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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재

슬픔을 안고 살아가는 법

by 프로성장러 김양

49일간 맘껏 울고 맘껏 웃었다.



아빠의 49재.

아직도 아빠의 부재가 실감 나지 않는다. 어느덧 49일이 지났다는데 그 사실도 믿을 수가 없다.


엄마가 아는 분께 49재, 마지막 제사를 부탁했다고 했다. 나는 아빠의 모든 장례 절차에서 엄마가 망설일 때 빠르게 끼어들어 결정을 내렸지만 거의 대부분은 엄마의 선택을 따르고 존중했다. 아빠의 마지막 길은 엄마의 마음이 편한 방법을 따르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49재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특별한 종교도 없는 우리에게 제사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냥 아빠를 모신 곳에 가서 인사만 드리고 오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엄마는 매주 제사를 지내고, 7번째 주에 지내는 49재까지 지내야 아빠를 잘 보내드리는 거라고 믿었다. 나는 별 불만 없이 엄마의 의견을 따랐다. 매주 가지는 않았지만 마지막 49재 제사는 연차를 내고 나도 함께 갔다. 남편도 같이.

오래간만에 아빠의 영정 사진을 쳐다보니 또다시 가슴이 먹먹해졌다.


"저 사진 제가 가져가면 안돼요?"


모든 제사가 마무리되고, 내가 물었다. 영정 사진은 원래 태워서 보내주는 거라 했다. 집에 두는 게 아니라고.


"아빠 사진 간직하고 싶으면 한 장 더 뽑으면 되잖아"


엄마가 위로하듯 말한다.

나는 아빠의 영정 사진을 온전하게 보관하고 싶었다.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보면서 잘 가라고 인사해 준 의미가 담긴 저 사진을 말이다. 하지만 끝까지 고집을 내세우진 않았다. 나는 우리 집에 보관한 아빠의 영정 사진을 보면서 위로도 받고 때론 슬플 테지만 다른 가족들은 그 사진을 볼 때마다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있으니까.


가족들과 함께 모여 앉아 제사 음식으로 맛있게 점심을 먹었다. 음식이 정말 맛있었다. 삼촌과 이모들도 함께해서인지 문득 어린 시절 할머니 댁에 모여 다 같이 식사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벌써 30년도 더 지난 일이다. 나는 정말 어렸다. 엄마를 포함한 8남매 가족의 아들, 딸들이 한 데 모여 비좁은 방에 누워서도 무엇이 좋았는지 깔깔깔 웃으며 함께 잠들던 시절이었다. 나는 잠자리를 가리는 편이었는데도 할머니의 시골집은 정말 편하고 좋았고 잠도 잘 잤다.


나는 아버지가 떠난 이후 시간의 무색함과 허무함에 대해 정말 많이 생각한다. 내가 태어난 지 4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고, 아빠와 함께한 세월도 그만큼이지만 이제와 생각해 보면 정말 짧은 시간이었다. 아빠는 나보다 30년 이상 더 살았지만 그 시간 역시 정말 짧게 느껴진다고 했다. 이제 70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엄마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시간이 정말 빠르게 흘러간다고. 엊그제 10대였던 것 같은데 벌써 이 나이가 되었다고. 엄마 딸인 내가 벌써 마흔을 넘겼다는 사실도 믿기지가 않는다고.


시간은 유한하고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 수 있는 시간은 정말 짧다는 사실이 실감 난다. 내 삶에 약간의 에너지를 채워주는 일은 여전히 "새벽 조깅"이지만, 내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해주는 것은 단연코 소중한 가족과 친구들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동시에 책을 더 많이 읽고, 글을 더 자주 쓰면서 내 생각과 마음을 잘 다스려야겠다는 생각도 한다.


아빠가 돌아가신 이후 죽음과 관련된 책을 정말 많이 읽었지만 <놓아 버림>과 같은 심리책을 읽으면서도 위로를 받았다.

읽었던 책을 계속해서 읽고 또 읽는다.

힘들고 부정적인 감정도 다 그러려니 하고 느낀다. 감정이 제 갈 길을 가도록.


아빠의 부재가 슬프다고 해서 하루 24시간이 내내 고통스러운건 아니다. 나는 일상을 살면서 기쁜 일이 있으면 웃고, 특히 아이의 기쁨에 더 크게 반응하고, 즐거워하기로 했다. 지금 내가 누리는 행복이 당연한게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며 더 많이 감사한 마음을 가지려고 한다.

내가 살고 있는 지금이 아빠에게는 없는 오늘이니까. 아빠에게는 더이상 허락되지 않은 시간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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