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섣달그믐날, 궁중에서_나례儺禮

묵은 것을 보내고 희망찬 새해를 기원하며

by 검은 산 Dec 19. 2024

시간이 너무 빠르게 흘러간다. 바쁘면 바쁜데로, 한가하면 한가한 데로, 슬프면 슬픈데로, 기쁘면 기쁜데로 그렇게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가버린다. 연초에 계획했던 일들은 기억도 나지 않고 후회일지 허망일지 모를 감정들이, 2024년의 12월이 이제 열흘정도 남은 지금 가슴 한편을 선뜻하게 한다. 시간은 모든 이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것인데도, 아마도 나는 그 재화를 낭비하지 않고 쓴 이들 중에는 줄을 설 수 없을 것 같은 자책도 든다.


그래서, 올해를 잘 마무리하기 위해, 국립국악원의 송년공연 ‘나례’를 보기로 마음먹었다. 국립국악원에서 하는 많은 공연들을 애정하고, 한때는 매주 토요일마다 하는 명품공연에도 빠짐없이 가긴 했지만 바쁜 탓에 한동안 격조했다가, 그동안은 인연이 없었던 이 나례 공연의 광고를 보는 순간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표는 빠르게 매진되어 원하는 자리를 구할 순 없었지만, 무대 바로 아래라는 처음 앉아보는 자리에서 보는 공연은 한층 더 생생하고 역동적으로 느껴졌다. 공연은 80분 정도 진행되었다.  


처음 본 나례 공연은 생각보다 다채롭고, 화려하며, 역동적이 아름다웠다. 정악공연에서 볼 수 있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모습과 군무의 역동성, 정적인 가운데에 신비로움, 그리고 공연을 관통하는 애민의 메시지, 모든 요소들이 어우러져 기승전결의 구성으로 가지고 진행되었다. 1장 고천지告天地는 궁의 사방四方을 지키는 좌청룡, 우백호, 북현무, 남주작을 깨우는 의식으로 시작했다. 사방신으로 분한 무희들이 절도 있는 춤으로 인간의 부름에 응했다. 2장 세역신說疫神에서는 광대들의 공연, 정악, 학과 연꽃에서 등장한 소녀의 춤, 그리고 역신무가 차례로 펼쳐졌다. 나머지 공연들은 본 적이 있었는데, 붉은 색 의상과  붉은 지전을 흔들며 추는 역신들의 군무는 너무 매력적이었고 압도적인 몰입감을 주었다. 그들이 맹위를 떨치면 떨칠수록 역신들을 몰아내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가 더욱 절실해지는 것은 마치 현실세계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모순과도 닮아있었다. 2장은 역신을 달래기 위한 장이었다. 평화로운 역신과의 이별을 원했지만, 역신은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


3장 구나희驅儺戱, 3장이야말로 이 공연의 클라이맥스라고 할 수 있었다. 이 장에서는 달래서는 물러나지 않는 역신들을 방상시무, 처용무, 십이지신무, 진자무를 통해 보다 적극적으로 물리치기 위한 인간이 노력이 춤의 형태로 나타났다. 처용무는 꼭 한번 보고 싶었지만 그동안 기회가 없었는데, 이번에 제대로 보았다. 오방색의 비단옷을 입은 처용이 절도 있으면서도 힘 있는 춤으로 무대를 꽉 채웠다. 결코 달리지 않는, 역신 따위 무섭지도 두렵지도 않다는 듯, 처용은 그들이 물러가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는 듯 춤을 추었다. 그리고 십이지신무……아 이런 역동적인 군무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넓은 무대가 좁은 듯 12명의 무희들이 뛰어다니고, 뛰어오르며 기세를 과시하고 삼엄한 기상을 드러내는 모습은 그동안의 국악공연에서는 보지 못한 것이기에 흥미로웠다. 특히 붉은색의 역신들이 다시 등장하고, 역신들과 공방하며 기와 세가 서로 뒤엉키는 장면은 쉽게 잊히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역신을 물리친 것은 복숭아 나뭇가지를 흔들고 노래를 부르는 어린아이들이었다. 새하얀 의상을 입고, 역신의 얼마나 붉고 검든, 총총, 콩콩 뛰어오르며 춤추는 아이들을 그려낸 진자무는 공방으로 흩트려진 공기를 일순 깨끗하게 정화시키는 듯했다.


역신이 물러갔다. 이제 역신이 물러난 자리에 새로운 희망을 채워야 한다. 4장 기태평祈太平, 결의 장이다. 불꽃 놀이와 대취타가 궁의 하늘과 땅을 채우다. 아니 온 누리를 채운다. 그리고 향아무락이 이어진다. 북춤이 주는 웅장함과 격동됨은 불안하고 우울한 어두운 마음에서 기생하는 것들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신을 일으키게 한다. 북의 울림이 마치 심장소리인 듯 쿵쿵하고 울렸다.


1장에서 등장한 광대들이 관람객들에게 복을 불어넣어 주며 공연은 끝났다. 광대가 말했다. 일 년에 하루, 저잣거리 광대를 불러 나례연에서 공연케 한 것은 왕이 백성들의 삶을 기탄없이 듣기 위함이라고, 나례는 궁중의 의식이지만, 그 액운을 쫓아내고 복을 불러들이는 것은 백성과 함께 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비로소 이 화려하고 아름답고 역동적인 공연이 수미쌍관한 하나의 이야기로 완성되었다.


1000년도 전부터 시작됐다는 나례는 정의와 불의가 항상 공존하는 모순으로 가득 찬 이 세상에서, 그래도 끊임없이 희망을 가지고자 했던 인간의 의지가 만들어낸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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