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온기가 필요해.

-또?! 혼자 가는 제주도

by 일필

밤 10시.



독서모임이 끝났다.

미처 하지 못한 짐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제아무리 낯선 공간이라고 하더라도 기가 막히게 자신만의 방식으로 정리를 해내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나는 아니다.



나는 단 몇 시간 만에 내방처럼 더럽게 만들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

엉망 엉망 열매 능력자다.






독서모임 중에 이런 이야기가 나왔다.



여행지에서의 낯선 공간을 한순간에 자기식대로 멋들어지게 정리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였다.


의견은 '여행지라 할지라도 깔끔하게 정리정돈을 잘해야 한다.''굳이 여행지까지 가서 정리를 해야 해?'로 나뉘었다.





여행지에서도 알. 잘. 딱. 깔. 센 정리정돈! vs 여행까지 가서 정리를 해야 해?






이 글을 읽는 부런치 주민분들의 생각은?





물론 난 후자다.



여행지까지 가서 굳이 정리를 해야 한다고?


아예 너저분하게 두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여행을 갔는데 집에서 하듯 깔끔하게 정리를 해야 한다는 건 조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럴 거면 여행을 왜 가는 거지? 정리 안 하려고 집 두고 여행 가는 거 아닌가.





이곳은 자유가 있는 나라다. 짐들의 이야기도 들어봐야 한다.




정리받고 싶지 않아 할 수도.






나의 방은 조금 매우 많이 더럽다(?).




어느 순간부터 내 방은 나의 손을 떠나버렸다. 누군가에게 내 방 청소를 맡긴다? 글쎄.



"고객님? 아무래도 안 되겠습니다. 방을 치우는 것보다 방을 새로 사시는 게 더 빠를 것 같습니다."



청소 업체도 손절할 것 같다.




그렇다고 내 방이 쓰레기 산이라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나는.




완벽한 나를 만들 때 신이 빼놓은 단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정리정돈 능력'.


이것은 신이 잘못한 거지 내가 잘못한 게 아니다.




결론. 정리정돈 잘하는 사람 부럽다.







짐 정리에 한창인데 갑자기 열이 났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Hoxy 나도 코로나???





물론 그건 아니다.

찬 바닥을 따뜻하게 하겠다고 온도를 최대치로 해놨더니 방이 후끈해진 것이었다.


불반도에 어울리는 K-온돌


낯선 곳의 온도 조절 장치는 우리 집과 다르기 때문에 시행착오를 겪을 수밖에 없다.






나는 방바닥이 차가운 게 싫다.




집에는 온기가 느껴져야 한다.


그런 부분에 있어서 나는 국내 여행이 체질에 맞는 것 같다.


일부러 맞춘 것이 아닌데 여행의 대부분은 10월~11월에 갔다 왔다.


매번 방문한 곳은 달랐지만 단 한 번의 유럽 여행으로 나는 철저한 국내파임을 알 수 있었다. 집시, 소매치기, 인종차별, 돈돈돈... 한 달 동안 고생한 첫 자유여행.





외국엔 '온기'가 없다.

같은 아시아권인 일본도 마찬가지다.



말이 통하고 안 통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어쩐지 외국의 호스텔, 민박 등은 내가 철저한 이방인임을 깨닫게 해주는 곳이다.





무릇, 공간에는 온기가 느껴져야 한다.





이 정원에 숨어든 널 봤어
And I know 너의 온긴 모두 다 진짜란 걸


BTS의 masterpiece '전하지 못한 진심' 중





어쩌면 사람의 온기가 그리운 것일 수도.




어쩌면 그때 조금만 이만큼만 용길 내서 너의 앞에 섰더라면 지금 모든 건 달라졌을까 난 울고 있어.









노래가 너무 좋아 훌쩍훌쩍






이 명곡을 341번밖에 안 들었다니 ㅠㅜㅜ 반성해야겠어. 훌쩍훌쩍.










따뜻하다 못해 후끈한 온기를 빼내고 나서야 겨우 지친 몸을 침대에 눕힐 수 있었다.


책을 읽는 여유로운 여행은 나에게 사치일 뿐.

한 페이지 정도 읽고 접었다.

책은 지하철에서.




찍었던 사진들을 둘러보다 충동적으로 난 지금 어디여? teaser를 만들어 브런치에 올렸다.






원래 울릉도 여행기를 마무리 짓고 제주도 여행기를 연재할 생각이었는데 여유롭게 생각했다간 제주도 여행기도 아예 날릴 것 같아서 일단 지르고 봤다.



아들아, 넌 계획이 다 없구나.




침대에 누워 하루 있었던 일도 대강 기록하고,


정말 대강 기록했다. 그래서 알아볼 수가 없다.



다시 말하자면 이것은 여행기가 아니다. 대하드라마다.








밤 12시.



잠이 오지 않아

침대에 누워 뒹굴거리다가


새치기해서 사 왔던 우무 푸딩을 먹었다. (#12화 여행지에서 새치기를 당한다면?)



커스터드는 낮에 숨을 끊어 놓았지. 이제 당근 푸딩만 남았다.



우무의 푸딩은 특이하게 우뭇가사리로 만들어져 있는데, 제주의 해녀가 직접 채취한 우뭇가사리를 고아 만든 푸딩이라고 하니 신기하기도 하면서 해조류로 만든 푸딩 맛이 어떨지 궁금하기도 했다. 왜냐하면 나는 미역국의 국물을 먹을 때 빼고는 해조류를 섭취할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입이 짧은 자.



특이한 식감에 우무 푸딩 인스타 계정에 들어가 봤다. 인스타 계정의 소개대로 우무 푸딩은 일반 푸딩처럼 젤리 식감이 아닌 순두부 같은 식감에 가까웠다. 그리고 푸딩에서 해조류 향이나 비린 맛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자극적인 맛이 느껴지지 않아서 더 좋았다. 그래서 한 번 더 맛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플라스틱.


-여기, 인기가 많아서 플라스틱이 엄청 버려지겠는걸?



인기 많은 지점답게 플라스틱이 엄청나게 버려질 것이라고 생각해 멈칫했지만 웬걸.



우무 용기는 옥수수 전분을 사용하여 만든 친환경 소재라 온도와 습도가 맞을 때 미생물에 의해 90일이면 자연분해된다고 한다. 금형제작부터 생산까지 직접 진행하여 일반 플라스틱 용기에 비해 비용이 5배나 들지만 그래도 환경을 생각해 용기에 신경 쓰고 있다고.


용기뿐만 아니라 제공하고 있는 스푼과 뚜껑, 포장 끈까지 모두 그렇다고 하니 이러한 부분까지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 섬세하다고 생각했다. 말로만 좋은 제품을 만들기 위해 고민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정말 준비를 많이 한 곳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물건을 파는 곳이 아닌 창작자의 고민 담긴 작품을 팔고 있었다.



현재까지도 양치 컵으로 사용 중


나도 이러한 좋은 뜻에 동참하고자 무조건 버리지 말고 재사용할 수 있음 그렇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좋은 제품, 오랜 기간 동안 고민 끝에 만들어진 제품을 세상 밖으로 보이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을까. 개업 3년 이면 초심을 잃을 때고 현실 타협도 할 때인데 처음과 전혀 달라지지 않은 부분에 그리고 조금이라도 더불어 살려고 고민하는 모습에 감동받았다.



이런 곳은 돈쭐을 내줘야 한다.


그래서 내일 일정에 우무 푸딩도 추가!








이렇게 제주도에서의 첫째 날이 끝나가고 있었다.


새벽 2시 45분.





연재 15회 만에 제주도 여행 1일 차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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