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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로성장러 김양 Jul 08. 2024

돌아갈 거야, 다시

나는 돌아갈 곳이 있어



마지막 학기가 되니 대부분의 친구들이 취업 준비를 마쳤더라고요. 같은 과에서는 이미 갈 곳이 정해진 친구들도 많았어요.


‘아니, 논문도 안 썼는데 벌써 직장이 정해졌다고?’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에서는 입사지원서를 내기에 너무 늦었다는 사실을 알았거든요. 보통 대학원생은 1학년을 마치고 여름방학 때 인턴을 하면서 졸업 후 갈 곳을 정하는 것 같더라고요.

저는 외국인이라 비자 지원까지 받으려면 더 시간이 걸릴 텐데 현지 사정을 너무나도 모른 채 뒷짐만 지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월에서 3월까지는 정신없이 일하고 논문과 수업에 집중하느라 지원서를 낼만한 곳도 열심히 알아보지 못했어요. 우리나라처럼 채용 정보가 올라오는 사람인, 인크루트 같은 플랫폼도 전혀 알지 못했으니까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4월부터는 본격적으로 지원서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대부분 지원자격에 “US Citizenship”이라는 제약조건이 붙어있는데도 가리지 않고 무작정 지원서를 보냈어요.


하지만 결국, 저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기로 마음을 정했습니다.

다음의 두 가지 사건으로 인해서요.



여기에서의 내 삶 자체가 오타일 수 있으니까



어느 한 군데에서도 면접 제의를 받지 못해 낙담하고 있던 어느 날, 미국인 친구가 이런 말을 하더군요.


“회사에서는 네 이력서에 적힌 이름만 봐도 네가 미국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거야”

“그게 무슨 뜻이야?”

“………….”

“대부분의 회사에서 내 이름만 보고 이력서를 더 읽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야?”

“…………….”


그날 이후 워드에 제 이름을 쓰면 바로 빨간 줄이 생긴다는 사실이 머릿속에 선명하게 각인되더군요. 영어로는 제 이름조차 오타인 것처럼 느껴졌어요.


“그러네, 어떻게 보면 여기에서는 내 삶 자체가 오타였을 수도 있겠네”

“아니, 난 그런 뜻으로 이야기한 게 아니라….”

“이제야 현실이 제대로 보이는 것 같아. 알려줘서 고마워”



나는 이곳에서 영원히 이방인일 테니까


논문 제출을 마치고, 지도교수님과 대화를 나누던 중이었어요. 과에서는 더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 졸업 예정자를 대상으로 간담회를 진행하는데 거기에 제가 참여하면 좋겠다고 하시더군요. 평상시에 존경하는 교수님이었기에 당연히 그렇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참석한 결과는 생각보다 충격적이었어요.

“우리 과는 외국인 학생을 배려하는 것 같지 않아요. 외국인 학생이 의무적으로 치러야 하는 영어 테스트 날짜와 과 오리엔테이션 날짜가 겹쳐서 거기에 참여할 수 없었거든요. 첫 만남부터 배제당하는 기분이 들었어요. 이 부분이 시정되면 좋겠어요.”

“You are a guest who doesn’t belong to this community”

거기 앉아있던, 저는 처음 보는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어요.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내가 이 말을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싶을 정도였어요.

“Sorry?

“You are just a guest like other international students”

이건 명백한 인종차별이다.


순간 분노의 감정이 올라와 폭발할 것 같았어요.


“네가 대체 무슨 자격으로 그런 얘기를 하는 거지? 내가 이 학교에 낸 돈이 얼만데, 내가 여기 일원으로 속하기 위해 노력한 시간과 에너지가 얼만데! 네가 뭔데! 너 따위가 대체 뭔데! 내 노력과 돈과 에너지를 이렇게까지 하찮게 만드는 건데!”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끝까지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 분노의 화살이 제게 더 큰 상처로 돌아올 것 같았거든요.





친구와의 대화, 과에서 있었던 간담회까지 마치고 나니 더 이상 이곳에 머무르고 싶지 않았어요.

미국에서의 모든 입사 지원을 멈추고,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래도 돌아갈 내 나라 한국이 있어 정말 다행이다 싶은 마음도 들었어요.


더 이상 미련을 갖고 싶지 않아 바로 한국행 비행기표를 예약했습니다. 여름옷과 당장 필요한 물건들만 빼고 짐도 다 싸서 미리 택배로 보냈어요. 인터넷 종료일도 미리 신청하고, 차량도 Craigslist에 올려 2300불에 팔았어요. 3000불에 사서 2년간 수리비만 3000불 정도 들었지만, 그래도 2300불이면 괜찮은 가격에 잘 팔았다고 생각했습니다. 1시간이 넘게 운전해서 학교까지 제 차를 사러 온 사람은 한국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는 할머니였어요. 아들이 한국에서 영어를 가르치며 살았던 적이 있다고, 그래서 한국을 정말 좋아한다고 하시더라고요. 아들에게 들은 한국에 대한 좋은 이야기가 많다고요.

2600불에 내놓은 차였지만 당연히 미국이니까 가격 흥정을 해서 2300불에 드렸습니다.


“한국에 잘 돌아가요. 이곳에서 보낸 시간이 좋은 기억이었기를…”


다정한 할머니는 저를 꼭 안고 이렇게 이야기하시더니, 현금으로 2300불을 건네주시고, 자동차 번호판을 바꿔 떠나셨어요.


차를 팔고 나니 제 손에 덩그러니 자동차 번호판 한 개가 남았습니다.



번호판을 들고 캠퍼스 주차장 한가운데 서 있자니 문득 미국에서 처음으로 차를 사고 번호판을 달았던 때가 생각나더군요.


“왜 여기는 차 앞에 번호판이 없지?”

“원래 차에 달려있던 번호판을 내가 그대로 쓰면 안 되나?”


하고 의문을 가졌던 지난날들이 스쳐 지나갔어요.


미국은 차 앞에 번호판이 없는 주가 있습니다. Chat GPT가 그 이유를 아래와 같이 알려주네요.



법적 요구 사항: 노스캐롤라이나는 차량의 후면에만 번호판을 부착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비용 절감: 두 개의 번호판을 발급하고 관리하는 비용이 더 높기 때문에, 후면 번호판만을 요구함으로써 비용을 절감할 수 있습니다.

차량 디자인: 일부 차량 제조업체는 앞면에 번호판을 부착하지 않는 디자인을 선호합니다.

역사적 이유: 미국은 전통적으로 대부분의 주에서 차량의 후면에만 번호판을 부착했습니다. 이러 관행이 계속 유지되고 있습니다.



자동차 번호판을 기준으로 자동차세를 부과하는 미국은 차를 거래할 때 기존 번호판을 반납하도록 규정하고 있어요. 그래서 저 역시 차를 살 때 번호판을 발급받았고, 이제 제 차를 팔게 되었으니 번호판 반납을 해야 했지요.


어느 정도 귀국 준비를 마치고 나니 몇 개의 기말과제와 시험만 남아있고, 제 방은 거의 텅 빈 수준이 되었습니다. 캐리어 하나와 배낭 하나면 이곳을 가볍게 떠날 수 있겠더군요.


어떤 날은 기쁘고 설레었다가, 또 다른 날에는 두렵고 무서웠어요. 한국에 돌아가 맛있는 음식을 먹고 내가 익숙했던 곳에서 마음 편하게 한국말만 쓰며 살 수 있다는 생각에 기뻤지만 당장 어떻게 먹고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에 두렵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절대 들지 않을 것 같은 생각도 간혹 떠올랐습니다.

"여기 그리워지면 어쩌지?" 하는 아쉬움 말이죠.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흘러간 마지막 학기였는데 한국행 비행기에 오를 시간만 기다리면 마치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막막하기도 했어요.


"Don't let the past steal your present."


정신을 차려보니 다이어리에 이런 구절이 쓰여 있더라고요. 미래도 아닌 과거도 아닌

현재에 집중할 시기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되새기며 현실에 집중하고자 노력했습니다.

간절히 기다리는 것들은 늘 늦게 오는 것 같지만 어쨌든 시간은 역주행 없이 흐르니까요.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하니 같은 과에서 친하게 지냈던 친구가 이런 농담도 하더라고요?


"쑤, 불독과 시추가 결혼하면 어떤 자식이 나오게?"

“설마, bullshit??”

“하하하하하 맞아. 너 미국에서의 삶이 그런 느낌이었지?”

“………………….”


너무 어이가 없어 할 말을 잃었지만 정말 웃기긴 했습니다. 친구들이랑 이렇게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고 떠들 수 있다는 사실이 즐겁기도 했어요. 누군가는 나를 그저 이방인 취급하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친구이기도 했으니까요.


“그 정도는 아니었고, 시간이 지나면 이곳이 많이 생각날 것 같아. 어쩌면 많이 그리울 수도 있고”

“우리 꼭 연락하고 지내자”

“그래, 꼭… 그럴게. 내 인생에서 힘든 순간이 올 때마다 더 힘들었던 여기를 기억할게. 그 힘든 시간에 함께해 줬던 너희들도 기억할 거야”


5월 1일에 마지막 시험이 있었습니다. 마지막 시험 일정을 확인한 뒤에 5월 2일에는 채플힐을 떠나는 비행기표를 예약했고요. 그래서 남은 4월은 많이 즐기고 많이 놀기로 했습니다. 어떤 약속이나 만남도 거절하지 않고 모두 응하겠다고요.


돌아보니 미국에 있는 내내 늘 두 가지 마음이 함께였던 것 같습니다. 미국에서 직장을 구했으면 하는 마음과 빨리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말이죠. 한국과 미국이 가지고 있는 장단점이 너무나 명확해서 마음속에서 무엇이 우선하는지 알기가 힘들었거든요.

한국은 내가 태어나고 성장한 곳이니 그곳에 정착하면 편안한 마음으로 살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미국에서 살면 타인과 비교하지 않고, 나 자신을 사회의 기준에도 맞추지 않는, 오로지 나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았고요.


그래서 그저 직장이 구해지는 곳에 머물러야지 생각했습니다. 결국 미국에서 일을 구하는 데 실패했고, 더 머무르고 싶지 않은 일도 있었기에 차선책으로 한국행을 결정하게 됐지만요.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돌아갈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요?


한국에 돌아가면 무엇이든 할 일이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새로운 변화에 대한 기대도 있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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