는 여전히 무언가를 숨기고 있었다. 마치 입을 다문 채, 무언가를 계속 속삭이는 사람처럼.
파란 표지. 떨어진 책등. 8월 17일. 왼쪽 위, 익숙한 필체 하나. “다음엔, 더 큰 책을 읽자.” 그 문장은 그 자리에 있었다. 오래도록 머무르며, 아무 말 없이 나를 기다렸다. 나는 끝내지 못했고, 하지만 어쩌면 그건 처음부터 나를 끝까지 기다릴 마음이었는지도 몰랐다.
먼지는 온기였다. 누군가 앉았다 간 자리에 눌려 남은 공기. 나는 그것을 할아버지의 숨처럼 느꼈다. 사라진 존재가 아니라, 아직 머무는 기척. 책의 순서, 자주 펼쳐진 페이지, 닳은 표지, 제목이 지워진 책들 사이를 나는 알아보았다. 어떤 것들은 제목이 없어도 나를 안다는 듯, 익숙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책장을 더듬었다. 손끝이 기억을 읽듯, 그 작은 홈을 천천히 더듬었다. ‘11살’이라는 글씨가 지나가고, 그 아래엔 아직 쓰이지 않은 자리가 남아 있었다. 날짜도, 서명도 없는 칸. 나는 거기에 조심스레, 손톱으로 작은 선 하나를 그었다. 그건 오늘이었다. 다시 시작해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조용한 허락 같았다.
책의 끝장을 덮고, 나는 천천히 일어섰다. 의자는 낮게 삐걱였고, 책은 조용히 내 손을 떠났다. 그것은 이별이라기보다, 내가 잠시 앉았던 자리를 다음 누군가에게 비워두는 일이었다. 손끝에 잔여 감촉이 남은 채, 나는 한 걸음 물러났다.
책방은 작아졌다. 아니, 내가 커진 걸까. 책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지만, 그들 사이를 채우던 숨결은 조금 엷어져 있었다. 나는 그것을 낡음이라 부르지 않았다. 그건 기다림의 밀도였다.
언젠가, 아주 오래된 책을 꺼내 들며 누군가는 말하겠지. “이건, 누가 마지막으로 읽은 걸까.”
나는 책장 어딘가에 한 문장으로 남았다. 아직 아무도 펼치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다시 열릴 페이지처럼. 그것이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