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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연 Jul 04. 2024

수신인 : 없음

[편지 2] 받는 이 없는 설익은 마음




 이는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부치는 고백이겠습니다.

 ‘우리’라는 말로 묶을 수 있을까, 그조차도 표면적으로 확실하지 않았기에 많이 망설였습니다. 당신과 나는 말 그대로 당신과 나였고, 서로의 선을 끝끝내 넘지 않았었지요. 사실은 지금도 긴 시간 동안 혼자서 꾼 꿈처럼 당신의 호의를 착각한 것일 뿐인지, 아니면 그 속에 기실 말하지 않은 어떤 감정이 오간 것인지조차 분간이 가지 않습니다.  지금 와서는, 어쩌면 당신이 아주 고약한 사람이라 나에게만 그런 것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더군요. 그 안에서 분명했던 건 나의 마음 하나뿐인지도요. 물론 이것이 남은 감정의 잔재로부터 말미암았다는 것은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대답 없는 마음일지언정 나는 그럼에도 사랑을 하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언젠가 내가 당신에 대한 연심을 접으려 큰 마음을 먹고, 무엇 때문인지 몰라도 당신이 크게 상처받고 술독에 취했던 날에도 얼마 가지 않아 마음은 당신을 향해 되돌아갔었지요. 그건 어떤 희망이라 하기 이전에 시작도 해보지 못한 사랑이 가여워서이기도 했고, 포기하고 돌아서는 것이 당신 주위를 맴도는 것보다 더 괴로울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그것이 혼자 하는 짝사랑이었건, 말없이 서로를 흘겨보던 풋사랑이었건 상관없이 그 시간 동안 나는 행복했고 슬펐고 살아감에 즐거웠습니다.

 그랬기에 더없이 실망했고, 당신에 대한 꽤 괜찮았던 기억들마저 오염되는 것이 못내 씁쓸했습니다. 사랑을 깊이 예찬해마지 않던 당신은 새롭게 손에 그러모은 사랑을 두고 세상 앞에 비겁했고, 그로 인해 내 안의 당신은 얄팍해졌습니다. 예고도 없이 찌그러지고 흙발로 밟힌 나의 것은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당신은 세상 앞에 당신의 사랑을 당당히 내밀었어야 했습니다. 차라리 그랬다면 이렇게까지 비통하진 않았을 것을, 잃을 것이 많아 그랬을까요. 사랑을 가장 우선으로 뒀다는 당신은 정작 사랑 때문에 손에서 빠져나갈 많은 것들이 안타까웠을까요.

 무엇이 어찌 되었든 나는 여태 상처 입고 아파하고 있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나아지고 있지만, 그 상처는 다시 벌어지기도 하고 덧나기도 합니다. 시작도 해보지 못한 내 마음이 가여웠고, 같은 마음조차 아니었다는 사실에 부끄러웠습니다. 어떤 날에는 들끓는 분노와 슬픔을 들이키며, 당신이 좋아한다는 모든 것을 저주했습니다. 겨울과 눈과 풀꽃과 달과 밤과 파도와 활자를 저주하고, 그중 가장 기만적인 당신을 저주했습니다. 산산이 부서져 언어조차 되지 못하는 소리로 당신이 가장 간절히 바라는 것을 영원히 얻지 못하기를 빌었습니다. 동시에 썩은 내가 나는 나의 기도에 무너졌습니다. 그 짧고 번쩍대는 낮과 밤들을 내가 어떻게 버티며 지나왔는지 당신은 영영 모르겠지만요.

 밤을 사랑한다는 당신의 세상에 홀려, 나는 그 어둠에 두 눈이 가려져 한참 길을 헤맨 듯합니다. 그 끝에 이제, 어스름이 피어나는 가장 어두운 새벽을 지나려 합니다. 시린 새벽공기가 몽롱한 정신을 일깨우듯, 당신을 향한 마음을 억지로나마 놓고 나서야 나는 취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맑고 차가운 정신으로 세상을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당신의 세상은 환락과 같았던 걸지도 모르겠네요. 나를 그 세상으로 피리소리처럼 이끌었던 당신의 언어는 이제 나에게 힘을 잃었습니다. 그러니 더는 그곳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지 않을 것 같습니다.

 손이 고운 사람은 손이 고운 사람과 만나야 하겠지요. 근처에도 가본 적 없지만, 어째 나의 손은 당신의 것 옆에 두기에는 거칠고 투박해 보입니다. 이게 저 혼자만 붙잡은 연의 끝일 지요. 아니면 끝은 쉬이 오지 않으니, 다만 그 연장선 위를 내달리는 것일지요. 아마도 나는 그저 나의 길 위를, 당신은 그저 당신의 길 위를 계속해서 나아갈 뿐일 겁니다. 그리하여 당신이 고르고 고른 선택이 어디로 이어질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아마 그 길을 보지 못할 듯싶습니다.


 갈림길입니다. 떠나기 전에 묻기를, 이젠 행복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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