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머리라는 말이 있다. 어떤 일이든 빨리 손에 익히고 요령을 체득해서 빠르게 일을 해치울 수 있도록 머리를 쓰는 것을 일머리라고 한다. 외과 의사가 열심히 실로 꿰매는 연습을 하고, 이삿짐을 나를 때 무거운 짐을 짊어질 요령을 깨우치는 게 일머리다. 때문에 어떤 분야의 일을 하든 일머리는 정말 필요하다. 하지만 나는 그동안 시나리오를 써오면서 이런 일머리를 도무지 익히지 못한 것도 같다.
시나리오 작업을 할 때는 보통 처음에는 피디와 이야기를 하며 작업한다. 여러 번의 수정을 통해 피디가 작품이 맘에 들면 제작사 대표가 보게 된다. 그런데 종종 대표가 추구하는 방향이 피디와 달라 고민을 해야 할 때가 있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이를 해결했다고 문제가 끝나지 않는데 있다. 시나리오가 맘에 들어야 하는 사람은 이 두 사람뿐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나리오를 보는 피디든 대표든, 배우든 감독이든, 혹은 투자사든 모두가 결국은 개인들이라서 각자 좋아하는 방향이 다 다를 수 있다. 그러니 일이 진행되어 갈수록 고민은 더 복잡해지기 일쑤다. 사공이 많으면 배는 산으로 간다.
혹, 그중 누군가 기세도 등등하고, 다른 사람 설득도 잘해서 일이 수월해지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사실 시나리오 하나를 놓고 가타부타 말들이 많은 이유는 이 일의 참여자들이 모두 다 기세 등등하고 설득도 잘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작가들의 고집도 빼 놓을 수 없는 원인 중의 하나다. 그래서 시나리오는 번번이 오리무중에 빠진다. 누군가 이태리 음식점에서 숭늉을 찾으니 요리사는 신발을 튀겨 숭늉이라고 내 놓는 식이랄까. 만일 이 판에서 제일 센 사람이 배우라면 그가 고쳐 달라는 데로 고치는 게 제일 빠르고, 그게 감독이면 감독이 원하는 데로 고칠 때 완고가 될 가능성도 높아진다. 하지만 그런 것도 없는 시나리오라면, 지랄 맞은 돌풍처럼 이리저리 사람들 말에 휩쓸리다 용오름으로 날아올라 영영 세상에서 사라지곤 한다. 나는 인생에 용오름을 참 많이도 맞았던 것 같다.
하지만 어쩌면 내 의도를 시나리오에 보다 명확하고 쉽게 전달하는 일머리가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최근에도 내 대본은 용오름을 타고 사라졌다. 내가 최초의 1인도 만족시키지 못하는 대본을 썼으니 남 탓을 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덕분에 튀겨진 내 신발은 쓰레기통에 처박혔고, 난 맨발이라 갈 데가 없다. 계약금 받아서 새 신발을 사기 위해서는 새로운 기획을 해야 한다. 그래서 그틈에 미뤄뒀던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를 챙겨 보고 짬짬이 웹툰이나 웹소설도 읽고 있다.
희한하게 웹툰이나 웹소설은 첫맛은 늘 좋아서 처음 몇 편은 죽 읽는데 이상하게 뒤로 가면 보고 싶은 마음이 슬그머니 사라지고는 한다. 내가 이쪽 매체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 것 같긴 한데 정확한 이유를 잘 모르겠다. 어쩜 나는 이 분야를 무의식적으로 업신여기는지도 모르겠다. 건방지게. 부끄러운 일이다.
웹소설이나 웹툰을 보다 보니 의외로 무협 판타지가 전체 작품의 5할은 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무협을 잘 아는 사람에게 묻기도 하고 무협의 고전이랄 수 있는 책도 사봤다. 하지만 이쪽도 역시 나와는 잘 맞지 않는 듯하다. 어릴 때 대본소에서 무협지를 읽다가 비슷한 이야기가 계속 반복되는 통에 나중엔 앞부분만 조금 읽고 주인공들을 대충 익힌 다음, 페이지를 후루룩 넘겨가며 19금 묘사만 찾아서 읽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곧 그마저도 시들해졌었다.
그렇게 이런저런 새로운 분야들을 읽어 나가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웹소설과 무협지랑 비슷한 방식으로 쓰는 분야가 있는데... 하고. 그러다 번뜩 그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바로 청소년 소설이었다.
물론 웹소설이나 무협지의 주인공은 성인이고 청소년 소설의 주인공은 청소년이라는 차이점은 있지만 이 세 가지 계통의 글쓰기 방식은 무척 닮아 있었다. 이건 그저 내 생각일 뿐이라는 전제를 깔고 이야기를 하자면 이렇다.
청소년 소설의 주인공은 특별하게도 다른 영화나 문예소설의 주인공, 혹은 소설 내의 다른 어떤 등장인물들과 비교해도 압도적으로 주도적인 입장을 보인다. 물론 본격소설이나 영화에서도 -이런 구분에는 분명 어폐가 있겠지만- 그런 경우가 있지만 이 경우는 더욱 심하다. 어떻게 보면 모든 이야기를 주인공의 시점으로만 끌고 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게 되면 독자는 글을 읽기가 무척 편하다. 언제나 주인공의 시선만 따라가며 이야기를 보기 때문에 훨씬 수월하게 읽힌다. 그리고 여기에 지문도 비교적 읽기 편하다. 본격소설에서 보듯 주인공의 번뇌를 묘사하는 복잡한 과정이 여기에는 없다. 감히 아주 간단하게 말한다면 이런 식이다. 내가 누구냐. 나 주인공이야! 한다면 하는 주인공이라고! 하고 즉각적으로 행동에 옮기는 식이랄까. 이런 지문을 읽을 때 독자는 그 사고의 깊이에 감동을 하거나, 작가가 심어놓은 어떤 의도를 읽어내려고 여분의 에너지를 쓰지 않아도 된다. 그러니 쑥쑥 읽힌다.
시나리오에 등장하는 단역을 우리는 흔히 "던져 놓는 인물"이라고 말한다. 시나리오의 주조연들은 늘 고뇌하며 이야기를 끌고 가기도 하고, 브레이크를 걸거나, 장애물이 되거나또는 뜻밖의 변수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과 달리 단역은 딱 한가지 태도를 가지고 행동하도록 세팅한 뒤에 극 속에 던져 넣는다. 단역으로 깡패를 하나 등장시켰다고 생각해 보자, 현실의 깡패라면 그도 양자역학을 공부할 수 있고, 정의란 무엇인지 고민할 수도 있지만, 극속에서는 그저 단순 무식한 깡패 역할만 하도록 묘사한다. 우리는 그걸 역할을 "던져 놓는다"고 말하곤 한다.
그런데 청소년 소설에서는 거의 모든 등장 인물들이 이렇게 던져 놓은 인물들 같다.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주인공 자체도 던져 놓은 인물 같기도 하다. 이렇게 던져진 인물들이 변함없이 주어진 자기 역할을 반복하기 때문에 주인공이 의외의 행동을 한다거나, 이야기에 돌발적인 상황이 생기는 경우가 거의 없다. 스토리의 진행은 작가가 만들어 놓은 설정이 대부분이고, 주인공이 주인공으로서 행동을 해나가는 것일 뿐 등장인물들로 인해 갑자기 예외적 사건이 초래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청소년 소설은 독자 대상이 청소년이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들은 최대한 어렵지 않게 쓰려고 노력을 할 텐데, 내가 보기에 바로 이런 특징이 웹소설이나 무협지와 닮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니까 청소년 소설의 주인공을 성인으로 바꾸고 독자 대상을 성인으로 하는 소설이 웹소설이나 무협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이렇게 쓰는 글의 장점은 분명하다. 명확한 인물군들로 인해 이야기를 받아들이기 쉽고, 빠르게 줄거리를 따라갈 수도 있으며,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가 명확하게 전달되는 장점이 있다. 나는 미래의 글쓰기도 결국 이런 방향으로 가지 않을까 싶다. 이것이 바쁜 세상을 살아가는 독자들의 요구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최근의 본격 소설들도 과거와 달리 지문도 줄고 상대적으로 훨씬 가볍게 바뀌고 있는 건 아닐까?
요즘 나는 청소년 소설을 쓰듯 작품을 쓰는 것이 내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앞으로의 작품은 그렇게 써보려고 한다. 주인공을 포함한 모든 인물들이 번뇌하면서 혼란을 주기보다는 예측 가능하고 관객이 이해하기 쉽게 쓰는 거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니 어쩌면 이것이 내게 필요했던 "일머리"의 실체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