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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보련 Apr 02. 2021

나무와 지랄 총량의 법칙

<첼로를 사랑하는 목수 -나무01>

  지랄, 아주 좋지 않은 말이고 써서도 안 되는 말이다. 하지만 어원에 담긴 의미는 배제한 채 그저 일상적인 용법으로만 쓴다. 사실 김두식이 2010년에 펴 낸 책 <불편해도 괜찮아>)에 나오는 말이기도 하니 이 책의 용법을 따라가는 것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는 사람이 살면서 평생 해야 할 ‘지랄’의 총량이 정해져 있다는 의미로 ‘지랄 총량의 법칙’을 쓴다. 이 법칙을 나무에 대해 쓰는 것이니 문제가 없을 듯도 하다. 진짜 문제는 사람에게는 적용되는 이 법칙이 나무에게는 다른 방식으로 적용된다는 데 있다.


  나무는 빨대 다발이다. 언뜻 보면 이해가 안 되겠지만 나무의 생명활동을 감안하면 이해가 된다. 대부분의 나무는 땅에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쭉쭉 뻗으며 하늘을 향해 잎을 최대한 펼치고 있다. 뿌리로부터 빨아들인 물과 양분을 줄기를 거쳐 잎까지 전달하고, 잎에서 광합성을 해서 생명을 유지해 간다. 이를 위해서는 뿌리부터 잎까지 물관이 연결되어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곧 빨대이다. 그러니 이 빨대들의 다발이 곧 나무이다. 


나무와 빨대 다발


  나무가 살아있을 때 이 빨대 다발은 시시때때로 부피가 달라진다. 물을 머금으면 팽창하고 물이 빠지면 수축한다. 우리 눈으로 관찰하지 못할 뿐 살아있는 나무는 이렇게 빨대 다발이 수축팽창을 달리한다. 그렇다면 죽은 나무는 어떨까? 베어지고, 켜지고, 잘린 나무는 더 이상 생명이 있는 나무는 아니다. 그러나 나무는 죽어도 빨대 다발의 특성은 그대로 남아 있다. 이 다발은 물을 머금을 수도 있고 뱉을 수도 있기 때문에 죽었지만 움직이기는 한다. 습기가 많은 여름에는 팽창하고 건조한 겨울에는 수축한다.


  이러한 이유로 죽은 나무지만 움직이게 되는데 이게 나무를 다루는 사람에게 ‘지랄’이 된다. 통나무를 동그란 떡국처럼 얇게 썰어놓으면 방사형으로 터지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멀쩡하던 판재가 배가 불러지거나 오목하게 바가지처럼 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나무의 수분이 빠지는 과정에서 이러한 변화는 끊임없이 일어난다. 물론 수분이 다 빠져 바싹 마른나무도 마찬가지다. 죽어서도 여전히 빨대 다발인 나무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움직임인데 사람들에게는 ‘지랄’로 보인다.


나무의 변형, 모든 나무는 건조되면서 이렇게 뒤틀리고 휘어지고 쪼개진다.


  나무로 무엇을 만들고자 하면 이 '지랄'이 어느 정도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나무가 수분을 머금은 비율이 10% 이하로 내려가면 어느 정도 안정이 된다. 이때까지 일어난 변형을 반영해 나무를 말끔히 다듬어 가공을 하면 어느 정도 안정적인 구조물을 만들 수 있다. 오래된 나무가 좋다고 하는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다. 최소한의 수분만 머금고 있고, 수분을 먹고 뱉는 과정을 오랫동안 반복했으니 나무의 변형이 상대적으로 적다.


  그래도 여전히 빨대 다발은 수축과 팽창을 반복하니 나무를 다루는 장인들은 어떻게든 이것을 잘 다스려야 한다. 가장 쉬운 방법은 가장 덜 지랄 맞은 부위를 골라 쓰는 것이다. 값비싼 바이올린이나 첼로의 앞판을 보면 자를 대고 그은 것처럼 일정한 간격의 세로줄이 나 있는 걸 볼 수 있다. 통나무 한가운데를 중심의 수직방향으로 켜서 반만 쓰면 이러한 곧은결을 얻을 수 있다. 이 판재 역시 일정한 결을 따라 수축팽창을 하기는 하지만 뒤틀리지는 않으니 이 부위의 판재를 악기에 쓰는 것이다.


  이 방법도 완벽한 것은 아니고 나무 손실도 많으니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 한다. 먼저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은 나무의 빨대 구조를 깨뜨리는 것이다. 나무를 잘게 부순 뒤 접착제를 섞어 다시 판재로 만들거나 나무에서 섬유질만 추출해 역시 접착제를 섞어 원하는 모양으로 만드는 것이 그것이다. 우리가 저가형 가구에서 흔히 보는 파티클보드나 MDF가 바로 이런 것들인데 겉에 나무의 질감을 내는 필름을 씌워 나온다. 또 다른 방법은 나무를 무 깎듯이 얇게 깎은 후 여러 겹을 직각으로 교차시켜 붙여 만드는 것이다. 흔히 우리가 합판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런데 고유의 결과 색, 질감이 살아 있어야 나무인데 이런 것들을 나무로 보는 것은 좀 꺼려진다.


합판, 옆면에서 보면 줄무늬처럼 보이는 것은 서로 다른 방향의 결이 직각으로 만났기 때문이다.


  움직이지 못하게 잡아주는 것은 어떨까? 보통사람들이 손쉽게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고 초보 목수가 제일 먼저 범하는 실수이기도 하다. 죽은 나무가 더 자라날 리는 없으니 나무의 수축과 팽창은 거의 빨대 다발의 가로방향으로 나타난다. 이 방향으로 움직이지 못하게 하면 변형이 없을 거라 생각하기 쉽다. 예를 들면 폭이 30cm 정도 되는 도마의 마구리가 터지는 일이 종종 있으니 마구리에 길이 방향으로 다른 나무를 덧대 고정시키는 것이다. 어찌 될까? 터진다. 단단하게 고정을 더 잘해 놓을수록 더 잘 터진다. 길이 방향으로 덧대 놓은 나무는 움직이지 않으니 결국 도마 안쪽의 빨대 다발이 찢어지는 것이다.


  목공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나름 멋진 식탁과 의자를 만들어 주방에 두었다. 채 석 달이 지나지 않은 겨울날 깊은 잠이 깰 만큼의 ‘쩍’ 하는 소리가 나서 나가보니 폭 80cm 정도의 식탁이 반 가까이 쪼개져 있다. 식탁의 상판과 다리를 결합할 때 무지막지하게 꽉 고정해 놓았기 때문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식탁 의자도 마찬가지 신세가 됐다. 색색의 나무를 길게 켜서 붙인 뒤 터지지 말라고 마구리에 직각방향으로 다른 나무를 덧대어 놓은 결과다. 마구리 부분은 덧댄 나무에 잡혀 움직이지 못하고, 색색의 나무를 붙인 목공 본드는 나무의 빨대 다발 결합보다 강하니 나무의 중간이 찢어졌다.


  나무의 ‘지랄’을 막은 결과다. 아니, 나무의 처지에서 보면 결코 지랄이 아니다. 생물학적인 생명이 다했다고 해서 물리적인 움직임까지 끝난 것은 아니다. 애초에 생명이 없었던 쇠나 플라스틱도 온도나 습도 등의 조건에 따라 변형이 있다. 다만 나무처럼 결이 없으니 사방팔방으로 균질하게 변형이 일어나 문제가 안 되는 것일 뿐이다. 그에 비해 나무는 죽어서도 빨대 다발 구조는 유지되니 이 다발의 가로방향으로 더 많이 움직이는 것일 뿐이다. 사계절이 극단적으로 다른 우리나라의 경우 폭 1m의 판재가 여름과 겨울에 약 1cm의 차이가 있다고 봐도 된다. 이 움직임을 막으니 이런 사태가 발생하는 것이다.


  경험이 많고 솜씨가 좋은 목수들은 나무의 이런 속성을 잘 알기 때문에 억지로 막으려고 하기보다는 어르고 달래며 안고 가능 방법을 택한다. 폭이 30cm밖에 안 되는 도마에도 마구리를 대면 도마가 터지지만 마구리를 대기도 한다. 물론 마구리 전체에 무지막지하게 본드 칠을 하거나 나사못을 박는 것은 아니다. 도마 판재의 중앙 부분은 단단하게 고정하지만 주변부는 완전히 고정하지는 않아 판재가 자유롭게 수축팽창을 하도록 한다. 


  더 솜씨가 좋은 목수는 이마저도 잘 감추면서 멋으로 승화시킨다. 양쪽 마구리 위아래를 조금씩 덜어내면 본 판재에 이어진 얇은 촉이 만들어진다. 마구리에 덧대는 길이 방향의 나무 측면에 이 촉이 들어갈 홈을 파되 가로 방향으로는 조금 여유를 둔다. 이 둘을 결합시킬 때 가운데는 완전히 고정시키지만 양쪽은 움직일 수 있도록 한다. 이렇게 결합시켜 놓으면 겉에서 보기에는 그저 마구리와 다른 나무를 직각으로 붙여 놓은 것 같은데 판재의 촉이 덧댄 나무의 홈에서 자유롭게 논다. 옛날 선비들이 글을 읽을 때 쓰던 서안(書案)도 같은 방법을 써서 멋은 살아 있지만 문제는 전혀 없다.


선비들의 서안(책상), 양 옆의 날렵한 마구리판은 천판과 결이 반대이다. 그러나 안에 홈을 파서 끼워 맞춰 직교하는 두 면이 자유롭게 놀 수 있다.


  나무로 만든 문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원목으로 만든 가구나 방의 문이 통판 하나로 된 것을 본 적이 있는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없다. 문을 통판으로 만들면 겨울엔 헐렁하고 여름엔 빡빡해서 여닫지 못하게 된다. 그보다도 이 정도의 넓은 통판재를 구하기도 어렵고 구한다고 하더라도 휘거나 쪼개지기 일쑤여서 웬만해서는 쓸 수 없다. 대문처럼 커다란 문은 쪽의 판재를 나란히 붙이되 사이 약간의 여유를 두어 수축과 팽창에 대비한다. 판재 여러 장을 옆으로 이어 붙이면 넓은 통판처럼 되지만 이렇게 쓰는 일은 없다.

알판 구조의 문, 원목으로 만든 가구의 문은 대개 이렇다.


  나무로 만든 문 역시 이러한 속성을 멋으로 승화시키기도 한다. 가구나 방의 문을 보면 적당한 폭의 기다란 나무로 만든 사각의 틀 안에 넓은 판재가 들어가 있다. 사각의 틀을 만들려면 결합 부분은 결의 직각방향으로 만나야 해서 문제가 될 수도 있지만 서로가 견뎌낼 수 있을 정도의 폭으로 테두리를 만든다. 안에 들어가는 판재는 꽤 넓지만 사방의 가장자리를 얇게 깎아내 촉을 만들고 테두리 나무의 안쪽 측면에 홈을 내어 결합할 때 끼운다. 안에 넣는 판재를 알판이라 하는데 조금 여유가 있게 판 홈에 본드 칠을 하지 않고 알판을 넣으니 그 안에서 자유자재로 놀 수 있다.


  다들 나무를 좋아하지만 나무의 ‘지랄’은 싫어한다. 그렇다면 선택을 해야 한다. 나무를 잘게 부수거나 섬유질만 뽑아내서 본드로 반죽하면 ‘지랄을 하지 않는 나무’를 만들 수 있다. 그런데 이걸 진짜 나무로 보기는 어렵다. 통나무를 얇게 깎아서 직각으로 교차시켜 붙인 합판이 대안이 될 수도 있다. 빨대 다발이 직각으로 교차된 채 본드로 꽉 붙여졌기 때문에 옴짝달싹을 못하니 변형이 적다. 겉면은 깨끗하고 결이 살아 있는 나무로 붙이니 나무 느낌도 강하다. 그러나 이 역시 온전한 나무는 아니다.


  원목(原木), 사전을 찾아보면 ‘베어 낸 그대로 아직 가공하지 아니한 나무’를 뜻하지만 우리는 흔히 ‘진짜 나무’의 뜻으로 쓴다. 빨대 다발 구조가 깨어진 파티클보드나 MDF는 절대 원목으로 안 쳐준다. 빨대 구조는 살아있지만 직각으로 만나 서로가 서로를 구속하는 합판도 원목으로 쳐 주기는 좀 애매하다. 본래의 빨대 다발이 온전히 남아 있어야 원목이다. 나무가 귀해 길게 쭉쭉 켜서 옆으로 붙여 만든 집성목도 빨대 다발이 살아 있으니 원목으로 쳐 줄 수 있다.


  결, 색, 무늬, 질감 때문에 우리는 나무를 좋아한다. 그런데 이 진짜 나무는 ‘지랄’을 한다. 이것을 근본적으로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있지만 그렇게 하면 진짜 나무가 아니다. 결국 진짜 나무를 곁에 두고 싶으면 나무가 하는 지랄을 안고 가야 한다. 마음껏 지랄을 할 수 있도록 해 줘야 하고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그것을 감춰줘야 한다. 솜씨 좋은 목수들은 그렇게 한다.


다시 '지랄 총량의 법칙'으로 돌아가 본다. 사실 <불편해도 괜찮아>에 나온 '지랄 총량의 법칙'은 청소년들에게 사용한 말이다. 사고도 많이 치고, 속도 많이 썩이는  아이들이지만 그 ‘지랄맞음'에는 총량이 있으니 그 총량을 다할 때까지는 막을 수 없다는, 아니 그 후에야 안정적인 상태가 될 수 있다는 그런 의미다. 굳이 청소년이 아니어도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수 있는 것이겠다. 타고난 것들, 하고 싶은 것들, 드러내고 싶은 것들을 다해야만 비로소 안정적인 상태가 될 수 있다는 것이겠다.


  청소년에게는 ‘지랄 총량의 법칙’이 적용될지 몰라도 나무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청소년들이 철이 들면 더 이상 지랄을 하지 않겠지만 나무는 영원히 지랄을 한다. 바싹 마를수록 줄어들기는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남아 있으니 나무에게는 ‘지랄 무한의 법칙’ 혹은 ‘지랄 영원의 법칙’이 어울릴 듯하다. 총량이 정해져 있다면 그것이 소진될 때까지 기다리면 되겠지만 무한 또는 영원한 것은 아예 포기하거나 안고 가는 것이 방법 외에는 없다.


  ‘지랄 총량의 법칙’은 질풍노도의 시기의 청소년을 키우는 부모에게 잠시 위안을 주기는 하지만 부모들은 곧 또 다른 법칙에 맞닥뜨리게 된다. 나이가 들어 정도는 덜하지만 여전히 지랄을 한다. 짝을 지워주면, 부모가 되면, 불혹(不惑)을 지나면 나아질까 했는데 여전히 새로운 지랄을 하는 자식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 자식만 그런가? 부모, 배우자, 친구 등 주변의 모두가 결국 마찬가지다. 자신이 바라는 모습 그대로만 있기를 바라는데 늘 엉뚱한 방향으로 움직인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방법은 딱 둘이다. 지랄의 근원을 없애든가, 지랄을 안고 가든가. 그러나 앞의 것은 답이 아니다. 빨대 다발 구조를 깨뜨리면 나무가 아니듯이 무한 또는 영원한 지랄의 근원을 없앤다는 것은 사람과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끊겠다는 것이다. 합판처럼 서로가 꽉 붙들고 괴로워하는 것도 방법은 아니다.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관계라면 안고 가는 방법밖에 없다. 마음껏 놀게 해 주되 겉으로 표가 나지 않게 하는 목수처럼 말이다.


  스스로에게도 마찬가지일 듯하다. 40이 다 된 나이에 첼로와 클라리넷을 시작하고, 50이 다 된 나이에 목공을 시작했다. 하는 일은 따로 있는데 이런저런 일에 빠지는 모습을 보며 누군가는 '지랄한다'라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렇게 해야 행복하다면 그리 하는 것이 맞다. 몸속 어딘가에 음악과 목공에 대한 '지랄인자'가 있는데 그것이 마음대로 춤추게 하는 것이 외려 행복한 길이 아닐까 변명을 해 본다.


  앞으로 또 어떤 '지랄'을 하게 될지 모르겠다. 하지만 여러 '지랄'을 해 오면서, 그리고 나무의 '지랄'을 보면서 한 가지 분명해진 것은 있다. 억누르지 말 것! 이건 비단 나에게 해당되는 것만은 아니다. 아이를 키우면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그리고 주변의 사람들을 보면서 모두에게 적용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지랄'을 하는 것이 살아 있다는 증거라면 그것을 영원히 품는 것이 방법이다.  국어선생으로서 말에 관한 책만 써오다 엉뚱하게 쓰는 이 책도 그 지랄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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